[태광의 대전환 ②] 뷰티에서 조선까지, ‘생존을 위한 잡식성 M&A’의 실험
인수합병의 큰 손으로 부상한 태광
태광그룹이 창사 이래 가장 공격적이고 이질적인 식성으로 인수합병(M&A) 시장을 휩쓸고 있다. 화장품 기업 애경산업 인수에 이어 최근에는 중견 조선사 케이조선(옛 STX조선해양) 인수전까지 뛰어들었다. 소비재(B2C)인 뷰티 산업과 중공업(B2B)인 조선업까지 사들이는 광폭 행보는 역설적으로 태광이 처한 상황을 여실히 대변한다는 말도 나온다.
바로 탈(脫) 석유화학을 향한 생존 본능이다.
21일 업계 등에 따르면 태광산업은 최근 미국계 사모펀드 TPG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케이조선 인수의향서(LOI)를 제출했다. 예상 거래가는 약 5000억 원 안팎으로 거론된다.
시장이 주목하는 것은 태광이 조선업을 선택한 타이밍과 전략적 배경이다.
케이조선은 중소형 석유화학제품운반선(PC선) 시장의 글로벌 강자로, 최근 조선업 슈퍼사이클과 맞물려 완벽한 부활을 알리고 있다. 올해 영업이익은 13년 만에 1000억 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HD현대중공업 등 대형 조선사들의 도크가 친환경 고부가가치 선박으로 꽉 차면서, 중소형 선박 발주가 케이조선과 같은 건실한 중견 조선사로 낙수효과처럼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해군 MRO(유지 보수 정비) 사업 진출 가능성이라는 매력도 눈길을 끈다.
미국은 자국 조선업 붕괴로 인해 해군 함정의 MRO 물량을 동맹국인 한국 조선소에 맡기는 방안을 추진 중이며 이를 이른바 마스가(MASGA, 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라 부른다. 그리고 케이조선은 진해조선소의 입지적 강점을 활용해 미 해군 7함대 물량을 소화할 유력 후보로 꼽힌다.
태광은 케이조선 인수를 통해 단순한 제조업 확장이 아닌, 방산과 특수선 분야로의 진입을 노리고 있다. 글로벌 사모펀드인 TPG와 손을 잡은 것 역시 조선업 특유의 변동성 리스크를 분산하고, 향후 미국 시장 진출 시 파트너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하겠다는 고도의 전략적 판단이 깔려 있다.
한편 앞서 체결된 애경산업 인수 계약(지분 63.1%, 약 4700억 원)은 태광의 변신이 전방위적임을 보여준다. 석유화학의 기초 소재 생산에서 벗어나 최종 소비재 시장으로 밸류체인을 확장하겠다는 의도다.
화학 산업이 경기에 따라 실적이 널뛰는 전형적인 시클리컬(Cyclical) 산업인 반면 화장품과 생활용품 산업은 상대적으로 경기 방어적인 성격을 띠며 꾸준한 현금 흐름을 창출한다. 그리고 태광은 애경산업 인수를 통해 포트폴리오의 변동성을 줄이고 안정적인 캐시카우를 확보하려는 전략을 추진하는 중이다.
그 이면에는 역시 위기감이 깔렸다.
태광산업은 2022년 1221억 원, 2023년 994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고, 올해도 적자 탈출이 요원하다.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로 범용 석유화학 제품의 경쟁력은 상실된 지 오래기 때문이다.
실제로 태광은 중국 내 스판덱스 공장을 폐쇄하는 등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더 이상 화학만으로는 그룹의 존립을 장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그 결과 이종 산업 결합이라는 하이브리드 포트폴리오 전략을 낳은 것이다.
다만 이러한 백화점식 확장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적지 않다. 조선업과 화장품 산업은 경영 방식, 조직 문화, 노무 관리 등 모든 면에서 석유화학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태광이 이질적인 두 기업을 인수 후 통합(PMI) 과정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융합시킬 수 있을지가 미지수다. 특히 조선업은 숙련공 확보와 공정 관리가 핵심 경쟁력이다. 화학 섬유 중심의 관리 시스템에 익숙한 태광이 이를 제대로 핸들링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