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의 그림자, 채권 자경단이 다시 움직인다

금리를 움직이는 것은 연준 뿐일까?

2025-06-04     황유진 기자

Bond Vigilantes:채권 자경단

채권 자경단. AI 생성 이미지.

‘Bond Vigilantes’는 마치 서부 개척 시대의 자경단(vigilantes)처럼, 정부가 재정 지출을 지나치게 확대하거나 방만한 정책을 추진할 때, 채권 시장에서 집단적으로 반발하며 정부를 압박하는 투자자들을 뜻한다.

이 용어는 1983년 경제학자 에드 야르데니(Ed Yardeni)가 “Bond Investors Are the Economy’s Bond Vigilantes (채권 투자자들이야말로 경제의 자경단)”라는 보고서에서 처음 사용했다.
야르데니는 정부의 재정 및 통화 정책이 시장의 신뢰를 잃을 경우, 채권 투자자들이 국채를 대량 매도해 금리를 끌어올림으로써 경고를 보낸다고 설명한다.
이로 인해 정부는 조달 비용 상승의 압박을 받게 되고, 결국 지출 계획이나 정책 방향을 수정하게 된다.

“If the fiscal and monetary authorities won’t regulate the economy, the bond vigilantes will.”

(재정과 통화 당국이 경제를 조절하지 않으면, 채권 자경단이 나설 것이다.)


자경단이 움직였던 순간들

1. 1994년 미국의 “채권 대학살(Great Bond Massacre)”

채권 대학살이라 불리는 미국 국채 금리 급등기.

1993년, 클린턴 행정부는 경기 부양을 목표로 재정 지출 확대와 복지 정책 강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채권시장은 이 조치가 재정 적자를 확대하고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것이라며 곧장 반기를 들었다. 미국 국채를 대거 매도하며 금리 급등을 유도했다.

1994년 한 해 동안, 10년물 국채 수익률은 약 5.2%에서 8.0%까지 치솟았다.

수십 년간 이어졌던 채권 강세장이 한순간에 무너지며, 시장은 충격에 빠졌다. 이 사건은 이후 ‘Great Bond Massacre(채권 대학살)’이라는 이름으로 금융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결국 클린턴 정부는 세제 개편을 축소하고 재정 긴축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채권 시장의 압력이 실제 정책을 바꾼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된다.

채권 자경단의 위력을 설명할 때마다 외신들이 인용하는 말이 있다. 클린턴 행정부 수석 전략가 제임스 카빌(James Carville)의 다음 발언이다:

"I used to think that if there was reincarnation, I wanted to come back as the president or the pope or as a .400 baseball hitter. But now I would like to come back as the bond market. You can intimidate everybody.”

(예전에는 환생할 수 있다면 대통령이나 교황, 혹은 타율 0.400의 야구선수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채권시장으로 태어나고 싶다. 모두를 겁줄 수 있으니까.)

2. 2022년 영국의 “미니 예산(Mini Budget)” 사태

2022년 9월, 당시 영국의 신임 총리였던 리즈 트러스(Liz Truss)는 별다른 재원 조달 방안 없이 대규모 감세 정책(mini budget)을 발표했다. 고소득층 소득세와 법인세 인하가 포함된 이 조치는, 공급 측면의 성장을 유도하겠다는 공격적 공급측 개혁(supply-side reform)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시장은 이를 재정 적자 확대와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해석했다. 발표 직후 영국 국채(Gilts) 가격은 폭락했고, 수익률은 급등했으며, 파운드화는 사상 최저치로 추락했다. 특히 영국 연기금들이 유동성 위기에 내몰리며, 금융 시스템 전반에 경고등이 켜졌다.
결국 정부는 감세 정책을 철회했고, 트러스는 취임 45일 만에 사임했다.

블룸버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Truss had a head-on collision with the bond vigilantes — and lost."
(트러스는 채권 자경단과 정면 충돌했고, 패배했다.)

3. 2025년, 신용등급 강등과 감세 법안 통과 이후

미국 국가부채 시계. 출처: 피터 G. 피터슨 재단.

2025년 5월, 무디스(Moody’s)가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최고 등급인 ‘Aaa’에서 한 단계 강등했다. 며칠 뒤, 하원은 수천억달러 규모의 감세 법안을 통과시켰고, 시장에서는 재정 적자 확대에 대한 경고음이 커졌다.

30년 만기 미국 국채 수익률이 5%를 돌파했고, 주요 국채 ETF 가격은 일제히 하락했다. 외신들은 이 현상을 “채권 자경단의 귀환”으로 평가했다.

CNBC는 이렇게 보도했다:
"This is not a political drama. This is the bond market saying: enough."
(“이건 정치 쇼가 아니다. 채권 시장이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로버트 루빈(Robert Rubin) 전 미국 재무장관의 한마디는 ‘채권 자경단’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준다.
“The market is always right. You can’t fight the bond market. If you try, you’ll lose.”
(“시장은 항상 옳다. 채권 시장과 싸울 수는 없다. 만약 싸우려고 들면 반드시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