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800조 미래 건 기업들, 정부 페이스 메이커 되어야

'AI·반도체' 골든타임, 낡은 법규에 발목 잡혀선 안 돼 '마더팩토리' 선언한 재계… 정부, 파격적 지원으로 속도 맞춰야

2025-11-16     최진홍 기자

대한민국 재계가 800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실탄을 들고 '코리아 마더팩토리'를 선언했다. 16일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주요 그룹 총수들이 한미 JFS(조인트 팩트시트) 이후 제기된 '산업 공동화' 우려를 한순간에 불식시킬 수 있는 대규모 투자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삼성의 450조원, SK의 128조원, 현대차의 125조원, LG의 100조원 투자는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기 앞에서 대한민국을 '추격자'가 아닌 '선도자'로 올려놓겠다는 기업들의 절박한 승부수다. 그리고 풍운의 일보다.

이제 공은 정부로 넘어왔다. 기업들이 미래를 건 베팅을 시작한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기업의 발목을 잡는 낡은 모래주머니 규제를 과감히 걷어내야 한다. 레토릭으로 묻어가는 허망한 속삭임이 아니라,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마음으로 움직여야 한다.

사진=연합뉴스

속도가 생명인 AI 전쟁, 규제가 최대의 적
이번 투자의 심장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AI다. 특히 삼성과 SK가 평택과 용인에 짓겠다는 것은 단순한 반도체 공장이 아니다. 전 세계 AI 혁명을 구동할 HBM(고대역폭메모리)을 생산할 '심장부'로 봐야 한다. 현대차가 125조 원을 쏟아붓는 분야 역시 AI 기반의 로보틱스와 SDV(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다.

문제는 AI 시대의 경쟁이 속도전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6개월이면 기술의 세대가 바뀌는 이 살벌한 전쟁터에서 공장 하나를 짓기 위해 수년간 환경영향평가와 토지 용도 변경, 수도·전력 인허가에 매달려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SK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첫 삽을 뜨기까지 겪었던 지난한 과정을 기억해보라. 그 무사태평함은 천성인가, 관성인가. 도대체 제정신인가.

여기가 끝이 아니다. 기업들은 AI 데이터센터를 짓고 싶어도 '전기 먹는 하마'라는 낡은 프레임과 수도권 규제에 막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현대차가 서남권에 짓겠다는 그린 수소 플랜트, 삼성이 울산에 검토 중인 전고체 배터리 공장 역시 마찬가지다. 이 모든 미래 산업은 현행 법규의 '회색지대'에 놓여 있거나, 복잡다단한 중첩 규제에 묶여 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는 기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기업은 뛰는데… 지원은 '찔끔', 규제는 '겹겹'

다행히 이재명 대통령은 민관 합동회의에서 "규제 완화·철폐를 신속하게 정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말 그대로 '파격적'이고 '신속한' 이행이 나와야 한다. '검토하겠다' 수준의 미온적 대응으로는 초(秒) 단위로 격변하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당장 800조원 투자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선 지금 당장 규제 혁파 원스톱 시스템을 가동해야 한다. 수도권이든 비수도권이든 국가 첨단 전략 산업에 대해서는 인허가 절차를 기존의 절반 이하로 단축시키는 '패스트트랙'을 전면 도입해야 한다. 특히 AI·반도체·배터리 등 핵심 산업 관련 시설은 '선(先)구축 후(後)보완'을 허용하는 수준의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

단순히 장애물을 치우는 소극적 지원을 넘어 파격적인 '당근'도 제시해야 한다. R&D 및 시설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를 대폭 확대하고, AI와 로봇 등 미래 산업을 이끌 핵심 인재를 국가 차원에서 양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꿈에 가까운 희망의 단면을 조금이라도 현실에 묶으어내려면 결국 냉정한 이해득실이 필요한 법 아닌가. 아끼지 말아야 한다. 

'마더팩토리'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이번 투자가 더 의미 있는 것은 삼성이 광주·구미·울산을, 현대차가 서남권을, SK가 울산을 거론하며 '국가 균형발전'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쁘지 않은 그림이다. 기업들이 대한민국 전역을 '첨단 기술의 요람'으로 만들겠다며 멍석을 깔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부가 이 기회를 놓치고 규제라는 장벽 뒤에 숨는다면 단언할 수 있다. 이는 역사의 죄를 짓는 일이다.

기업들은 제조업 공동화 우려에 '마더팩토리'라는 비전으로 화답했다. 이제 정부가 규제 공동화라는 오명을 벗고 '혁신 행정'으로 응답할 차례다. 800조원이라는 천금 같은 기회다. 이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기업이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도록 길을 터주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는 정부가 기꺼이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