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새 정부 첫 兆단위 투자…다른 대기업 지갑 언제 열까?
이재명 정부 출범 후 첫 대기업 투자 발표…'리쇼어링' 신호탄 OLED 기술 초격차·지역경제 활성화·공급망 강화 '세 마리 토끼' 삼성·SK·현대차도 투자 채비…재계 투자 릴레이 본격화 주목
LG디스플레이가 차세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기술력 강화를 위해 경기도 파주 사업장에 1조 2600억 원의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다. 이번 투자는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나온 대기업의 첫 조(兆) 단위 투자 계획이자, 중국 공장 매각 대금을 활용한 '국내 유턴(리쇼어링)' 사례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정부가 첨단산업 육성과 민간 투자 활성화에 드라이브를 거는 가운데, LG의 이번 결단이 다른 대기업들의 투자 릴레이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될지 재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대통령-총수 회동 4일만…LG가 끊은 '투자 신호탄'
LG디스플레이는 17일 이사회를 열고 오는 2027년 6월까지 2년간 OLED 신기술 확보와 설비 구축에 1조 2600억 원을 투자하기로 의결했다고 공시했다. 투자금의 약 70%에 달하는 7000억 원가량이 OLED 핵심 생산기지인 파주에 집중될 예정이다.
LG디스플레이의 이번 결정은 경쟁력이 약화된 LCD 대신 압도적 기술 우위를 가진 프리미엄 OLED에 집중해 미래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글로벌 OLED 시장은 연평균 5%씩 성장해 2028년 약 100조 원 규모에 이를 전망이지만, LCD 시장은 같은 기간 1%대 성장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투자는 기존 생산라인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집중된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기존 '쏘나타'를 만들던 라인을 '제네시스'급 프리미엄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개조하는 셈이다. 이를 통해 기술 격차를 더욱 벌리고, 늘어나는 프리미엄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복안이다. 한편으로는 최근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를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하는 등 기술 유출을 막는 '방어'에도 나서며 공수 양면으로 초격차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탈(脫)중국' 생산거점을 정리한 자금으로 국내 투자를 단행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실제로 LG디스플레이는 지난해 중국 광저우 대형 액정표시장치(LCD) 공장을 현지 업체인 CSOT에 약 2조 2000억 원에 매각하는 계약을 맺은 바 있다. 그리고 이번 파주 투자는 바로 이 매각 대금의 일부를 활용하는 것이다. 해외 생산거점을 정리하고 국내로 복귀하는 상징적 리쇼어링 사례로, 업계에서는 다음 달 중 LG디스플레이가 경기도·파주시와 '국내 복귀 투자 양해각서(MOU)'를 맺고 정부의 투자 보조금 지원 등을 논의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이번 발표는 지난 13일 이재명 대통령과 구광모 LG 회장을 비롯한 5대 그룹 총수 간담회가 열린 지 불과 나흘 만에 나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과거 정부 출범 초기, 대통령과 총수 회동 이후 대규모 투자·채용 계획이 이어졌던 관례에 비춰볼 때 LG가 그 시작을 알린 셈이다. 정철동 LG디스플레이 사장은 "지난해가 반전의 기반을 만든 해였다면, 올해는 도약하는 해가 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할 것"이라며 "선제적인 기술 투자와 차별화된 제품으로 시장을 선도하겠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LG디스플레이의 이번 투자가 반도체에 이어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으로 떠오른 디스플레이 산업의 국내 위상을 강화하고, 파주 등 경기 지역 경제와 국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생태계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재계 투자 릴레이 이어지나…삼성·SK·현대차도 '시동'
재계에서는 LG를 시작으로 다른 대기업들의 대규모 투자 보따리가 곧 풀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재용 회장이 최근 대통령 간담회에서 "AI, 반도체, 바이오 투자를 늘리고 전통 산업에도 AI를 접목해 고임금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현재 진행 중인 글로벌 전략회의 이후 대규모 투자 계획이나 M&A 계획을 구체화할 가능성이 크다.
삼성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 대한 장기 투자 계획을 기존 133조 원에서 38조 원 증액한 총 171조 원으로 확대하며 2030년까지 세계 정상에 서겠다는 비전을 발표한 바 있다.
상황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인 평택캠퍼스를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한다는 방침이다. 무엇보다 이곳의 신규 P3 라인은 최첨단 극자외선(EUV) 공정을 기반으로 5나노미터(nm) 이하 초미세 로직 반도체를 생산하며, 정부가 추진하는 '초격차 클러스터'의 핵심축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삼성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2나노 공정의 주력 생산기지가 될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는 '투트랙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는 미국 빅테크 고객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미국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의 수혜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적 포석이다.
다만 단기적으로는 신중한 기조도 감지된다. 삼성은 2025년 구체적인 설비투자(CAPEX) 계획을 아직 확정하지 않았으며, 시장 상황에 따라 파운드리 투자는 전년 대비 감소할 수 있다고 밝혀 새로운 정부의 기업지배구조 개혁안이 미칠 영향을 관망하며 숨을 고르는 모습이다.
이런 가운데 SK그룹 역시 세계 1위 클라우드 기업 아마존웹서비스(AWS)와 손잡고 울산에 수조 원 규모의 AI 전용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최근 발표하며 AI 시대 주도권 확보에 나섰다.
정부의 AI 전략이 물리적으로 구현되는 가장 상징적인 사업을 추진하며 차세대 시장 선점에 나섰다. SK는 2026년까지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3대 핵심 성장 동력에 총 247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이 중 가장 큰 비중인 142조 2천억 원을 반도체 및 관련 소재 분야에 배정했다.
이 계획의 정점은 역시 총 120조 원을 투입해 4개의 신규 팹(Fab)을 건설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프로젝트다. 이미 착공에 들어간 1기 팹은 2027년 5월 준공을 목표로, AI 시대의 폭발적인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차세대 D램의 핵심 생산 거점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현대차그룹도 대미 투자와는 별개로 올해 국내에만 작년보다 19% 이상 늘어난 24조 3000억 원의 역대 최대 규모 투자를 집행, R&D 역량 강화와 미래 모빌리티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26년까지 3년간 국내에 총 68조 원을 투자하고 8만 명을 직접 채용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연평균 투자액 기준 창사 이래 최대 규모다. 투자 내용의 핵심은 미래 기술 선점으로, 총투자액의 약 46%에 달하는 31조 1천억 원을 연구개발(R&D)에 집중 투입한다. 이를 통해 전동화 전환을 가속하고 자동차를 '달리는 데이터센터'로 만드는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기술 리더십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LG는 LG디스플레이를 시작으로 다양한 가능성 타진에 나선다. LG는 2028년까지 5년간 국내에 약 102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중장기 계획을 내놓은 바 있다.
핵심은 투자액의 절반에 가까운 50조 원 이상을 그룹의 미래 비전인 'ABC' 영역에 집중 투입한다는 점이다. 'ABC'는 정부가 강조하는 인공지능(AI), 바이오(Bio), 클린테크(Cleantech)와 사실상 동일한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LG는 자체 개발한 초거대 AI 모델 '엑사원(Exaone)'을 신약 및 신소재 개발 과정에 적극 활용하며 'AI-바이오 융합'의 성공 사례를 만들고 있으며, 배터리와 전장 부품 등에서도 투자를 확대하며 정부의 '미래 모빌리티' 및 '그린에너지' 육성 기조와 맥을 같이한다는 평가다.
한편 정부는 투자 활성화를 위한 '당근'과 함께 기업지배구조 개혁이라는 '채찍'도 함께 꺼내 들었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과 '노란봉투법' 등 친노동 정책이 대표적이다. 재계는 이러한 개혁안이 경영 활동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투자 심리를 위축시킬 수 있다며 강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정부 지원이 약속된 분야에는 과감히 투자하지만, 그 외 분야에서는 리스크를 우려해 투자를 보류하는 '투자 양극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