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급한 한화, 여천NCC 소생 방안 두고 "DL케미칼 책임경영 나서야"
한화 “자금 조달 통한 책임경영해야” DL “부진의 근본 원인 해결해야”
여수지역 최대 석유화학업체 ‘여천NCC’를 둘러싼 양대주주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의 대립이 격해지고 있다.
여천NCC가 2020년대 이후 에틸렌 수요 감소와 중국의 저가 공세 여파로 적자에 허덕이면서 그 해법을 두고 이견이 커지고 있다.
한화솔루션은 유상증자 등 적극적 자본 조달로 당장의 워크아웃(채권단 감독 구조조정)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DL케미칼은 경영상황 악화의 근본적 원인은 해결되지 않은, 일시적 자금 수혈이 반복된다는 주장이다.
당장은 DL케미칼이 11일 긴급이사회를 열고 2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승인하며 급한 불은 꺼진 상황이나, 장기적인 금전 지원 여부를 놓고 양사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는 만큼 갈등의 불씨는 여전하다. 이런 가운데 DL케미칼이 지엽적 이슈에만 매몰되지 말고 더욱 의미있는 책임경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26년의 동행 파행 위기…NCC 소생 방안에 이견 발생
여천NCC는 1999년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각자의 나프타분해설비를 통합해 공동 출자한 회사다. 양사가 지분을 50%씩 보유하고 있다. 한때 1조원대 영업이익을 내기도 했지만, 2022년부터 적자 전환했다. 2022년 3477억원, 2023년 2402억원, 지난해 236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적자의 연속은 여천NCC의 존폐를 위협하게 됐다. 투자은행(IB)업계에서는 이달 말까지 약 3100억원의 운영 자금이 부족할 것으로 내다봤다. 결국 한화는 여천NCC의 생존을 위해 추가 자금 수혈을 의결했다. 지난달 30일 이사회 승인을 거쳐 1500억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책임경영을 다하겠다는 취지다.
문제는 DL의 반대였다. 추가 자금 지원을 거부하고 워크아웃 신청을 주장했다. 여천NCC는 합작계약에 따라 증자 또는 자금 대여를 한쪽 주주 단독으로 감행할 수 없다. 이사회 승인이 필수다. 현재 여천NCC 이사는 총 6명으로 한화와 DL이 3명씩 지명한다. DL이 반대한다면 이사회 동률로 한화의 단독 자금 지원까지 불가능한 상황이 된 것이다.
한화는 “자금 지원이 계속 무산되면 8월 21일 디폴트(채무불이행)가 불가피하다”고 토로했다.
NCC, 중국이 등 떠밀고 샤힌이 길 막는다
양사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 배경에도 여천NCC의 뿌리 깊은 부진이 있다. 특히 전통적 에틸렌 수입국이었던 중국이 최대 수출국으로 변모하면서 타격이 컸다.
중국은 5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산 석유화학제품을 대량으로 수입하는 국가였다. 하지만 2020년 이후 중국이 석유화학 제조시설을 대거 확보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업체들은 ‘규모의 경제’에 밀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석유화학 산업의 기초 재료로 꼽히는 ‘에틸렌’ 자급률을 끌어올린 여파가 컸다. 중국의 에틸렌 생산량은 2020년부터 2023년 사이 2500만톤 늘었다. 2020년 연간 3200만톤을 생산하던 때와 비교하면 두 배에 가까운 생산량 증가를 보인 것이다. 반면 한국은 지난해 6월 기준 국내 전체 생산 가능량 1281만톤에 그쳤을뿐이다. 연간 229만톤을 생산할 수 있는 여천NCC도 파도에 휩쓸리게 됐다.
여천NCC의 사정이 악화일로를 걷는 가운데, 정유회사 에쓰오일이 울산 온산국가산업단지에 조성 중인 ‘샤힌 프로젝트’도 DL의 마음을 급하게 만든 요인으로 해석된다.
샤힌 프로젝트는 원유 증류 과정 없이 직접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COTC 방법 중 열분해 방식인 T2C2를 채택했다.
문제는 샤힌 프로젝트의 T2C2가 NCC 사업 모델의 상위호환격이라는 점이다. NCC는 나프타를 분해해 에틸렌을 생산하는 설비를 일컫는다. 하지만 T2C2 방식이 적용되면 나프타 분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에틸렌과 프로필렌을 생산할 수 있다. NCC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저가 에틸렌 제품은 중국에서 대량으로 생산되고, 대안으로 거론되는 고부가가치 제품 역시 샤힌 프로젝트가 경쟁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여천NCC로서는 진퇴양난인 셈이다. DL이 추가 자금 투입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역시 이러한 ‘예견된 어려움’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해욱 DL그룹 회장은 지난 7월 말 여천NCC 위기 극복을 위한 긴급 회의에 참석해 “내가 만든 회사지만 신뢰가 안간다”며 “디폴트에 빠져도 답이 없는 회사에 돈을 투입할 수는 없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여천NCC가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화 “DL은 책임경영 해야”
더 큰 손실이 발생하기 전에 빠르게 사업을 정리해야 한다는 DL의 의견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나 한화와 지역사회,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DL이 책임경영을 간과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화솔루션 역시 석유화학 부진으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어떻게든 신규자금을 지원하고 생산량 감축 등 자체 구조조정을 통해 여천NCC를 회생시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한화 관계자는 “주주사가 지원을 하지 않으며 여천NCC는 당장 디폴트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자구책을 실행한다면 속도가 느릴 수는 있으나 개선의 여지가 충분하고 적자를 탈피할 수 있다”며 주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주주사들이 각각 1500억원씩 자금을 지원하고 산업은행 외화 보증 재개와 자산 유동화 담보대출 등으로 자금을 조달할 경우, 8월 디폴트 위험을 피하고 연말까지 운영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외에도 “여천NCC 공장 가동 정지로 연간 약 900억원의 비용 절감이 가능하다”며 원료다변화를 통한 원가경쟁력 개선 등 추가 자구책 마련안을 제시하기도 했다는 설명이다.
특히 여천NCC가 지역사회의 일자리 창출에 크게 기여하고, 지역 상생의 대표 예시로 거론되는 만큼 디폴트의 여파가 단순 회사 경영 악화에 그치지 않으리란 지적이다. 더군다나 여천NCC는 국내 3대 석유화학단지인 전남 여수에 위치해, 이를 포기하는 것은 현 정부에서 강조하는 ‘지역균형발전’의 취지에도 어긋나기도 한다.
한화는 “여천NCC가 단기 자금 부족을 이유로 디폴트할 경우, 지역사회, 근로자, 정부의 화학업계 구조조정 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 명확하다”며 “한화와 DL은 25년간 여천NCC 공동 경영을 해온 터라 여천NCC 경영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양사가 1500억원씩 지원할 경우 정상화되는데 문제 없다”고 강조했다.
긴급 자본 수혈로 워크아웃은 막았지만…
워크아웃이 다가오면서 DL에 대한 비판 여론도 커지자, 결국 DL 역시 유상증자를 통한 자금 수혈에 참여했다. DL케미칼이 11일 긴급 이사회를 열고 2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승인했다. DL㈜도 이사회를 열고 DL케미칼에 대한 1778억원 규모의 유상증자 참여를 승인했다.
급한 불은 껐으나, DL의 불만은 만만찮은 상황이다.
DL은 “여천NCC 대주주로서 책임경영을 실천하고 여천NCC의 제대로 된 정상화와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면서도 “부실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 분석과 이에 따른 해결방안 마련이 가장 급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책임 있는 주주라면 회사의 부실문제를 미봉책으로 방치하기 보다는 해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DL은 “아무런 설명과 원인 분석 없이 증자만 남발하는 것은 여천NCC의 정상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다”며 “무작정 자금만 투입하는 것이야 말로 책임경영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한화를 비판했다.
특히 지난 3월 여천NCC의 시황 악화 등에 따른 요청으로 DL과 한화가 각각 1000억원씩 증자를 실행한 것을 거론하며 “당시 여천NCC로부터 ‘3월 증자가 이뤄지면 연말까지 현금흐름 상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는 보고를 받았지만 불과 3개월이 지난 시점에 상세한 설명 없이 양 주주사에 1000억원 이상의 증자, 지급보증 또는 대여를 요청해 왔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당시 보고가 거짓이었거나, 경영 부실이 심각하게 방치된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편 한화도 재반박에 나섰다. 당장 DL의 여천NCC 자금 지원 결정부터가 진실인지 의구스럽다는 것이다.
한화는 11일 오후 입장문을 통해 “DL케미칼에 대한 증자가 결정됐다는 공시가 있었지만, 자금 용도가 운영자금으로 기재돼 있어 실제로 DL이 여천NCC에 자금을 지원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한화에 따르면 여천NCC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려면 DL케미칼의 자금 지원 이사회, 여천NCC 이사회 주주사로부터 차입 결의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가적 조치가 있지 않은 상황이다.
한화는 특히 “DL은 여천NCC에 대한 자금 지원과 관련하여 한화측과 어떠한 협의도 진행한바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화는 자금 지원의사가 확고하며, DL도 신속하게 한화와 협의해 공동으로 여천NCC에 자금을 지원하고 조속한 정상화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