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 신성장 동력 투자로 미래 50년 그린다[CEO파일]

탈탄소·디지털 전환 기술 선점, 트럼프 2.0 한미 조선업 협력 주도로 그룹 성장 노려

2025-06-02     박상준 기자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 사진=HD현대

트럼프 2.0 시대, 미중 패권전쟁과 글로벌 안보 위기를 틈타 K조선과 방위산업이 각광받고 있다. 자연스레 양쪽 산업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HD현대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다.

HD현대는 2025년 1분기 영업이익 1조원대를 기록하며 사상 최대 분기 실적을 달성했다. 지난 2023년 11월 정기선 HD현대 사장이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하며 오너 경영 체제로 전환한 지 1년 만의 성과다. 이런 HD현대의 성장 배경엔 정 수석부회장만의 미래지향적 시각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조선업 불황 극복 구심점에서 도약 선봉장으로

정 수석부회장은 2013년 현대중공업(현 HD현대) 경영기획팀 수석부장 직무를 맡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그룹 경영에 관여해 왔다. 이 시기는 한국 조선업계 전반의 침체기였다. 현대중공업 역시 세계 금융위기로 인한 전방 산업 붕괴에 극심한 불황을 겪었다.

당시 정 수석부회장은 단순 선박 판매 진작을 통한 불황 개선이 아닌, 미래 경쟁력 제고에 초점을 맞췄다. 선박영업과 미래기술연구원에 근무하면서 회사 생존을 위한 일감 확보와 기술개발을 통한 미래 준비에 힘을 쏟았다.

특히 주목할 점은 HD현대마린솔루션(당시 현대글로벌서비스)의 출범이다. 2016년 선박서비스 시장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해 현대글로벌서비스 설립을 주도하고, 2017년에는 직접 대표이사 부사장까지 맡으면서 적극 투자했다.

투자는 실적으로 증명됐다. 현재 HD현대마린솔루션은 지난해 5월 유가증권시장에 성공적으로 상장된 후 올해 1분기 매출 4856억원과 영업이익 830억원을 기록했다. 각각 지난해 동기 대비 26.8%, 61.2% 증가한 수치다. 국제해사기구(IMO)가 중기 환경규제안을 확정하고 규제 강화를 예고한 만큼 친환경 선박 솔루션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HD현대마린솔루션과 셰브론이 저탄소 선박으로 개조하기로 한 16만 입방미터급 LNG운반선. 사진=HD한국조선해양

현재 조선업계의 신조선 건조 물량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로, HD현대마린솔루션의 주요 사업인 AM(애프터마켓, 후속 관리) 솔루션, 친환경 솔루션, 디지털 솔루션 모두 성장에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또한 정 수석부회장은 자체 선박엔진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STX중공업을 인수해 HD현대마린엔진을 설립하기도 했다. HD현대중공업 엔진사업부가 대형 엔진을 생산하는 동시에 마린엔진은 중소형 엔진 생산에 집중하며 포트폴리오를 보완하는 구조다. 인수 TF는 강영 HD현대마린엔진 사장이 담당했다. 정 수석부회장이 신뢰하는 재무통으로, HD현대중공업 지원본부 회계담당임원(상무), 경영부문장(전무), 재경본부장(부사장)을 역임한 인사다.

이처럼 불황기 다져놓은 내실과 글로벌 조선업 호황에 힘입어 HD현대 조선 중간지주사 HD한국조선해양은 올해 1분기 영업이익 1조2864억원을 기록하며 역대 분기 최대 이익을 거둬들였다.

에너지부터·AI까지…미래 먹거리 찾는다

정 수석부회장의 미래시는 비단 조선해양에 국한되지 않는다. 에너지부터 건설기계, AI까지 다방면으로 사업을 확장 중이다.

HD현대일렉트릭 역시 그룹 차원 투자로 급상장한 사례다. 북미 현지 투자를 통해 데이터 센터 등으로 인한 전력 인프라 수요 급증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HD현대일렉트릭 북미 지역 매출 증가와 선별 수주 전략 효과로 지난해 동기 대비 69.4% 증가한 2182억원을 달성하며 영업이익률 21.5%를 기록했다.

수소와 원자력 등 차세대 에너지원에 대한 관심도 크다.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 2021년 그룹의 수소 사업 비전인 ‘수소 드림 2030’을 통해 수소의 생산부터 운송, 저장, 활용까지 HD현대 전 계열사의 역량을 결집한 ‘수소밸류체인’ 구상을 공개했다.

정기선 수석부회장과 로버트 머스크 우글라 머스크 의장이 ‘탈탄소 해운 기술 발전 및 글로벌 통합 물류 서비스 분야의 포괄적 협력 관계 구축을 위한 양해각서(MOU)’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HD현대

세계 2위 해운사 머스크와 손잡은 것도 눈에 띈다. 양사는 탈탄소 선박 관련 MOU를 맺고 HD현대중공업이 건조해 인도한 머스크 컨테이너선에 HD현대 선박 자율운항 전문기업 아비커스의 항해 최적화 솔루션 ‘하이나스’와 HD현대마린솔루션의 인공지능(AI) 기반 탈탄소·경제운항 솔루션 ‘오션와이즈’를 적용한다. 또한 최근 HD현대가 설립한 HD현대하이드로젠을 주축으로 고체산화물 연료전지(SOFC) 시스템 실현성도 검토한다.

원자력 분야에선 빌 게이츠와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지난 3월 빌 게이츠가 설립한 테라파워와 ‘나트륨 원자로의 상업화를 위한 제조 공급망 확장 전략적 협약’을 체결했다.

나트륨 원자로는 테라파워에서 개발한 4세대 소듐냉각고속로로, 고속 중성자를 핵분열시켜 발생한 열을 액체 나트륨(소듐)으로 냉각해 전기를 생산한다. SMR 가운데 안전성과 기술의 완성도가 높으며 기존 원자로 대비 핵폐기물 용량이 40%가량 적은 것이 특징이다.

HD현대는 나트륨 원자로에 탑재되는 주기기를 공급하기 위해 최적화된 제조 방안을 연구 및 도출한다. HD현대의 우수한 생산기술력과 테라파워의 첨단 SMR 기술을 결합해 최종 상업화까지 이뤄내겠다는 전략이다. 협약식에는 정 수석부회장과 빌 게이츠가 직접 참석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HD현대-테라파워 업무협약 체결식. 빌 게이츠(두 번째 줄 왼쪽)과 정기선 수석부회장(두 번째 줄 오른쪽)이 악수 중이다. 사진=HD현대

글로벌 리더들과의 네트워킹도 분주하다. 세계 정·재계, 학계 리더들이 한자리에 모여 글로벌 현안을 논의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인 ‘다보스 포럼’에 2023년부터 꾸준히 참석 중이다.

특히 ‘에너지 산업 협의체’와 ‘공급 및 운송 산업 협의체’에 빠짐없이 참석 중인데, 올해도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운송 등 다연료 미래의 실현과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선박의 건조·운영을 효율화하기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다보스 포럼 현장에서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팔란티어)의 홍보영상을 통해 미래형 조선소(FOS)의 청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FOS는 데이터, 가상·증강 현실, 로보틱스, 자동화, 인공지능(AI) 등 디지털 기술이 구현된 미래형 첨단 조선소다. HD현대는 지난 2021년부터 FOS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궁극적으로 사람의 개입이 최소화된 ‘지능형 자율 운영 조선소’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 수석부회장은 영상에서 “HD현대는 수십 년 동안 가장 획기적인 기술로 세계 조선산업을 선도해 왔다”며 “AI, 디지털 트윈 등 혁신 기술을 통해 새로운 수준의 생산성과 안정성을 확보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최대 전자·가전 전시회 ‘CES 2024’에서는 건설기계의 무인화·자동화를 적극 홍보하기도 했다. 건설산업의 미래로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이트 트랜스포메이션’을 제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안전성 확보 ▲생산성 향상을 위한 무인 자율화 ▲에너지 밸류체인 구축과 탈탄소화 등 3대 혁신 목표를 발표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일련의 미래 먹거리 선점을 통해 그룹의 새로운 50년을 이끌어갈 비전을 실현하겠다고 공언한다.

트럼프 2.0, 성장 발판 될 수 있을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자국 우선주의와 무대포 행정 스타일은 공교롭게도 HD현대에겐 호재로 다가왔다. 트럼프가 직접 한국과 조선업 협력 필요성을 강조하고, 중국산 선박에게 입항 수수료 부과를 예고하는 등 적극 러브콜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 수석부회장은 미국 진출을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미국 주요 인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등 신중하게 미래를 구상 중이다.

현재로서는 현지 투자는 조선소 직접 인수나 건설이 아닌, 현지 조선업체를 통한 간접 투자 기조가 엿보인다. 지난 4월 미국 최대 방산 조선사인 헌팅턴 잉걸스와 ‘선박 생산성 향상 및 첨단 조선 기술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것이 대표적이다. 현지 진출에 막대한 설비 투자 비용과 인건비 문제등 리스크가 뒤따르는 만큼, 당분간은 미국 선박법 개정 등 다양한 변수를 지켜보는 중이다.

다만 트럼프 정부 주요 인사와의 회동은 꾸준히 추진 중이다. 지난 4월 30일에는 존 펠란 미해군성 장관과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직접 만나 조선 기술력을 소개했다. 펠란 장관은 HD현대중공업이 건조한 한국 해군 정조대왕함에 승선했고 올해 말 진수를 앞둔 차세대 이지스 구축함 다산정약용함도 둘러봤다.

존 필린 신임 미 해군성 장관(왼쪽 두 번째)이 지난달 30일 HD현대중공업 울산 본사를 방문해 HD현대 정기선 수석부회장(왼쪽 세 번째)과 함께 현장을 둘러봤다. 사진=연합뉴스

5월 16일에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통상장관 회의 참석을 위해 방한한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도 만나 한미 조선산업 협력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국내 조선업계에서 USTR 대표와 공식 회담을 가진 최초 사례다. 정 수석부회장은 앞서 헌팅턴 잉걸스와의 협력 사례를 거론하며 ▲공동 기술개발 ▲선박 건조 협력 ▲기술 인력 양성 등의 구체적 협력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수석부회장은 조선업 불황 시절 미래 산업 투자와 내실 다지기로 첫 시험대를 무사히 통과했다. 트럼프 2.0 시기 글로벌 불확실성의 파도는 2차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그간 성공가도를 달린 과감한 미래 먹거리 투자와 포트폴리오 다변화 전략이 차세대 성장 동력이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