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 오른 한미동맹 "남은 과제 첩첩산중"
'300명 구금 사태' 갑작스러운 구금, 8일간의 악몽
12일 오후 3시.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입국장은 눈물과 안도의 한숨으로 가득 찼다. 미국 조지아주에서 날아온 대한항공 KE9036편 전세기가 활주로에 내리자 8일간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던 가족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에 의해 체포·구금됐던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합작공장 건설 현장의 우리 국민 316명이 마침내 고국 땅을 밟는 순간이다.
초유의 사태는 지난 4일(현지시간) 벌어졌다. 98%의 공정률을 보이며 막바지 생산라인 설치 작업이 한창이던 조지아주 엘러벨의 'HL-GA 배터리회사' 건설 현장에 ICE와 국토안보수사국(HSI) 요원들이 들이 닥쳤다. 이들은 현장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기술자 300여 명을 불법체류 혐의로 체포해 인근 포크스턴 구금시설로 이송했다. 쇠사슬로 몸통과 다리를 묶어 그 장면을 영상으로 공개했다.
근로자들의 증언을 통해 드러난 구금시설의 환경은 충격적이었다. A씨는 "인권 보장이 전혀 안 됐다"며 "2인 1실에 화장실 변기가 함께 있어 기본적인 생리 현상 해결조차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B씨 역시 "침대와 샤워시설이 너무 열악했고, 매끼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음식이 엉망이었다. 쓰레기 같았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수갑이 채워진 채 호송 버스에 태워졌고 구금시설에서는 일반 수감자들과 똑같은 '죄수복'을 입고 생활해야 했다. C씨는 "일부러 온도를 떨어뜨리는 건지 의심될 정도로 추웠다"고 말했으며, 또 다른 직원 D씨는 "총구를 들이미는 등 체포 과정 자체가 공포스러웠다"고 전했다. 언제 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보낸 8일은 그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한편 LG에너지솔루션은 자사와 협력사 전 직원에게 귀국 직후부터 한 달간의 유급휴가와 함께 건강검진,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지원하기로 했다. 김동명 LG에너지솔루션 사장은 "현대차그룹과 긴밀히 소통해 좋은 해결 방법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다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라는 시각도 있다. 정부의 발 빠른 외교적 노력과 기업의 지원 끝에 구금된 근로자 전원이 석방 교섭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급한 불은 껐지만 이번 사태가 남긴 파장은 상당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제2, 제3의 구금 사태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예견된 혼란, 모순의 미국 비자 시스템
이번 사태의 핵심 원인은 미국 비자 시스템의 고질적인 문제점에서 비롯됐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구금됐던 한국인 근로자 317명 중 절반이 넘는 53%(170명)가 전자여행허가제(ESTA)를 통해 입국했으며, 146명은 단기 상용·관광 비자(B1·B2)를 발급받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ESTA는 관광이나 단기 상용 목적의 방문만 허용하며 취업 활동은 엄격히 금지된다.
B1 비자의 경우 미 국무부 매뉴얼상 비즈니스 미팅, 장비 설치 및 교육 등의 활동이 가능하다고 명시돼 있으나, 실제 법 집행 현장에서는 그 허용 범위가 매우 모호하고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공장 설비 세팅과 같은 전문 기술 작업이 '단순 설치'의 범위를 넘어서는 '노동'에 해당한다는 것이 미 이민 당국의 판단이었다.
문제는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해 한국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를 적극 유치하면서도 정작 투자에 필수적인 숙련 기술 인력의 입국은 까다로운 비자 제도로 가로막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의 모순적인 정책 기조다.
실제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은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그들은 관광 비자로 들어와 공장에서 일한 것"이라며 "제대로 된 취업비자(working visa)를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연간 쿼터가 제한된 전문직 취업비자(H-1B)는 '하늘의 별 따기' 수준으로 발급이 어려워, 수많은 투자 기업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ESTA나 B1 비자를 활용해 온 것이 현실이다.
다행히 미 백악관 역시 이러한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앤드류 베이커 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대규모 대미 투자가 진행되고 있지만 현행 비자 제도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다"며 제도 개선 필요성에 공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또한 구금된 근로자들이 숙련공이라는 보고를 받고 석방을 보류시킨 뒤, 이들이 미국에 남아 자국 인력을 교육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안정적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비자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다는 기대를 낳는 동시에, 모든 사안을 거래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트럼프식 외교'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얽히고 설킨 실타래, 486조 투자와 관세 전쟁
이번 구금 사태가 벌어진 타이밍도 의미심장하다. 당장 한미 양국이 지난 7월 타결한 관세 협상의 후속 조율이 난항을 겪는 가운데 발생하면서, 미국이 비자 문제를 지렛대로 한국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된다.
앞서 양국은 미국이 예고했던 대(對)한국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한국이 총 3,500억 달러(약 486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단행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투자 방식, 운용 주체, 이익 배분 등 세부 사항을 두고 양측의 입장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약속한 투자금의 상당 부분을 미국이 지정하는 분야에 직접 투자(equity)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또한 투자 대상 선정의 주도권과 투자 이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한국은 전체 투자의 대부분을 간접 지원 성격의 보증(credit guarantees)으로 채우고, 프로젝트의 사업성을 검토해 국내 기업도 참여하는 방식을 원하고 있다.
그 교착 상태에서 나온 러트닉 상무장관의 발언은 노골적인 압박에 가깝다. 그는 CNBC 방송에 출연해 "일본은 (미국이 요구한 조건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한국은 합의를 받아들이든, 관세를 내든 둘 중 하나다. 더 이상의 융통성은 없다"고 못 박았다. 일본이 5,500억 달러 대미 투자를 약속하며 투자처 선정과 수익 배분에 대한 미국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한 만큼, 한국도 이를 따르라는 최후통첩성 발언이다.
이런 상황에서 동맹국 투자 기업의 근로자들을 대거 구금한 사건은 단순한 이민법 집행을 넘어, 관세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미국의 고도의 전략일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한편 정부는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미국과 '한미 비자 워킹그룹'을 구성해 제도 개선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10일(현지시간)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과 회담한 조현 외교부 장관은 "우리 기업 인력이 미국을 방문해 작업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새로운 비자 카테고리(종류) 신설을 포함한 방안을 논의할 워킹그룹을 만들기로 했다"고 밝혔다.
단기적으로는 ESTA와 B1 비자의 허용 활동 범위를 명확히 하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법 집행이 일관되게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중장기적으로는 미 의회 차원의 입법을 통해 한국인 전문인력용 별도 비자(가칭 E-4) 쿼터를 신설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법으로 꼽힌다. 한국은 2012년부터 '한국 동반자법'(Partner with Korea Act) 통과를 위해 노력해왔지만 번번이 실패한 바 있다.
조현 장관은 방미 기간 중 토드 영, 앤디 킴 등 미 상원의원들을 잇달아 만나 "대미 투자 공약 실현을 위해서는 인력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근본적인 재발 방지 대책이 필요하다"며 의회 차원의 지원을 당부했고, 의원들 역시 제도적 지원 모색을 약속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사태 발생 직후 외교부와 주미 한국대사관에 "사안의 신속한 해결을 위해 총력 대응하라"고 지시하며 "미국의 법 집행 과정에서 우리 국민의 권익과 대미 투자 기업의 경제활동이 부당하게 침해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