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인사이드] 이재명노믹스, 시장 약속과 개입의 딜레마 어떻게 풀까?
'전환적 공정성장'호(號) 출범…'시장' 약속과 '개입' 행보의 딜레마 실용과 개혁 사이, 경제 명운을 건 줄타기 대통령실 '성장' 전면화 속, 재계는 '노란봉투법' 공포
"통제하고 관리하는 정부가 아니라 지원하고 격려하는 정부가 되겠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약속한 '실용적 시장주의'의 비전이다. 그러나 내수 침체와 미국발 관세 전쟁이라는 엄중한 위기 진단 속에서 출범한 이재명 정부의 행보를 바라보는 기업들의 표정은 복잡하다. 대통령의 시장 친화적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노란봉투법'과 같은 강력한 국가 개입적 입법 드라이브가 동시에 예고되면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환적 공정성장'이라는 기치 아래, 한국 경제의 구조와 체질을 근본부터 바꾸려는 야심 찬 항해가 시작됐지만, 그 앞길에는 거친 파도가 예고돼 있다.
'성장 올인' 대통령실, '이재명노믹스' 설계자들 전면 포진
이재명 정부의 정책 의지는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재편된 대통령실 조직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기존 '경제수석'을 '경제성장수석'으로, '경제금융비서관'을 '성장경제비서관'으로 변경한 것은 단순한 명칭 교체를 넘어 경제 정책의 최우선 순위가 '성장'임을 천명한 상징적 조치다. 여기에 수석급 '재정기획보좌관'을 신설, 대통령실 주도의 확장 재정을 통해 신속한 경기 부양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재명표 실용주의'와 '확장 재정' 신념을 공유하는 인사들로 핵심 그룹이 채워졌다.
정책 컨트롤타워인 정책실장에는 김용범 전 기획재정부 1차관이 낙점됐다. 그는 정통 경제 관료이면서도 공직 은퇴 후 가상자산 투자기업에서 일하며 민간과 신기술 금융 경험을 쌓았고,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몇 안 되는 경제 관료"라는 이창용 한은 총재의 평가처럼 국제 감각까지 갖춘 전천후 위기관리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경제 정책의 브레인인 경제성장수석에는 하준경 한양대 교수가 임명됐다. 이 대통령이 성남시장 시절 재정 확대를 주장한 하 교수의 칼럼을 보고 직접 연락해 인연을 맺었을 만큼 대통령의 경제 철학을 깊이 이해하는 인물이다. 특히 '기업가 혁신'을 강조한 슘페터 성장론의 권위자인 그를 발탁한 것은, 분배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받은 소득주도성장과의 명확한 차별화 선언으로 읽힌다.
확장 재정의 이론적 토대와 실행을 책임질 재정기획보좌관에는 류덕현 중앙대 교수가 임명됐다.
류 교수는 "재정 확대로 성장을 이루면 그 과실을 미래 세대가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해 온 대표적인 확장재정론자로, 2022년 대선 캠프에서도 비공개로 재정 정책을 설계한 핵심 브레인이다. 이처럼 대통령실 경제팀은 '실용 관료-혁신 성장학자-확장 재정가'라는 삼각편대를 구축, '이재명노믹스'의 강력한 실행을 예고하고 있다.
'성장'과 '공정'의 구체적 청사진은?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전환적 공정성장'의 구체적인 정책들은 국가 경제의 지형을 바꿀 만큼 거대하고 야심 차다.
먼저 AI, 바이오, 콘텐츠, 방산, 에너지, 첨단제조업을 6대 첨단전략산업(ABCDEF)으로 지정하고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AI에서는 '세계 3대 강국' 도약이라는 목표 아래, 고성능 GPU 5만 개 이상을 확보하고 국가 데이터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AI 고속도로' 구축에 나선다.
에너지 부문에서는 2030년까지 서해안에 20GW 규모의 해상풍력단지를, 2040년까지 한반도를 U자 형태로 잇는 '에너지 고속도로'를 완공해 신재생에너지 시대로의 대전환을 꾀한다. '글로벌 4대 벤처강국'을 목표로 모태펀드 예산을 대폭 확대하고, '문화수출 50조원' 달성을 위해 K-컬처 산업을 전폭 지원하는 등 구체적인 목표치도 제시됐다.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공정'의 축에서는 국민의 기본 생활 안정이 핵심이다. 우선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해 '기본주택' 개념을 포함한 총 250만 가구의 압도적 물량을 공급한다.
GTX 교통망 중심의 4세대 신도시를 개발하고 공공기관의 유휴부지를 활용하는 한편, 1기 신도시 재건축 규제 완화도 병행해 공급에 속도를 낼 방침이다. 이와 함께 금융 소외 계층을 위한 '기본금융' 정책도 추진된다. 일반 예금보다 높은 금리를 주는 '기본저축'을 도입하고, 이를 재원으로 저신용자에게 저금리 대출 기회를 제공해 서민들의 금융 문턱을 낮추겠다는 것이다.
경제 시스템 자체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한 개혁도 동시에 추진된다. 노동시장에서는 '주 4.5일제' 도입과 '법정 정년 65세' 단계적 연장을 통해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고, 자본시장에서는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도입과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을 통해 '코스피 5000' 시대의 초석을 다지겠다는 계획이다.
균열도 있다
이재명 정부의 경제정책 중 가장 눈에 띄는 곳은 노동 분야다. "더이상 사람이 일터에서 죽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대명제와 친경제 행보가 동시에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 처리를 공언한 점이 대표적이다.
재계는 우려하고 있다. 한진중공업, 쌍용차 파업 노동자를 돕기 위한 시민들의 온정에서 유래한 이름과 달리 법안의 핵심은 기업들의 존립 기반을 흔들 수 있다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특히 핵심은 '사용자'의 정의를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자'로 확대(제2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정안이 통과되면 현대차의 수많은 하청업체 노조가 원청인 현대차를 상대로 직접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원청이 정당한 이유 없이 교섭을 거부하면 CEO는 '2년 이하 징역'의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재계는 이는 산업 생태계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수백 개 협력사의 교섭 요구로 원청 업무가 마비될 수 있으며, 감당하지 못할 교섭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국내 공급망을 포기하고 해외로 눈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친노동 성향을 보이는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정부의 입체적 전략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성장과 분재의 길
이재명 정부의 경제 정책은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거대한 설계도와 같다.그리고 대통령실의 인선과 조직 개편은 그 강력한 추진 의지를 보여준다.
다만 '시장주의'를 약속한 대통령의 발언과 '노란봉투법'으로 대표되는 친노동·국가개입적 행보 사이의 간극은 시장의 혼란과 불신을 키울 수 있다는 평가다. 그 간격을 얼마나 기민하게, 또 적절하게 메울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결국 성패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달렸다. 막대한 재정 소요에 대한 신뢰할 만한 해법을 제시하고,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대신 대화와 타협으로 합의를 이끌어내는 리더십을 보여줄 때 '전환적 공정성장'이라는 야심 찬 목표는 비로소 현실이 될 것이라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