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웨이의 한국 스토리 톺아보기 [ER매트릭스]

미국 제재와 보안 장벽 넘어 B2B·신에너지로 돌파구 현지화·R&D 투자 '딜레마' 속 미래는?

2025-05-28     최진홍 기자

글로벌 정보통신기술(ICT) 거인 화웨이의 한국 시장 내 여정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2007년 '화위기술'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땅을 밟은 이래 통신장비 시장의 핵심 공급자로 부상했지만 컨슈머 시장에서의 좌절, 그리고 엔터프라이즈와 신에너지라는 새로운 활로 개척까지 숨 가쁜 변화를 겪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화웨이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미중 패권전쟁의 칼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춤추는 중이다. 다만 한국 시장에서도 그에 못지 않은 부침을 겪는 중이다.

교두보로 간다

2007년 10월 '한국화웨이기술유한회사' 설립 초기, 화웨이는 낮은 브랜드 인지도를 극복하기 위해 국내 IT 전시회에서 중국 전통악기 연주회를 여는 등 이색적인 마케팅을 펼치기도 했다. 특히 경쟁사 ZTE의 한국 시장 진출 시도가 난항을 겪는 것을 지켜보며 보다 신중하고 다각적인 접근법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화웨이가 한국 시장의 문을 두드린 이유는 명확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인프라와 신기술에 대한 높은 수용성은 화웨이에게 단순한 판매처를 넘어 첨단 기술의 시험장이자 글로벌 시장 확장을 위한 전략적 교두보로서의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핵심 사업인 통신 네트워크 장비 분야에서 LG유플러스와의 파트너십은 결정적이었다. LG유플러스는 4G LTE 네트워크 구축 초기부터 화웨이 장비를 과감히 도입했으며 5G NR(New Radio) 통신망 구축에도 화웨이 제품을 활용, 서울, 수도권 북부, 강원도 등 주요 지역에 화웨이 기술이 스며들었다. 중국 외 지역에서 화웨이 5G 장비가 상용화된 최초 사례 중 하나였다. 반면 KT와 SK텔레콤은 5G 모바일 코어망에서는 화웨이를 배제했다. ROADM(광회선분배기), PTN(패킷광전송망) 등 일부 유선 전송장비에만 화웨이 제품을 도입해 사용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터진 보안 이슈다. 무엇보다 화웨이가 미중 패권전쟁 정국에서 실체도 없는 백도어 논란에 휘말리자 일이 커졌다. 화웨이의 백도어 논란은 아직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기묘한 반중 정서의 흐름을 타고 통신장비 시장을 강타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중국 보안업체 아이순(iSoon)에서 유출된 내부 문건에 LG유플러스의 통화기록 3TB를 탈취했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 사례는 있다. 그러나 화웨이의 직접적 연루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화웨이는 한국에서 생각보다 통신 네트워크 장비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말았다.

컨슈머 시장의 쓴맛과 B2B로의 무게중심 이동

한때 화웨이  저가 스마트폰을 출시하며 야심 차게 도전했던 컨슈머 시장도 휘청였다. 삼성전자와 애플이라는 강력한 브랜드 충성도와 자체 생태계를 구축한 거대한 산맥 앞에서 고배를 마셨기 때문이다. 

결정타는 2019년 미국의 제재로 인한 구글 모바일 서비스(GMS) 사용 불가였다.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의 핵심 기능이 막히면서 화웨이의 신규 스마트폰 및 태블릿 국내 출시는 사실상 중단됐고 현재 시장 점유율은 집계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그 존재감이 미미하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회복세지만 한국 시장의 높은 진입장벽으로 인해 국내 시장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현재는 스마트워치와 무선 이어폰 등 웨어러블 기기만이 명맥을 잇고 있다.

이러한 컨슈머 사업의 위축은 화웨이가 엔터프라이즈 비즈니스(B2B)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2012년 엔터프라이즈 사업부를 신설한 한국화웨이는 클라우드 서비스(화웨이 클라우드), 'Dorado' 스토리지, 서버, 와이파이6 포함 네트워크 솔루션, 데이터센터 솔루션 등 기업의 디지털 전환(DX)에 필요한 광범위한 포트폴리오를 제공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의 DX 수요 증가는 화웨이에게 기회가 됐다. 여기에 KT가 NH농협은행의 대규모 전산망 개선 사업에 화웨이 네트워크 장비를 공급하기로 한 사례는 화웨이에게 나름의 용기를 줬다는 분석이다. 화웨이는 여세를 몰아 AI 솔루션 시장 공략에도 고삐를 쥐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신성장 동력 '디지털 파워', 태양광 인버터 시장
미국 제재의 파고 속에서 화웨이가 꺼내든 또 다른 카드는 '디지털 파워' 및 태양광 인버터 사업이다. 

GMS와 같은 소프트웨어 생태계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화웨이가 보유한 전력전자 기술과 디지털 통합 기술이 핵심 경쟁력이 될 수 있는 분야로의 전략적 전환으로 풀이된다. 나아가 글로벌 탄소중립 및 신재생에너지 확대 기조와 맞물려 시의적절한 행보이기도 하다. 

한국화웨이도 움직이고 있다. '융합'을 키워드로 디지털 기술과 전력전자 기술을 결합한 솔루션을 국내 태양광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2015년부터 2021년까지 7년 연속 세계 최대 인버터 공급 기업으로 선정된 글로벌 경쟁력을 한국에서도 이어가겠다는 포부다. 특히 스트링 인버터 기술의 독보적 경험과 스마트 I-V 커브 진단, AFCI(아크결함차단장치) 스마트 아크 검사 솔루션 등 AI와 클라우드 기반의 차별화된 제품을 강조한다.

다만 KS인증 과정에서 인버터에 LCD 화면을 부착해야 하는 등 국내 특유의 규제는 넘어야 할 산이다. A/S 전략도 그 능력을 증명하지 못했다.

글로벌 R&D 공룡의 '한국 내 R&D 공백'

화웨이의 글로벌 경쟁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R&D 투자에서 비롯된다. 지난 10년간 R&D에 투자한 총액은 1조 1100억 위안(약 200조 원 상회)에 달하며, 2023년 R&D 투자액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전체 직원의 55%(약 11만 4천여 명)가 R&D 인력일 정도다. 5G 표준필수특허(SEP) 세계 최상위권, 자체 AI 반도체(어센드 시리즈) 개발 등은 이러한 투자의 결실이다.

다만 이러한 막대한 R&D 역량이 한국 시장에 직접 투입되는 형태는 미미하다. 한국 내 대규모 독자 R&D 센터 운영은 확인되지 않아, 한국 시장은 주로 글로벌 R&D 파이프라인을 통해 개발된 기술의 '수혜자' 입장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한국 고객들이 글로벌 혁신의 결과물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 이면에는, 국내 기술 발전 기여도나 현지 시장의 특수한 요구사항에 완벽히 부합하는 맞춤형 혁신 측면에서 경쟁사 대비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심층적인 기술 협력이나 국내 생태계와의 R&D 연동 부족은 장기적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다만 화웨이는 한국 시장의 장벽을 넘기 위해 현지화와 파트너십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국내 대표 MSP 메가존클라우드와는 스탠다드 파트너이자 네트워크 장비 부문 골드 파트너로서 금융, 게임, 미디어 분야 공동 영업을 추진, 2년 연속 '올해의 파트너'로 선정되는 성과를 거뒀다. 

직접 시장 공략의 어려움을 현지 유력 파트너를 통해 우회하고 신뢰도를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또한, 동국대학교, 한양대학교 등과 ICT 인재 양성 MOU를 체결하고, 2015년부터 'Seeds for the Future' 프로그램을 통해 AI, 5G, 클라우드 교육 및 문화 교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사회공헌을 넘어, 부정적인 기업 이미지를 상쇄하고 기술 선도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젊은 세대에게 각인시키려는 '소프트 파워' 전략의 일환으로도 해석된다. 

최근 한국전자통신학회(KIECS)와 공동 발간한 'ICT 백서'를 통해 시장 개방, 차별 금지, 기업 활동 자율성 보장 등을 제언한 것은 주목할 만한 '소프트 어프로치'다. 화웨이가 직접적인 로비보다는 학술적 논의와 정책 제언의 형태를 빌려, 자사가 직면한 규제 및 시장 진입 장벽에 대한 우회적인 문제 제기와 함께 우호적인 사업 환경 조성을 시도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가운데 화웨이는 한국 시장에서 '선택과 집중'의 '바벨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높다. GMS 제약이 큰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최소한의 명맥만 유지하거나 철수하는 대신, 성장 잠재력이 있고 기술 우위를 발휘할 수 있는 엔터프라이즈 솔루션, 클라우드, 태양광 인버터 등 B2B 및 산업용 시장에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In Korea, For Korea(한국에서, 한국을 위한)'라는 비전을 내세우며 현지화 노력을 강화하고 차세대 네트워크 기술(5.5G, 모바일 AI) 리더십을 통해 신뢰 회복과 장기 성장 기반 마련에 나설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