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누구인가?” 취향 지도 그리는 세 가지 방법 [김설화의 미술관 가는 길을 찾다]

2025-11-18     김설화 큐레이터
김설화 큐레이터는 감각을 지식보다, 질문을 정답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ER 이코노믹리뷰 연재 칼럼 ‘미술관 가는 길을 찾다’는 그가 현장에서 매일 마주하는 경험을 바탕으로, 관람객이 미술관을 더 쉽게 찾는 길을 안내하는 실용 가이드다. 미술 작품 앞에서 멈춰 선 순간부터 시작되는 감상법을 제시한다.

전시장에서 우리는 특정 작품 앞에서 불현듯 멈춰 섭니다. 그렇게 몸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자신이 유독 끌리는 작품들에서 공통분모를 발견합니다. 반복된 선택에는 놀랍도록 일관된 패턴을 가지고 있고, 내가 편안함과 안정을 느끼는 지점이 있습니다.

흔히 이러한 반응을 ‘취향’으로 뭉뚱그리고 지나칩니다. 그런데 그 취향이란 게 무엇일까요?

취향은 ‘나’입니다. 취향은 내가 세상을 지각하고 그 흔적을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취향은 임의의 선택일 수 없고, 체화된 내 삶의 기록입니다. 취향은 내 감각이 작품과 만나는 순간 일어나는 내 감정의 인식이며, 내 삶이 남긴 고유한 필적입니다. 

그러니 내가 특정 작품들에 끌리는 것은 그 작품의 예술가가 남들이 말하는 대가라서가 아닙니다. 남들이 말하는 거대한 이론 때문도 아닙니다. ‘나’ 때문입니다. 수많은 내가 끌리기 때문에 그 작품의 예술가는 대가가 된 것이고, 그 작품들의 경향은 무슨 사조라고 불리게 된 겁니다.

취향, 내 감정의 연대기

왜 거대하고 화려한 형태는 어떤 이들에게 극도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킬까요? 왜 격렬하고 날것 같은 화면 앞에서는 몸이 움츠러드는 사람이 있을까요?

같은 화면을 마주해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감정을 경험합니다. 누군가는 강렬한 색채와 역동적인 붓질 앞에서 생명력과 희망을 느끼지만, 어떤 이는 과거의 상처로 인해 불안과 압박감을 먼저 감지합니다. 절제된 색면과 고요한 화면에서도 어떤 이는 평온한 명상을 경험하고, 다른 이는 공허함이나 외로움을 읽어냅니다.

특히 불편함은 내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감정의 영역을 건드리는 신호입니다. 불편함은 종종 “내가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마음의 경계선이기도 합니다. 지나치게 복잡한 화면이나 과도한 대비를 자주 외면한다면, 그것 또한 취향의 경계를 뚜렷하게 그려줍니다.

같은 작품, 전혀 다른 감상. 이 차이야말로 살아오며 축적해온 태도와 경험, 상처와 기쁨이 어떤 시각적 형태와 공명해왔는지를 드러내는 ‘감정의 연대기’입니다.

같은 화면을 마주해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감정을 경험한다. 그 차이는 내가 축적해온 태도와 경험, 상처와 기쁨이 어떤 시각적 형태와 공명해왔는지를 드러내는 ‘감정의 연대기’이다. 글 = 김설화. 사진 = EOS 갤러리.

취향, 내가 성장하는 항해 기록

그런데 취향이란 한 번 완성되면 변치 않는 고정된 지도가 아닙니다. 새로운 경험과 지식이 추가될 때마다 계속해서 갱신되는 항해 기록에 가깝습니다. 삶의 온도가 달라지고, 관계가 확장되며, 새로운 지식이 쌓일수록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도 함께 이동합니다.

젊은 시절 매료되었던 강렬하고 화려한 작품이 세월이 흐르며 과도한 자극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절제된 색조와 여백의 미학이 뒤늦게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합니다. 이런 변화를 ‘변심’이라기보다 ‘성장’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취향이 움직인다는 건 내가 내면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중요한 것은 이 변화를 의식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좋아했던 작품이 이제는 별로 와닿지 않는다면, 무엇이 달라졌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새롭게 끌리는 작품이 있다면, 그 끌림의 정체를 탐색해보세요. 취향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는 일은 곧 자신만의 내적 변화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더 깊은 자기 이해로 나아가는 귀중한 단서가 됩니다.

결국 전시를 더 재미있게 보는 비결은 나만의 취향 지도를 그려가는 것입니다. 매번 전시를 볼 때마다 그 지도는 조금씩 업데이트되고, 그 변화 자체가 바로 감상의 재미가 됩니다.

나만의 취향 지도를 그리는 세 가지 방법

세 가지만 기억하세요.

첫째, 첫인상의 끌림을 믿으세요. 이유 없이 발걸음이 멈춘 그 순간을 의심하지 마세요.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감상의 시작입니다.

둘째, 불편함을 피하지 마세요. 거부감은 내 감정적 경계의 위치를 알려줍니다. 무엇이 불편했는지 한 단어로 남겨두세요. 이 기록이 쌓이면 취향의 지형이 명확해집니다.

셋째, 취향의 변화를 성장의 징표로 받아들이세요. 과거에 깊이 끌렸던 작품이 이제는 다른 감흥을 준다면, 이는 당신의 내면이 확장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취향의 변화는 자신을 알아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감상은 정답을 찾아 헤매는 과제가 아닙니다. 매 순간 새로운 발견이 이어지는 차분한 탐사로 변합니다. 작품 하나하나가 ‘나’에 대한 단서가 되고, 그 단서들을 모으고 정리하는 과정 자체가 감상의 즐거움이 됩니다. 취향을 따라가는 과정에는 끝이 없고, 그래서 전시는 언제나 새로운 발견의 기회가 됩니다.

나만의 취향 지도를 완성했다면, 전시장을 나서며 질문하세요.

“오늘, 나는 누구인가?”

우솔 〈근묵자흑(近墨者黑)·2023-002〉 Acrylic on canvas 80.3 × 80.3 cm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