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지폐 흔들었다" 18조원 경제효과 앞세운 지도 반출 압박...정말?
구글·애플의 끈질긴 요구에 정부 또다시 '결정 유보' 성장 논리 뒤에 가려진 데이터 주권과 안보 위협
정부가 구글과 애플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정밀지도 데이터 국외 반출 요청에 대해 또다시 결정을 유보, 해묵은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혁신 성장’과 ‘국가 안보’라는 가치가 충돌하는 모양새지만 그 이면에는 국내외 기업 간 역차별 문제와 미래 산업의 주도권을 둘러싼 치열한 데이터 주권 다툼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최근 지도 반출의 경제적 효과를 부풀린 연구 결과까지 등장하며 여론을 호도하려는 시도가 이어지자 섣부른 개방이 돌이킬 수 없는 ‘독’이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또다시 결론 못 내렸다"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은 지난 4일 지도 국외반출협의체 회의를 열고 애플이 신청한 1대5000 축척의 고정밀 디지털 지도 국외 반출 여부 결정을 60일간 연장한다고 8일 밝혔다.
앞서 정부는 구글이 지난 2월 세 번째로 신청한 지도 반출 건에 대해서도 지난달 결정을 11월로 미룬 바 있다. 협의체는 “국가 안보와 국내 산업에 미치는 영향 등에 관해 심도 있는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유보 사유를 밝혔지만 사실상 미국의 거센 통상 압박과 민감한 안보 문제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깊은 고심을 드러낸 대목이다.
지도 반출, 돈 된다?
논란이 커지는 가운데 최근 지도 반출을 허용할 경우 막대한 경제적 이익이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눈길을 끈다.
7일 이호석 한국정보통신산업연구원 연구원과 곽정호 호서대 교수는 ‘디지털 지도 데이터 개방이 첨단산업의 경제적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을 통해 지도 데이터를 개방하면 2026년부터 2030년까지 5년간 공간정보산업 분야에서 18조4600억원의 누적 추가 매출이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구진은 국토교통부의 ‘공간정보산업조사’를 인용해 국내 공간정보산업의 성장세가 2021년 9.92%로 고점을 찍은 뒤 2023년 0.6%까지 급격히 둔화됐다며 성장 동력 약화를 지적했다.
이들은 나아가 지도 반출을 불허할 경우 2030년까지 연평균 매출 증가율이 4.31%에 그치지만 반출을 허용하면 글로벌 평균 성장률을 적용해 12.49%까지 치솟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2030년 기준 매출액은 14조8800억원에서 21조7100억원으로 6조8300억원가량 늘어나고 고용 역시 8만8947명에서 10만2048명으로 증가한다는 것이 골자다.
데이터 주권 논란 여진
정보통신기술 업계와 안보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연구진의 결과가 지도 반출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심각한 안보 위협과 국내 산업 생태계 붕괴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장밋빛 청사진’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의 경제적 이익에 현혹돼 데이터 주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정부가 지도 반출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국가 안보 문제다. 당장 한국은 여전히 휴전 상태인 분단국가로 대통령 집무실 국방부 등 주요 국가 보안 시설의 위치 정보 노출은 치명적인 안보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구글 등은 위성사진 서비스를 통해 이미 대부분의 지형이 노출되어 있으며 보안 시설을 흐리게(블러) 처리하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정밀 지도 데이터는 단순한 위성사진을 넘어 지형의 고도 값까지 포함하는 3차원 입체 정보다. 만약 이것이 해외 서버로 넘어가 다른 정보와 결합될 경우 가려진 보안 시설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복원해내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 군 당국의 판단이다. 이는 사실상 우리 군의 작전 능력을 무력화할 수 있는 심각한 위협이다.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 문제도 심각하다. 네이버와 카카오 등 국내 기업들은 수천억원을 투자해 국내에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정부의 규제를 준수하며 지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반면 구글과 애플은 국내에 서버를 두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며 법인세 회피 논란까지 일으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에게만 예외적으로 지도 데이터 반출을 허용하는 것은 국내 기업의 R&D 의지를 꺾고 공정한 경쟁 환경을 해치는 명백한 특혜라는 비판이 거세다.
특히 지도 데이터는 단순히 길 안내 서비스를 넘어 자율주행, 드론, 스마트시티, 증강현실(AR)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인프라로 꼽힌다. 막대한 잠재 가치를 지닌 원유와도 같은 데이터를 아무런 대가 없이 글로벌 기업에 넘겨주는 것은 미래 산업의 주도권을 통째로 내주는 것과 다름없다.
단기적인 경제 효과에 눈이 멀어 미래 성장 동력을 상실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구글맵이나 애플맵 도입이 당장 시급한 과제가 아닌 상황에서 심각한 안보 우려와 국내 업계의 강력한 반발을 무릅쓰고 지도 반출을 강행할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며 “정부가 제시한 국내 데이터센터 설치 등 최소한의 조건을 수용하지 않는 이상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잘라 말했다.
한편 구글은 2011년과 2016년에 이어 올해까지 세 차례나 지도 반출을 공식 요청하며 정부를 압박해왔다. 특히 미국 트럼프 행정부 시절부터 지도 반출 문제가 한미 간 주요 통상 의제로 격상되면서 정부의 부담은 더욱 커진 상황이다. 하지만 한번 국경을 넘어간 데이터는 다시 되돌릴 수 없으며 경제적 효과라는 달콤한 유혹 뒤에 숨겨진 안보의 비수와 데이터 주권의 훼손 가능성을 직시해야 한다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