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戰線)이 요동친다" 사자성어로 읽어보는 'LS-한진 vs 호반-하림' 난타전

전선(電線)에서 시작된 불씨, 그룹의 명운을 건 전선(戰線)으로

2025-08-23     최진홍 기자

전선(電線) 업계의 두 라이벌, LS전선과 대한전선 간의 자존심 싸움이 점입가경이다. LS, 호반, 한진, 그리고 하림까지 포함한 4대 그룹의 분쟁을 아우르는 전선(戰線)이 요동치는 가운데 단순한 기술 분쟁과 특허 소송을 넘어 지분 매입을 통한 압박, ‘백기사’와 ‘우군’을 동원한 합종연횡, 오너 일가의 사재 출연과 자사주 소각 등 현대 기업 전쟁에서 동원될 수 있는 모든 전략과 전술이 총동원되고 있다.

그 거대한 체스판의 중심에는 구자은 LS그룹 회장, 김상열 호반그룹 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이 있다. 그리고 이들의 수싸움은 한국 재벌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어 온 취약한 지배구조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기업 간 적대적 M&A 및 경영권 분쟁의 서막을 알리고 있다. 

사진=구글 제미나이

불구대천(不俱戴天) 100년 라이벌, 끊어진 신뢰의 선
LS그룹과 호반그룹 간 갈등의 뿌리는 깊다. 한국 전선 산업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LS전선과 대한전선의 100년 라이벌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회사는 국가의 산업화와 현대화를 이끌며 전력망과 통신망을 구축해 온 주역이다. 그러나 동시에 시장의 패권을 두고 보이지 않는 전쟁을 계속해왔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해상풍력, 전기차, AI 데이터센터 등 전력 인프라 수요가 폭증하면서 초고압 케이블, 특히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해저케이블 시장이 미래의 핵심 먹거리로 떠오르자 양사의 경쟁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양측의 신뢰가 끊어진 사건은 '해저케이블 공장 설계 기술 유출 의혹'이다. 

경찰이 LS전선이 수십 년간 축적한 초고압 해저케이블 공장의 핵심 설계 도면과 노하우가 외부 설계업체를 통해 2021년 호반그룹에 인수된 대한전선의 당진 신공장 건설에 유출된 정황을 포착했다. 그리고 대한전선 본사와 당진공장, 관련 설계사무소 등을 압수수색하며 수사의 강도를 높이며 양측의 신경전은 최고조에 달했다.

해저케이블은 단순한 전선을 넘어 국가 에너지 안보와 직결되는 전략 기술이다. 수심 수백 미터의 압력과 거친 조류를 견디며 수십 년간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해야 하기에 생산 설비 구축과 운영 노하우 자체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핵심 자산이다. 

LS전선 측은 "수조 원의 가치를 지닌 기술 자산이 통째로 도용당했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수사 결과에 따라 조 단위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반면 대한전선 측은 "정상적인 입찰을 통해 선정한 설계업체의 문제일 뿐, 기술 유출에 관여한 바 없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이 사건은 현재 경기남부경찰청 산업기술안보수사대의 수사가 막바지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그 결과는 향후 양 그룹 간 분쟁의 향방을 가를 최대 변수가 될 전망이다. 

다만 기술 유출 의혹 이전에도 양측의 갈등은 이미 법정에서 진행 중이었다. LS전선이 2019년 대한전선을 상대로 자사 출신 직원을 영입해 '버스덕트 조인트' 관련 특허 기술을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버스덕트는 고층 빌딩이나 공장에 거대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핵심 부품으로, 조인트 기술이 그 성능을 좌우한다. 그리고 5년이 넘는 법정 다툼 끝에 올해 4월 법원은 LS전선의 손을 들어주며 대한전선에 15억 원대의 배상을 명령했다.

이 패소 판결은 대한전선의 모회사인 호반그룹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재명 정부에서도 불편하게 볼 수 밖에 없는 기술 탈취 오명이다.

김대헌 사장. 사진=연합뉴스

궁여지책(窮餘之策) 호반의 역습 '단순 투자'와 '경영권 위협'의 사이에서
법적 분쟁에서 연이어 수세에 몰린 호반그룹은 판을 흔들기로 결정했다. '법'이 어려우면 '돈'으로 밀어붙히는 전략이다.

전장을 법정에서 자본시장으로 옮겼다. 건설업을 기반으로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성장해 온 호반그룹, 그리고 창업주 김상열 회장의 승부사적 기질을 물려받은 김대헌 사장의 후각이 동물적 감각으로 맥을 짚는 순간이다.

호반은 과거 대우건설 인수전 등에 뛰어들며 재계에 그 존재감을 각인시킨 바 있다. 그리고 이번 타겟은 명확했다. 바로 LS그룹의 심장부, 지주회사 ㈜LS였다.

올해 초부터 호반건설 등은 ㈜LS의 주식을 꾸준히 매집하기 시작했다. 현재 3% 이상의 지분을 확보한 가운데 재계는 바짝 긴장하며 향후 추이를 살피는 분위기다. 상법상 3% 지분은 단순히 배당을 받는 소극적 주주의 권리를 넘어 경영에 직접 칼날을 들이댈 수 있는 강력한 무기기 때문이다. ▲임시 주주총회 소집 청구권 ▲회계장부 열람 청구권 ▲이사 해임 요구권 ▲주주제안권 등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그룹의 민감한 내부 정보를 들여다보고, 경영진을 교체하거나 원치 않는 안건을 주총에 상정시켜 경영 활동을 끊임없이 흔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경쟁사의 속사정을 정정당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최고의 카드다.

호반 측은 단순한 투자라고 말한다. 공식적으로 "전력 인프라 산업의 성장성을 보고 진행한 단순 투자"라고 밝혔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이는 거의 없다. 기술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압박용 카드이자 더 나아가 LS그룹의 경영권 자체를 위협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호반이 이토록 자신감 있게 LS를 공격할 수 있는 배경에는 LS그룹 특유의 취약한 지배구조가 있다. 

LS그룹은 LG그룹에서 계열 분리된 이후 구태회, 구평회, 구두회 3형제의 후손들이 지분을 나눠 갖고 함께 경영하는 '사촌 경영' 체제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이는 형제간 화합을 도모하는 긍정적 측면이 크다. 범 LG가를 휘감은 '인화'의 가치는 비록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평가도 받지만 불필요한 경영권 분쟁 소모전을 종식시키고 상생의 경영을 가능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만 오너 일가의 지분이 수십 명에게 잘게 쪼개져 있어 외부 공격에 대한 방어력이 취약하다는 아킬레스건을 안고 있었다. 실제로 현재 구자은 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 45명이 보유한 ㈜LS 지분은 총 32.11%에 불과하며 최대 주주인 구자은 회장의 개인 지분율은 3.66%에 그친다. 

단일 주주가 아닌 여러 가문이 인화의 가치로 연합한 형태이기에 이해관계에 따라 내부 균열이 발생할 경우 경영권은 순식간에 위태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호반은 바로 이 약점을 정확히 파고든 것이다. 영악한 전략이다.

LS전선 미국 해저케이블 공장 착공식. 사진=연합뉴스

합종연횡(合從連衡) 거대 동맹의 결성과 전선의 확장
호반의 공세는 날카롭고 파괴적이었다. 소국 연맹체들이 제국의 바람에 쓸려나가는 역사의 오래된 진리가 새삼 확인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반전이 있었다. LS그룹은 제국의 공세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그저그런 연맹체는 아니었다. 

즉각적인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 그들이 선택한 첫 번째 카드는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고전적인 전략, 즉 공동의 적을 둔 한진그룹과의 동맹이었다. 전선은 순식간에 LS 대 호반의 1:1 구도를 넘어, 'LS-한진' 연합군과 '호반-하림' 연합군이 맞서는 거대한 세력 대결로 확장되었다.

LS와 한진의 동맹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사실 이는 필연에 가까웠다. 호반그룹은 LS뿐만 아니라 한진그룹의 지주사인 한진칼의 지분 역시 18.46%까지 매입하며 조원태 회장 일가(지분율 약 20%)의 턱밑까지 추격해 온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KCGI 등 행동주의 펀드와 힘겨운 경영권 분쟁을 겪었던 한진그룹에게 호반의 존재는 또 다른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이해관계가 일치한 양 그룹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지난 5월 ㈜LS는 자사주를 담보로 대한항공에 650억 원 규모의 교환사채(EB)를 발행하며 연합군군의 깃발을 높히 들어 올렸다. 이는 단순한 자금 조달을 넘어 경영권 분쟁 시 대한항공이 LS의 의결권을 가진 주주, 즉 '백기사'로 참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전략적 포석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양 그룹은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UAM(도심항공교통), 전기차 충전 인프라 등 미래 사업 분야에서 포괄적인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며 단순한 방어 동맹을 넘어 사업적 파트너로서의 관계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그러나 전쟁의 여신은 쉽게 승자를 가려주지 않았다. LS-한진 동맹이 결성되자, 호반 측에서도 우군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바로 '나폴레옹의 모자' 하림그룹이다. 하림의 핵심 계열사인 벌크선사 팬오션이 지난 5월 123억 원을 투입해 ㈜LS 지분 0.24%를 매입했다. 

해운사가 직접적인 사업 연관성이 없는 전선 및 에너지 그룹에 투자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시장은 당연히 이를 호반을 지원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해석했다.

사실 하림과 호반은 이전부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2023년 하림이 HMM(구 현대상선) 인수를 추진할 당시 호반이 자금을 지원하며 힘을 보탠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팬오션의 이번 지분 매입은 그에 대한 보답이자 향후 지분 경쟁이 격화될 경우 호반 측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비록 0.24%는 미미한 수준이지만 이는 추가적인 지원 가능성을 시사하며 LS그룹을 압박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15만톤 벌크선. 사진=팬오션

양웅상쟁(兩雄相爭) 동맹의 경제학
각각의 진영이 거대한 동맹을 구축한 가운데 LS와 한진은 내부 방어벽을 견고히 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가용한 모든 금융기법과 법적 장치를 총동원하는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먼저 오너 일가의 사재 출연(실탄 장전)이다. 사실 LS그룹 방어 전략의 핵심은 오너 일가의 결속력과 책임 경영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구자은 회장, 구자열 이사회 의장 등 LS 총수 일가 6인은 보유하고 있던 계열사 LS에코에너지 지분 약 6%를 매각해 총 677억 원의 현금을 확보했다. 

이들은 지분 처분 목적을 명확히 '계열사 지분 매입'이라고 밝혔다. 호반의 추가 공격에 대비해 ㈜LS 지분을 매입할 '실탄'을 오너들이 직접 사재를 털어 마련한 것으로, 경영권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시장에 던진 것이다.

자사주 소각 (성벽 높이기)도 진행된다. 당장 LS의 두 번째 방어 카드는 1712억 원에 달하는 자사주 100만 주 소각 결정이다. 

물론 자사주 소각은 유통 주식 수를 줄여 주당 가치(EPS)를 높이는 대표적인 주주환원 정책이다. 하지만 이면에는 고도의 경영권 방어 전략이 숨어있다. 주가를 부양시켜 호반이 추가로 지분을 매입하는 데 드는 비용 부담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이는 '성벽 쌓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는 지배구조 안정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자, 자사주 의무 소각을 추진하는 정부 정책 기조에 선제적으로 부응하며 명분까지 챙기는 다목적 카드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LS와 동맹을 맺은 한진그룹 역시 호반의 압박에 맞서 내부 단속에 나섰다. 한진칼이 보유하고 있던 자사주 44만 주(지분 0.66%)를 사내근로복지기금에 무상 출연했기 때문이다.

통상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가 독립 법인인 복지기금에 넘어가면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복지기금은 통상 현 경영진에 우호적인 의결권을 행사하는 경향이 있어, 이는 조원태 회장 측의 우호 지분을 손쉽게 늘리는 효과적인 방어 전략이다. 이를 통해 조 회장 측의 우호 지분율은 약 21% 수준으로 늘어나, 18.46%인 호반과의 격차를 벌리는 데 성공했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용호상박(龍虎相搏) 끝나지 않은 이야기
현재 LS, 한진, 호반, 하림 4대 그룹이 얽힌 경영권 분쟁은 팽팽한 대치 국면 속에서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간 모습이다. 하지만 이는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다.

다양한 시나리오가 예상된다. 먼저 소모적 대치 국면이다. 우선 현 상황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다. LS와 한진이 방어벽을 성공적으로 구축함에 따라 호반이 당장 경영권을 위협하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다만 호반이 잠자코 있을 가능성은 낮다. 3% 주주의 권한을 활용해 끊임없이 LS 경영진을 괴롭히며 기술 분쟁 협상 등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노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이유로 양측 모두 막대한 법률 비용과 경영 자원을 소모하는 지루한 대치 국면이 이어질 수 있다.

일각에서는 극적 타결, 빅딜 가능성도 점친다. 경찰의 기술 유출 수사 결과가 나온 뒤 양측이 물밑 협상을 통해 극적인 타결을 이룰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LS가 기술 분쟁과 관련해 호반 측에 일정 부분 양보하고 호반은 그 대가로 보유 지분을 LS 측 우호 세력에 넘기고 분쟁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빅딜' 시나리오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성은 낮다. 빅딜을 하기에 양측 모두 너무 멀리 왔다.

마지막으로 전면전 돌입 시나리오다. 가장 파국적인 상황이다. 한쪽이 결정적인 약점을 잡거나 예상치 못한 우군이 추가로 등장할 경우, 분쟁은 주주총회에서의 표 대결, 즉 전면적인 위임장 대결(Proxy Fight)로 격화될 수 있다. 이는 그룹의 운명을 건 진정한 의미의 '전쟁'이 될 것이다. 여기에 정부의 강력한 견제가 들어올 경우 국가권력이 게임체인저가 되어 상황이 일변할 가능성도 있다.

한편 이번 사태는 한국 재계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먼저 '사촌 경영' 등 안정적으로 보였던 재벌의 지배구조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님을 명확히 보여줬으며 과거 외국계 투기자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경영권 공격이 이제는 국내 기업 간의 경쟁에서도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뉴노멀'이 되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신속한 동맹 결성, 자사주 소각 등 진화된 금융기법을 활용한 방어 전략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부각될 것이라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