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보이스피싱] "AI 감시망으로 대응"…'땅굴계좌' 샅샅이 차단
AI 결합형 보이스피싱 급증 대출 본인확인 강화·AI 차단 플랫폼 가동
최근 캄보디아 '프린스그룹' 사건을 계기로 금융권에 보이스피싱 경보가 울렸다. 단순히 개인을 노린 전화사기를 넘어 금융기관의 신뢰와 거래 시스템의 안정성까지 위협하는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이 범죄에 악용되면서 수법은 한층 정교해졌다. 경찰·검찰·금융감독원은 물론 실제 은행 직원을 사칭한 '기관 사칭형' 보이스피싱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실제 근무 중인 직원의 명함과 전화를 위조하고, 영상통화로 제복을 보여주거나 합성된 공문을 내세워 불안을 자극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울산에서는 은행원과 경찰관을 사칭한 범죄조직에 속을 뻔한 70대 여성을 현장 은행원의 즉각적인 신고로 구한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일선 창구의 신속 대응만으로는 범죄 진화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이에 더해 보이스피싱 조직이 자금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일명 '땅굴계좌'라 불리는 은닉 계좌망을 구축해 자금을 분산시키면서 피해액 추적이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 AI로 목소리·신분증까지 합성…피해 연령층 확산
최근 등장한 신종 보이스피싱은 AI 기술을 적극 활용한다. 가족의 목소리를 복제하거나, 가짜 신분증과 영상까지 합성해 피해자를 속이는 방식이다. 단순히 목소리를 흉내내던 수준을 넘어 시각·감정까지 조작하는 'AI 결합형 금융사기'로 진화하고 있다.
20대 A씨는 자신을 검사라고 속인 전화 한 통으로 범죄에 연루됐다는 말을 듣고 사기범의 지시에 따라 '안전폰'을 받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악성 앱이 설치돼 있었고, 전화번호는 검찰·금감원 번호로 위장돼 있었다. 신분증 역시 AI 기술로 합성된 가짜였다. A씨는 1700만원을 조직에 송금했으나 토스뱅크 직원의 다섯 시간에 걸친 설득 끝에 사기임을 깨달았고 추가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이처럼 보이스피싱은 단순한 전화 범죄를 넘어 AI 기술과 결합한 고도화된 범죄로 확산 중이다. 피해는 고령층 뿐 아니라 청년층으로까지 빠르게 번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금융권과 당국이 실시간 차단 시스템과 예방 교육을 강화하지 않으면 심각한 보안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AI가 목소리와 얼굴, 신분증까지 모방하면서 보이스피싱은 더 이상 개인의 부주의 문제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 전체의 신뢰와 안전을 시험하는 구조적 위협이 되고 있다.
이에 정부와 금융권은 전방위 대응에 나섰다.
◆ 카드사·대부업도 대출 본인확인 의무화…내년 5월 시행
우선, 보이스피싱 범죄의 주요 경로였던 대출 창구에 대한 규제가 강화된다. 내년 5월부터 신용카드사, 캐피털사, 자산 500억원 이상 대부업체도 대출을 취급할 때 본인확인을 하지 않아 피해가 발생하면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
금융위원회는 11월 4일 '통신사기피해환급법 시행령'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이번 개정은 지난 3월 '민생범죄 점검회의'에서 발표한 보이스피싱 대응 강화 방안의 후속조치다.
그동안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은 은행·저축은행 등 계좌를 발급할 수 있는 금융회사에만 본인확인 의무를 부과했다.
그러나 최근 범죄조직이 탈취한 개인정보로 카드론이나 비대면 대출을 신청해 자금을 편취하는 사례가 급증하면서 카드사와 대부업자도 동일한 의무 대상에 포함됐다.
본인 확인은 등록된 전화, 대면 확인, 금융실명법상 비대면 실명확인(영상통화·신분증 사본 제출 등) 방법으로 가능하다. 이를 위반할 경우 과태료 최대 1000만원이 부과되며, 피해자 손해배상 책임도 따른다.
금융위 관계자는 "최근 카드론이나 비대면 대출을 악용한 보이스피싱 수법이 늘고 있다"며 "대출 단계에서부터 피해를 차단하는 효과가 기대된다"고 밝혔다.
◆ AI 플랫폼 '에이샙' 가동…'땅굴계좌' 실시간 차단
보이스피싱 조직이 미리 여러 은행에 만들어 둔 '땅굴계좌'도 AI로 즉시 추적·차단할 수 있게 된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여러 금융기관에 걸쳐 최소 5개 이상의 '도피용 땅굴 계좌'를 미리 심어 둔다. 피해자가 속아 송금하면, 은행이 문제 계좌에 지급정지를 걸기 전에 미리 돈을 다른 은행의 땅굴 계좌들로 분산시켜 인출해 간다.
은행 간 전화로 지급정지를 요청하던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대응이 늦어 '골든 타임'을 놓쳤다.
정부는 금융권과 합동으로 만든 AI 기반 감시망을 통해 관련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 범죄 계좌를 곧바로 정지하고 피해금을 환수하도록 할 방침이다.
이에 앞서 금융위는 10월 29일 금융보안원에서 '인공지능 정보공유·분석 플랫폼(ASAP·에이샙)' 출범식을 열었다.
이 플랫폼은 은행·저축은행 등 130개 금융사가 보이스피싱 관련 90여개 정보를 실시간 공유하는 체계다. 은행 간 전화로 지급정지를 요청하던 기존 방식의 한계를 보완해, 범죄 계좌를 즉시 정지하고 피해금을 환수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특히 경찰 수사로 확인된 국외 범죄계좌 정보도 실시간으로 금융권에 전달돼 송금 단계에서 차단된다. 그동안 국외로 자금이 빠져나가면 통신사기피해환급법상 환급이 어려웠던 구조적 한계를 개선한 것이다.
AI가 범죄 패턴을 학습해 유형별로 자동 식별·분석하며, 탐지 역량이 부족한 중소 금융사의 보안 수준을 끌어올리는 역할도 수행한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에이샙이 보이스피싱 범죄를 적기에 탐지·차단하고 국민 안전을 지키는 핵심 인프라가 될 것"이라며 "전 금융권이 협력해 신속 대응 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