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의학 이어 화학까지…'노벨상 2관왕' 日, 기초과학 강국 입증
일본이 올해 노벨상에서 생리의학상과 화학상을 잇달아 거머쥐며 기초과학 강국의 면모를 다시 확인했다.
8일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기타가와 스스무 교토대 교수, 리처드 롭슨 호주 멜버른대 명예교수, 오마르 야기 미국 UC버클리 교수를 2025년 노벨화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들은 금속과 유기물을결합해 내부에 거대한 빈 공간을 지닌 신소재인 '금속-유기 골격체(MOF)'를 만들어낸 공로를 인정받았다.
MOF는 기체나 액체 분자를 흡착·저장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춰 환경·에너지 분야 난제를 해결할 획기적 발견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연구는 1989년 롭슨 교수가 원자의 고유한 성질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려고 시도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양전하를 띤 구리 이온을 중심 금속으로 사용해 네 개 팔(리간드결합 부위)을 가진 유기 리간드 분자와 결합시켰다.
각 팔 끝에는 구리 이온과 배위 결합을 형성할 수 있는 작용기(functional group)가 있었고, 이런 금속-리간드 결합을 통해 3차원 다이아몬드형 결정 구조를 갖춘 MOF가 형성됐다.
다만 당시 합성한 구조는 결정 안정성이 낮아 외부 조건 변화에 따라 쉽게 붕괴되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기타가와 교수와 야기 교수가 이를 안정화하는 데 성공하면서 돌파구가 열렸다
이로써 일본은 올해 생리의학상 수상자에 이어 화학상까지 품에 안았다.
앞서 사카구치 시몬 오사카대 석좌교수는 인체 면역 기능을 조절하는 '조절 T세포(Treg)'의 존재를 규명해 암과 자가면역질환 치료의 패러다임을 바꾼 공로로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 日, 10년만에 한해 2명 노벨상에 열광
일본 사회는 두 학자의 연이은 수상에 들썩였다. NHK는 "기쁜 소식"이라며 속보로 전했고, 요미우리신문과 아사히신문은 저녁 호외를 긴급 발행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기타가와 교수는 탁월한 통찰력과 직감을 통해 위업을 이뤄냈다"고 평가했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독창적 발상에 의한 진리의 발견이 세계로부터 인정받아 자랑스럽다"며 "우리나라 연구력의 탁월함이 평가받은 것은 국민에게 용기를 줄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포털사이트 야후재팬에는 "기초과학은 국력의 기반인데도 경시돼 왔다. 묵묵히 연구해온 선생님들께 고개 숙인다"는 등 찬사가 잇따랐다. 일부 네티즌은 "정부는 기초과학 연구비를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남겼다.
◆ 日 노벨상 30번째…2000년 이후 급증한 '기초과학 결실'
일본 출신으로 외국 국적을 취득한 인물을 포함하면 이번이 30번째 개인 수상이다. 단체 수상까지 포함하면 31번째다. 올해처럼 한 해에 두 명 이상의 일본인 수상자가 나온 것은 2015년 이후 10년 만이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는 물리학상 12명, 화학상 9명, 생리의학상 6명, 문학상 2명이며 평화상은 개인 1명과 단체 1곳이다. 경제학상 수상자는 아직 없다.
특히 2000년 이후 수상자가 급증했다.
고도성장기에 집중 투자된 기초과학이 21세기에 결실을 맺은 결과로 평가된다. 2000∼2002년에는 3년 연속 화학상 수상자를 배출했고, 2002년에는 화학상과 물리학상 수상자를 동시에 냈다. 2008년에는 물리학상 3명, 화학상 1명 등 4명이 동시에 수상했다.
올해 노벨상 연속 수상으로 일본은 다시 한 번 과학기술 경쟁력을 세계에 과시했다. 일본이 노벨상 수상자를꾸준히 배출해온 것은 일본의 황금기로 불린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정부가 대학을 중심으로 기초과학 연구에 지속적으로 투자한 덕분이다.
다만 기초과학만 튼튼할 뿐 이를 산업에 활용하는 능력은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과 중국에도 뒤처진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노벨상 수상자를 여럿 배출한 도쿄대, 교토대조차 대학 내 연구가 기업으로 이어지는 비율이 10% 미만인 것으로 알려졌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일본의 노벨상은 과거의 영광이며, 인공지능(AI)·양자 시대에는 미국중국 한국 유럽이 산업 전쟁을 주도하고 있다"고 분석했을 정도다.
박사 후 연구자(postdoc)에 대한 처우가 낮고, 연구비 경쟁이 심해 2010년대 이후 인재가 빠르게 유출되고 있다.
국내 한 대학 교수는 "기초과학에 과감히 투자한 과거 일본의 정책은 본받을 만하지만, 최근 일본 과학계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도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