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거품론으로 주저앉은 증시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IT큐레이션]
거품론 코스피 덮쳤다…외국인 7.3조원 '역대급' 순매도 미국발 고평가 논란에 韓 반도체 직격탄 닷컴 버블 데자뷔인가, 새로운 산업혁명인가
미국에서 시작된 인공지능(AI) 거품론에 대한 공포가 태평양을 건너 국내 증시를 강타했다. AI 산업의 미래 가치를 둘러싼 고평가 논란이 확산하자 투자 심리가 급격히 위축된 외국인 자금이 11월 첫째 주(3~7일) 국내 주식시장에서 역대 최대 규모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코스피 지수는 큰 폭으로 하락했으며 AI 랠리를 주도했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대형주가 직격탄을 맞았다.
시장은 2000년 닷컴 버블의 망령을 소환하며 격렬한 찬반 논쟁에 휩싸였다. 천문학적인 투자가 이뤄지고 있지만 실질적인 수익이 불분명하다는 거품론과, 실제 수익을 창출하는 우량 기업들이 주도하는 구조적 성장이라는 반론이 11월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검은 11월의 시작…7.3조원 뺀 외국인, 패닉에 빠진 코스피
9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11월 첫째 주(3∼7일) 외국인 투자자는 유가증권(코스피)시장에서 총 7조 2640억원을 순매도했다.
한국거래소가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래 주간 단위로 가장 많은 순매도 규모다. 이전까지 외국인 주간 순매도 최대 기록은 2021년 8월 둘째 주(9~13일)의 7조 454억원이었다. 당시에는 D램 가격 하락에 따른 반도체 업황 위축 우려가 외국인 자금의 대규모 이탈을 불렀다.
3년여 만에 기록이 경신된 이번 셀 코리아의 배경에는 미국발 AI 고평가 논란이 자리하고 있다. AI 산업의 성장에 대한 기대감으로 기술주 주가가 과도하게 올랐으며 가치 평가(밸류에이션) 역시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우려다.
국내 주식시장 역시 AI 열풍에 힘입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종이 강세를 보였기에, AI 고평가 논란은 곧바로 이들 종목에 대한 투매로 이어졌다.
외국인의 순매도세는 두 반도체 대형주에 집중됐다. 가장 많이 순매도한 종목은 SK하이닉스로 총 3조7150억원을 순매도했으며 삼성전자가 1조 5030억원 순매도로 그 뒤를 이었다.
외국인은 지난 3일(7950억원) 이후 7일까지 5거래일 연속 순매도를 이어갔다. 특히 4일과 5일에는 순매도액이 각각 2조원대로 급증했고 6일(1조 7000억원)과 7일(4550억원)에도 매도 우위가 이어졌다.
큰 손 외국인이 대거 매도에 나서자 코스피 지수는 이달 들어서만 3.7% 하락했다. 특히 지난 5일에는 장중 2.8% 넘게 급락하며 프로그램 매도호가 효력이 일시 정지되는 매도 사이드카가 발동되기도 했다. 최근 1450원 선에 근접하며 원화 약세가 이어지는 원·달러 환율 상승세 역시 외국인의 투자 심리를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진원지는 월스트리트…AI 8인방 1160조원 증발, 셧다운 겹악재
국내 증시의 패닉은 미국 뉴욕 증시의 대혼란에서 비롯됐다. 지난 한 주(11월 3~7일)는 뉴욕 증시의 대표 기술주들에게 지난 4월 이후 최악의 한 주로 기록됐다.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MS), 브로드컴, 오라클, 메타, 팔란티어, 알파벳, 아마존 등 AI 관련 대표 종목 8개의 총 시가총액은 이 기간 약 8000억 달러(약 1160조원)가 증발했다. 엔비디아가 7%, 오라클 9%, 팔란티어 11%, 메타와 MS가 약 4% 하락했다. 이들 빅테크가 무너지자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지수는 한 주간 3% 급락했고, 다우 평균 1.2%, S&P500 지수도 1.6% 내렸다.
시장 혼란은 식을 줄 모르는 AI 거품론에 더해 여러 악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투자자들은 빅테크 기업들이 AI에 쏟아붓는 천문학적인 자본지출(CAPEX)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일부 투자운용사들은 "AI 관련 자본 지출은 상당하고 점점 더 부채로 충당되고 있다"며 "2000년대 닷컴 버블 당시의 의심스러운 투자 열풍을 연상시킨다"고 경고했다. 주요 글로벌 투자은행의 최고 경영자들 역시 향후 10~20% 수준의 시장 조정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며 투심을 얼어붙게 했다.
40일째 이어지는 미국 연방 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 정지) 사태도 공포를 키웠다. 핵심 경제 지표 발표가 대부분 중단된 깜깜이 상황에서 일부 민간 지표는 충격적인 수치를 드러냈다. 민간 고용 컨설팅 업체에 따르면 지난달 미국 해고 건수는 2003년 이후 가장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7일 발표된 11월 소비자심리지수(예비치) 역시 3년 만에 최악의 수준으로 추락했다.
악화된 경제 지표는 시장의 공포를 키우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다음 달 기준금리 인하에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금리 선물시장은 12월 금리 0.25%포인트 인하 확률을 60% 후반대로 반영 중이다.
닷컴 버블의 악몽인가, 실적 기반의 성장인가
현재의 AI 열풍이 과거 1929년 대공황이나 2000년 닷컴 버블 붕괴 직전과 닮아있다는 거품론은 크게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는 비이성적 과열(Lunacy)이다. AI 데이터 분석 기업 팔란티어의 주가는 미래 예상 순이익의 230배에 달하는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으며, 증시 과열 정도를 보여주는 실러 지수는 닷컴 버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미국의 한 저명한 경제 기자는 현재 시장 폭등의 본질을 과도한 레버리지(Leverage), 풍부한 유동성(Liquidity), 투자자들의 광기(Lunacy)라는 3L로 요약하며, AI 기술 자체보다 지난 10년간 이어진 쉬운 돈이 거품을 키웠다고 분석했다.
둘째는 수익 없는 투자(No ROI)다. 생성형 AI 도입 기업의 95%가 투자 수익을 내지 못하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기술주의 수익이 높은 가치를 정당화하지 못하면 급격하고 날카로운 조정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셋째는 위험한 거래의 부활이다. 오픈AI가 엔비디아로부터 투자를 받아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식의 순환 투자(벤더 파이낸싱)가 다시 등장했는데, 이는 닷컴 버블 붕괴 당시 연쇄 파산을 불렀던 방식이다. 일부 금융사들이 유리한 신용 등급을 받기 위해 평가 기관을 쇼핑하는 신용 등급 쇼핑 행태가 부활했다는 경고도 나온다.
반론도 있다. 지금의 AI 열풍은 2000년대 초 IT 버블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차이는 실적과 현금흐름이다. 닷컴 버블 당시엔 매출이나 이익 없이 장밋빛 전망만으로 주가가 폭등했지만, 지금의 MS, 알파벳 등은 막대한 현금을 창출하는 거대 공룡이다. 이들 상위 클라우드 기업은 막대한 자본지출에도 불구하고, 영업활동으로 창출한 현금흐름으로 투자를 감당하고 있다.
닷컴 시대 기업들이 주로 부채에 의존했던 것과 달리, 재무 건전성이 뛰어나다는 의미다. 기업 가치평가도 다르다는 진단이다. 1990년대 IT 기업 주가수익비율(PER)이 100배 수준에서 거래됐지만, 현재 엔비디아의 2026년 기준 예상 PER은 29배 수준으로 합리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금융 여건도 2000년 버블 붕괴가 금리 인상기에 발생했던 것과 달리, 현재는 연준의 금리 인하를 기대하는 시점이라는 차이가 있다.
韓 반도체, HBM 업고 "이번엔 다르다"…AI 실험장 기회론 부상
찬반 논란이 격화하는 가운데 특히 국내 반도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과거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닷컴 버블 시기 메모리 수요는 PC에 집중돼 경기 둔화에 취약했다. 하지만 지금의 AI 붐은 AI 데이터센터, 일반 서버, 온디바이스 AI 등 수요층이 다층적이라는 평가다.
무엇보다 HBM(고대역폭메M)이 게임 체인저로 등장했다. HBM은 같은 용량의 D램보다 웨이퍼 투입량이 3배 더 많아, HBM 생산을 늘릴수록 D램 산업 전반의 공급 제약이 심해진다. 이는 메모리 슈퍼사이클 전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닷컴 버블 당시 10개 이상 업체가 치킨게임을 벌였던 것과 달리, 지금 D램 시장은 빅 3 과점 체제로 전환돼 공급 조절이 용이해진 점도 긍정적이다.
국내 일부 전문가들은 최근의 조정을 거품 붕괴가 아닌 건강한 조정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적이 실제로 뒷받침되고 있으며, 반도체 가격이 37일 연속 상승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이런 상황에서 주가 상승을 버블로 보긴 어렵다는 진단이다.
AI 거품론의 근거로 제시되는 빅테크의 부채 확대는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의 무분별한 대출이 아닌 초우량 기업의 일반적인 자금 조달 방식으로 봐야 하며, 순환 투자 역시 산업 확장을 위한 협력적 투자 구조로 해석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오히려 최근 엔비디아의 대규모 GPU 공급 결정 등은 한국을 피지컬 AI(로봇·자율주행)의 핵심 실험장으로 보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미국은 제조 역량이 부족하고 유럽은 소프트웨어가 약한 반면, 한국은 두 가지 역량을 동시에 갖춘 나라로서 AI 실물 구현의 거대한 기회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AI 거품론이라는 유령이 몰고 온 7.3조원의 기록적인 자금 이탈은 분명한 위기 신호지만, 그 이면에서는 실물 산업의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기회론 역시 동시에 부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