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 아닌 ‘에너지’ 안보…韓, 농축·재처리 자립해야”

국내 농축 역량 확보 시 100조원대 신산업 효과 기대 파이로·저농축기술 등 실증 과제…외교 뒷받침도 필요 “군사 안보 차별된 에너지…정부, 컨트롤타워 세워야”

2025-11-06     장지현 기자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국이 원전 연료 전 과정의 해외 의존 구조를 벗어나기 위한 제도·기술·외교 전략 구축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농축·재처리 확보가 ‘에너지 안보 자립’의 핵심 과제라고 입을 모았다.

서울 국회에서 열린 ‘대한민국 에너지 안보를 위한 농축·재처리 필요성과 확보전략’ 세미나에 참석한 주요 관계자들이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진=장지현 이코노믹리뷰 기자

6일 유용원 국민의힘 의원과 허성무 더불어민주당 의원 공동주최로 ‘대한민국 에너지 안보를 위한 농축·재처리 필요성과 확보전략’ 무궁화포럼이 개최됐다. 원자력·에너지안보 분야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의 필요성 및 확보 전략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세미나는 박인국 전 주유엔대사가 좌장을 맡아 발표와 토론 순으로 진행된다. 주제 발표에는 양승태 한국수력원자력 처장, 류재수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진핵주기기술개발부 부장,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가 나섰으며 이어진 토론에는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 황용수 한국전력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 석학교수, 전봉근 한국핵정책학회 회장, 문근식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가 패널로 참여했다.

유용원 의원은 기념사에서 “정상회담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내며 원자력 추진 잠수함 개발의 물꼬를 텄다”면서도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여전히 갖추지 못한 엄중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세계 주요 12개 원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해당 시설을 보유하지 못한 나라”라며 “한미 협정 개정의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하지만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에너지 안보 위기에 대비하는 것이 시대적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2025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성사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논의의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하며 협력 확대 의지를 밝혔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 개발과 관련한 협력을 승인했으며 한국 정부 역시 농축·재처리 권한 확대를 위한 실무 협의에 착수했다.

한국은 원전 연료 전(全) 공정을 해외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에너지 안보 전환기’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미 원자력협정은 1956년 체결돼 2015년에 개정됐지만 여전히 한국은 미국의 사전 동의 없이는 우라늄을 20% 미만으로만 농축할 수 있으며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는 사실상 금지돼 있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협정 개정 논의가 가시화되면서 농축·재처리 권한 확대는 기술·외교·안보를 아우르는 국가 과제로 부상했다.

양승태 한국수력원자력 처장이 발표하고 있다. 사진=장지현 이코노믹리뷰 기자

“에너지 안보 위한 농축·재처리 자립…기술·제도·환경 과제 부상”

양승태 한수원 처장은 우라늄 농축의 필요성을 국가 안보 차원에서 제시했다.

양 처장은 “한국은 원전 연료의 전(全) 공정을 100% 해외에 의존하고 있고 농축 단계가 막히면 연료 생산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제재 이후 농축 가격은 최저점 대비 5배 급등했고 전 세계 공급망은 미국·유럽연합(EU)·러시아·중국 등 4개국 독점 체계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구조에서 언제든 공급이 차단될 수 있다”며 “국내 농축 역량을 확보해야만 전력 공급의 병목을 풀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내 농축 능력이 확보된다면 단순한 자급을 넘어 수입대체 효과 28조원, 수출 포함 100조원대 신산업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기술 독립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으며, 이에 대한 해법으로 양 처장은 ‘블랙박스형 한미 협력 모델’을 제시했다.

양 처장은 “우리가 구상하는 공장은 19.75%까지 농축 가능한 저농축(LEU) 설비로 미국 센트루스와 협력해 건설하는 구조”라며 “핵심 기술인 원심분리기(로터·마그네틱 베어링·고속회전)는 미국 기술을 그대로 도입하고 한국은 UF₆(육불화우라늄) 핸들링과 캐스케이드 제어 등 운영 기술과 생산 관리를 담당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블랙박스 구조는 핵비확산 신뢰를 유지하면서도 실질적 운영권을 확보하는 최선의 방식”이라며 “미국이 자국 농축기업을 부활시키고 있는 지금이 한미 공동 투자 및 기술협력의 적기”라고 강조했다.

주제 발표에 나선 발표자들. (왼쪽부터)양승태 한국수력원자력 처장, 류재수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진핵주기기술개발부 부장,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사진=장지현 이코노믹리뷰 기자

류재수 한국원자력연구원 부장은 재처리 기술의 필요성을 환경과 자원 효율성 측면에서 연결했다.

그는 “원전이 돌고 남은 사용후핵연료의 96%는 여전히 재활용 가능한 자원”이라며 “그대로 버리면 폐기물이지만 회수하면 다시 연료가 된다”고 말했다.

이 대안으로 파이로(Pyro) 전해공정을 제시했다. 고온의 염을 전기분해해 여러 핵물질을 동시에 회수하기 때문에 기존 액체용매 방식(PUREX)보다 핵확산 위험이 낮고 고속로와 연계하면 폐기물 부피는 20분의 1, 독성은 1000분의 1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류 부장은 “SMR(소형모듈원전)이 확대되면 사용후핵연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며 “재처리는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미래세대의 환경부담을 줄이는 책임”이라고 말했다. 이어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당시 무기급 플루토늄 추출을 금지하는 의미로 이뤄졌지만, 지금 우리가 말하는 파이로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라며 “핵무기용으로 적합하지 않은 형태의 연료를 처리하는 기술”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파이로는 중장기적으로 처분장 부피와 열 부담을 줄이고 고열 방사성 핵종을 자연스럽게 회수해 처분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기술 실증뿐만 아니라 외교 협상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도 제언했다. 현행 한미협정은 ‘핵물질 분리 전 단계’까지만 허용하고 있으며 ‘핵물질 분리’ 단계까지 포함한 권한 확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류 부장은 “미국이 2015년 개정 협상 때 ‘국가 계획 없이 단순히 권한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했다”며 “농축·재처리가 필요한 시점과 근거, 국제 공급망 불안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제시해야 협상 명분이 선다”고 말했다. 이어 “기술 실증과 외교 협상이 병행돼야 하며 정부는 재처리를 폐기물 감축과 자원 효율의 정책과제로 명확하게 정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병철 경남대 교수는 제도적 현실로 연결했다.

그는 “2015년 개정 협정이 명시한 20% 미만 저농축 허용 조항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HLBC(한미고위급위원회)가 2018년 이후 열리지 않아 실제로는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결국 협정을 다시 움직여야 기술도 열린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한미협정은 본질적으로 민간 원자력 협력 협정이며 군사 사안은 별도의 정치·군사협정으로 다뤄야 한다”며 “이를 혼용하는 정부와 일부 언론의 메시지는 정책이 아니라 ‘잡음’”이라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협상력은 기술보다 신뢰에서 나온다”며 “정제된 메시지와 일관된 정책 없이는 어떤 협상도 진전되기 어렵다”며 “에너지 안보·탄소중립·공급망 복원력 같은 보편 가치로 협상 프레임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2015년 개정 당시 미국 측은 세부 조항까지 숙지한 전문가들이 대응한 반면, 한국은 전문가 참여가 제한됐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교수는 “다음 협상은 정부·연구기관·산업계가 ‘보안 서약’을 전제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집단지성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실효성을 검토하고 이를 대체할 ‘핵비확산 기본법’ 제정으로 국제사회에 명확한 신호를 줘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이제는 감정이 아닌 논리와 제도로 접근해야 한다. 기술이 있어도 제도가 닫혀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강조했다.

유용원 국민의힘 의원(왼쪽)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장지현 이코노믹리뷰 기자

“국가 아닌 ‘에너지’ 안보…평화적 이용 신뢰 확보돼야”

이어진 종합토론에서는 ‘에너지 안보를 위한 농축 자립’과 ‘평화적 이용의 신뢰 확보’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참석자들은 농축·재처리 기술이 단순한 산업 기술을 넘어 국가 에너지 주권의 문제라는 점에 공감했다.

문근식 한양대 특임교수는 “핵연료를 확보하지 못하면 에너지 안보는 허상”이라며 “20% 미만의 저농축 우라늄을 평화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핵잠수함 추진 논의와 관련해서는 “군사 목적과 민수용(평화적 이용)을 철저히 분리해야 한다”는 입장이 우세했다.

전봉근 한국핵정책학회 회장은 “한미 원자력협정의 틀로 군사 사안을 끌어들이면 양쪽 협상이 모두 꼬인다”며 “민수용은 협정 내에서, 군사 사안은 별도 협정에서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황용수 한전국제원자력대 석학교수도 “민수용 농축 수요는 분명하다. 상용 역량 확보를 위한 단계적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평화적 이용의 신뢰와 단계적 로드맵’으로 구체화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이 모였으며 ▲한미 고위급위원회(HLBC) 재가동을 통한 저농축 협상 복원 ▲비확산 법·제도 정비 ▲재처리·고속로의 단계적 실증 추진 등이 핵심 과제로 제시됐다.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 원장은 “비핵화, 전술핵, 원잠, 농축이 한꺼번에 뒤섞인 비빔밥식 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정부가 컨트롤타워를 세워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이기복 한국원자력학회 회장은 “논의가 자꾸 국가 안보 차원으로 흐르지만 본질은 에너지 안보에 있다”고 짚었다.

그는 “정작 시급한 건 원전이 생산한 사용후핵연료를 저장하고 관리할 ‘중간저장시설’ 부지 확보와 관리 체계 정비”라며 “이미 원전 26기가 가동되고 30기 이상으로 늘어나며 SMR 등 다양하게 증가할 전망인 만큼, 이런 현실적 기반이 마련돼야 원전을 지속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