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브론의 변심…구조조정 속도전 K정유·석화, 기회?
쉐브론, 韓 중질유 업그레이드·석유화학 대규모 투자 예고 K정유·석화 업계 불황에 정부 직접 나서…기업 간 합의 과정
미국 정유 대기업 쉐브론이 최근 한국을 차세대 투자 거점으로 지목하면서 전통적인 설비 확장 대신 고부가가치와 효율 중심 투자 전략을 본격화하는 분위기다.
전 세계적으로 정유·석유화학 업계가 탄소중립 압박과 수요 둔화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재편의 신호탄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눈길을 끄는 대목한 한국 시장의 변화다. 글로벌 시장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아 온 한국 정유·석화 업계 생존을 위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의 갈림길에 선 가운데 쉐브론의 한국 투자 시사는 글로벌 시장 선점의 기회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15일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브랜트 피시 쉐브론 사장은 지난 8일(현지시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석유회의(APPEC)에서 “중질유 업그레이드 및 석유화학에 막대한 투자가 이뤄지는 지역이 타겟이다”며 한국 시장을 언급했다.
피시 사장은 나아가 “싱가포르와 같은 정유소에서는 대규모 투자를 하지 않고 자본 성장 주기 부분에서 실제 더 나은 수익을 얻기로 결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시아 정유 허브인 싱가포르에서의 대규모 투자는 자제하고, 한국에서 석유화학과 중질유 업그레이드 등 고부가가치 영역에 집중 투자해 사업을 ‘다각화’하겠단 의미다.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재편 흐름을 보여주는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글로벌 탄소 중립 목표가 확산되면서 석유와 같은 화석 연료 대신 수소, 바이오 연료, 전기 등으로 에너지가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기차 보급 확대는 휘발유, 경유 등 기존 정유 제품에 대한 수요 감축을 끌어낸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선진국의 석유 수요는 감소세에 접어들었으며, 신흥국 수요 역시 친환경 정책 강화로 둔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유럽 정유사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도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선언하면서 2030년까지 재생 에너지 발전량을 50GW(기가와트) 수준으로 증가시킬 예정이며, 미국의 엑손모빌(Exxon Mobil)은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CCUS(탄소저감기술)에 대한 연구개발과 수소를 활용해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이처럼 세계적인 정유회사들이 저탄소, 바이오연료 등 사업 다각화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위기 몰린 韓 정유·석화..NCC 설비 통폐합 추진 중
한국의 정유·석유화학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S-OIL·GS칼텍스·SK이노베이션·HD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4사는 화학, 친환경 에너지, 소재 등으로 사업 다각화를 시도 중이지만 지난해부터 이어진 불황으로 영업이익은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정유사의 경우 대부분의 수익 구조가 정유 마진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국내 석화사들 역시 3~4년째 깊어지는 불황으로 사선을 걷고 있다.
올해 주요 석유화학 기업이 발표한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평균 가동률은 전년 대비 대폭 감소하는 것은 물론, 수익성 확보를 위한 평균 수치(70~80%)에도 미치지 못 한 곳들이 대다수였다.
한국화학산업협회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을 통해 진행한 컨설팅 용역에 따르면 국내 석유화학 기업의 영업손익과 재무 상황을 고려했을 때 현재의 불황이 이어진다면 3년 뒤 기업 절반은 지속이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정부와 업계는 연말까지 NCC(나프타분홰시설) 효율화 및 설비감축(현재 대비 최대 20% 감산) 등 구조조정 시나리오를 본격화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기업들은 자발적인 생산 감축과 인수합병(M&A), 효율적인 시설 통폐합 계획을 세워 이행하고, 정부는 여기에 필요한 각종 금융·세제 지원에 나서는 방식이다.
업계에 따르면 여수, 대산, 울산 등 국내 3대 석화 산업단지에선 단지별 정유사를 중심으로 석화사들의 통합 제안이 활발히 오가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정유사는 원유를 들여와 석유화학의 원료인 남사를 생산해 석화사에 판매하고, 석화사는 NCC(나프타분해시설)에서 에틸렌·프로필렌 등 기초 원료를 생산한 뒤 합성수지·합성섬유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드는 구조다. 정유사가 NCC까지 직접 운영해 설비를 효율화하고, 석화사는 원가 절감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어 이 같은 방안은 초기부터 거론돼 왔다.
여수에선 최근 LG화학이 GS칼텍스에게 여수 NCC를 매각하고 합작회사를 설립해 NCC를 통합 운영을 하자는 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GS칼텍스는 시간을 두고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방침이다.
대산에서는 롯데케미칼의 NCC를 HD현대케미칼로 통합하고, 여기에 HD현대오일뱅크다 추가 출자하는 방식이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울산에선 SK에너지에서 나프타를 공급받는 SK지오센트릭과 대한유화가 NCC를 통합하는 구상이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복잡한 지분 구조와 설비 통합, 매각 등 기업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시간이 더 필요할 전망이다.
구조조정 ‘속도전’으로 글로벌 시장 기회 노려야
한국 시장이 전열 재정비의 시련을 겪는 상황에서 쉐브론의 한국 투자 시사는 중요한 변수이자 기회가 될 전망이다. 특히 투자처의 예시로 ‘한국’을 집어 언급했단 건 한국의 석유화학 및 정유 산업의 기술력과 잠재력을 인정한다는 신호로도 분석된다.
글로벌 에너지 공급구조 재편 흐름 속에서 국내 기업들이 신성장 투자 유치와 중장기 경쟁력을 선점할 기회를 마련할 발판이 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업계에선 쉐브론의 투자 발표가 다른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의 한국 투자를 유도하는 역할을 하며, 나아가 한국이 아시아 지역 에너지 허브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한국이 그간 글로벌 정유나 석화 시장에서 높은 기술력을 자랑해 왔다”며 “이미 해외에서도 한국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단행해 오고 있기 때문에 한국 기업들도 구조조정에 있어 ‘속도전’을 통해 자리를 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