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책임준공 못한 신탁사, 채권단에 PF원리금 전액 배상해야"
신탁사 책임준공 손배 범위 첫 판결 손배소송 잇따라...업계 '비상'
신용도가 낮은 건설회사를 대신해 준공 책임을 떠안은 신탁회사가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경우 대출 원금과 연체 이자 등 대주단(채권단 협의회)이 본 손해를 전액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건설업 불황으로 지난해부터 책임준공 사업을 둘러싼 손해배상 소송이 잇따른 가운데 나온 첫 번째 판결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 최종 판결 결과에 신탁 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전날 서울중앙지방법원 제42민사부(부장판사 최누림)는 23개 새마을금고로 구성된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주단이 신한자산신탁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신한자산신탁이 새마을금고 등 대주단에 대출 원리금 전액 256억원 및 연체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책임준공 의무에 대한 신탁사의 손배 책임을 따지는 여러 건의 소송 중 1심 판단이 나온 첫 사례다.
앞서 2022년 신한자산신탁은 경기도 평택시 청북읍 어연리 244-16번지에 짓는 연면적 1만 8588㎡ 규모의 물류센터에 대해 책임준공형 신탁을 대주단에 약속했다.
책임준공형 신탁은 건설사가 약속한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면 신탁사가 금융 비용 등 모든 책임을 떠안는 일종의 보증 상품이다. 하지만 책임준공 기한인 지난해 3월 내 준공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자 이 사업에 자금을 댄 23개 새마을금고 등 대주단은 지난해 4월 신한자산신탁에 대출 원리금 전액과 연체 이자를 지급하라는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피고는 시공사가 아니라 신탁사였다. 신탁계약 수탁자로 나선 신한자산신탁이 대주단의 손해를 대신 배상하기로 사전에 약정(책임준공확약)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대주단의 손을 들어줬다. 책임준공확약서에 대주의 손해를 '대출원리금 및 연체이자'로 명시한 것이 민법 398조에서 규정하는 ‘손해배상액의 예정’에 해당한다는 대주단 측 주장이 맞다고 본 것이다.
확약서상 손배액의 예정이 없었다면 대주단이 대출 약정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양측이 사전에 신탁사의 손배 책임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책임준공 의무 불이행과 손해 간 인과관계 등을 증명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분쟁의 사전 방지 차원에서 (손배액을) 미리 정해 둔 것”이라고 판시했다.
신한자산신탁 측은 재판에서 "지난해 8월 결국 준공이 완료돼 실질적인 손해는 없었다"는 취지로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약서 등에 '책임준공을 미이행할 경우 대출원리금 및 연체이자 전액을 손해 예정액으로 간주하고 배상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어, 채권단이 실제 손해를 증명하지 않아도 신탁사에 배상 의무가 있다고 본 것이다.
"확약서상 문구를 손배액의 예정으로 보는 건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상 손실보전금지 규정 등에 반한다"는 신탁사 측 주장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신탁계약에 따른 대주단의 우선수익권은 금융투자상품이 아니므로 자본시장법을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신탁사는 "늦게라도 준공을 완료했으므로 전보배상(이행에 갈음한 배상)이 아니라 이행 지체에 따른 지연손해금만 부담하면 된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이행 지체 후의 이행이 채권자에게 이익이 없는 때는 전보배상을 해야 하며, 예정된 손배액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며 기각했다.
재판부는 "손해배상액이 과다해 감액이 필요하다"는 신한자산신탁 측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준공 시한이 지켜지지 않은 탓에 대주단이 해당 물류센터를 선매수인에게 360억원에 매각할 기회를 잃었다는 점에서다. 물류센터의 시가가 약 403억원으로 평가돼 대주단의 청구 금액을 웃돈다는 점에서도 부당하게 과다한 금액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신탁사의 손배 책임을 100% 인정한 이번 판결의 파장은 상당할 전망이다.
업계에 따르면 신한자산신탁·KB부동산신탁·우리자산신탁 등 주요 신탁사들이 책임준공 의무 미이행으로 당한 소송은 현재 약 13건에 달한다. 2022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건설경기 침체로 건설사들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책임준공 미이행 사업장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소송에서 대주단은 신탁사의 원리금 전액 보상을, 신탁사는 실제 손해액(연체 이자)만 배상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이번 판결의 법리가 유사 소송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면 신탁사들의 추가 배상이 급격히 커질 가능성이 있다. 작년 2월 이후 현재까지 제기된 책임준공 소송만 13건, 손배액은 3400억여원에 이른다.
아직 소송이 제기되지 않은 책임준공 미이행 사업장에서 소송이 잇따를 가능성도 있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KB부동산신탁·교보자산신탁·대신자산신탁·한국투자부동산신탁·한국토지신탁·대한토지신탁·코람코자산신탁 등 7개사의 책임준공 미이행 사업장 수는 43개, PF 잔액은 1조6000억 원에 달한다.
신한자산신탁은 "일부 법률적 다툼의 소지가 있다"며 항소를 통해 법원의 판단을 다시 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