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더 세진' 상법개정안에...'경제 위축' 우려도 커졌다
이재명, 집중투표제·감사위원 분리선출 '폭탄급' 예고 "최대한 빨리 개정"..."우클릭 중단·포퓰리즘" 비판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후보가 기존 추진해온 수준보다 한층 강화된 이른바 '더 센 상법개정안'을 예고한데 대해 국민의힘은 곧바로 '반(反)기업적 포퓰리즘 행보'라며 비판의 수위를 올렸다. 국민의힘 뿐만이 아니다. 그간 재계 경영결정을 감시하는 인사들마저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후보는 코리아디스카운트(한국주식 저평가) 해소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기업 경영권 행사에 대해 강력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여온 인사들마저 이 후보의 폭탄급 상법개정안에 대해서는 '극단적이다'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촉발한 전세계 무역전쟁 우려가 고조되며 기업들이 생존을 위한 사업재편에 속도를 내야 할 중요한 시점에 기업을 지원하기는커녕 오히려 옥죄려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후보는 4월 21일 금융투자협회에서 서유석 금투협회장과 17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 등과 국내 주식시장 활성화를 위한 간담회를 열고 상법개정안을 재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재추진하는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 의무를 회사 뿐만 아니라 주주로 확대하고, 전자주주총회를 의무화하는 기존 상법개정안의 내용 이외에도 ▲대규모 상장사 집중투표제 의무 적용 ▲대규모 상장사 감사위원 분리선출 강화 등의 내용도 추가하기로 했다.
앞서 민주당이 당론으로 추진한 상법 개정안은 3월 1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가 4월 1일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국회로 돌아왔고, 같은달 17일 재표결 끝에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되며 자동 폐기됐다.
폐기된 상법개정안에서는 기업의 우려와 반발이 크다는 이유로 대규모 상장사 집중투표제 의무 적용, 대규모 상장사 감사위원 분리 선출 강화 등의 조항들이 제외됐었다.
집중투표제는 회사의 이사 선임 시, 주주가 보유한 주식 1주당 선임될 이사의 수만큼의 의결권을 부여받아, 이를 특정 후보에게 집중적으로 또는 여러 후보에게 분산해 행사할 수 있는 투표 방식이다. 1주당 여러 표를 얻어 특정 후보에게 몰아줄 수 있고, 여러 후보에게 분산해 투표할 수도 있다. 현재 상법에서는 집중투표제 적용 여부를 회사가 정관으로 결정할 수 있지만, 이를 의무화할 경우 모든 기업에 집중투표제를 적용하게 된다.
감사위원 분리선출 제도는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를 다른 이사들과 분리해 별도로 선임하는 것인데, 선임 과정에서 대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해 감사위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다. 현행 상법상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는 3인 이상으로 구성된 감사위원회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며, 이 중 최소 1명은 분리선출해야 한다. 민주당은 이같은 감사위원 분리선출 대상을 2명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그간 추진해 왔다.
이날 이 후보는 "대한민국 자산 시장이 부동산 중심인 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본시장이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라며 "저도 꽤 큰 개미 중 하나였고, 정치를 그만두면 주식 시장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99%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회복과 성장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해, 주가지수 5000시대를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 후보는 특히 최근 폐기된 이사충실 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을 언급하면서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이를 재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후보는 기존 안보다 더 강화된 상법 개정안 추진을 예고하며 "이번에 상법 개정에 실패했는데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해야 한다, '이기적인 소수들의 저항'이라고 생각되는데 당연히 바꿔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상법이 개정되면 지배 대주주의 횡포가 줄어들고 비정상적 경영 판단도 중단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이 후보가 상법개정안 강화를 언급한 이유는 소액주주를 대표하는 이사를 선임하고 경영 감시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되자 이 후보가 동학개미들의 표심을 위해 정책을 수정했다는 시각도 있다.
이 후보는 민주당 대표를 맡고 있던 최근까지도 '기업주도성장'을 강조하며 우클릭 행보를 보여왔다.
조기 대선 국면에서 이 후보는 100조원대 규모의 인공지능(AI) 산업 육성책을 발표하는 등 성장과 친기업을 강조했다. 이 후보의 대선 싱크탱크 ‘성장과 통합’은 ‘3·4·5 성장 전략’을 내놓으며 2030년까지 3% 잠재성장률, 4대 수출 강국, 1인당 국민소득 5만달러를 달성하겠고 강조한 바 있다.
재계 반발을 우려해 상법개정안 재추진에 있어서도 속도 조절에 나설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지만, 이날 이 후보의 발언은 이같은 예상이 한참 빗나갔다는 점을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아울러 최근까지 이 후보가 보인 '우클릭' 행보가 결국은 득표 전략에 불과했다는 의심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 대선 때도 이 후보는 부동산 감세 등 보수와 중도층을 겨냥한 여러 공약을 발표했으나 선거가 끝나자 당내 강경파에 밀려 입장을 바꿨다. 올해 2월 3일 이 후보는 반도체특별법 관련 토론회를 주재하면서 반도체 업계의 숙원인 주 52시간 규제 완화에 공감하는 발언을 내놨지만 당내 저항에 부닥치자 곧바로 이러한 입장을 철회했다.
이러한 이 후보의 행보에 대해 오로지 득표 전략에 기반한 진정성 없는 성장담론만 이어가고 있다는 비난이 적지 않다.
삼성전자 임원출신 반도체 전문가인 양향자 전 의원은 4월 19일 열린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1차 토론회에서 "이 후보의 AI 공약은 빈 깡통"이라며 이 후보의 공약을 인쇄한 종이를 찢어버리기도 했다.
"극단적으로 가선 안된다"...학계도 준법감시위원회도 우려
장하준 영국 런던대 경제학과 교수는 4월 22일 국회사무처 초청으로 국회 의원회관에서 ‘글로벌 경제질서 변화와 대한민국 경제정책 전략’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며 민주당이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 등에 대해 "극단으로 가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국내 제조업 등 생산적인 기업들이 주주들의 현금 인출기가 되는 순간 우리나라는 끝”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기업 이윤의 10% 이상을 자사주 매입에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 등 일정한 선이 필요하다”며 “한국 기업들이 주주 환원에만 집중하면, 결국 생산적인 기업 활동을 저해하고 국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상법개정안의 주 내용들은 이미 글로벌 주요국들도 다 도입한 것'이라는 이 후보의 주장에 배치되는 것으로 보이는 근거도 제시했다.
장 교수는 미국을 예시로 들며 "미국의 금융 시장은 완전히 기생충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미국 기업들은 이윤의 90~95%를 주주 환원에 사용한다"며 "(주주 환원 때문에) 투자를 안하니 생산성은 떨어지고 외국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악순환이 계속됐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그간 대기업집단 체제와 재벌가의 경영권 행사에 정부가 강력히 통제할 필요성도 언급해 온 만큼 적어도 친기업 학자로는 분류되진 않는다. 그의 이번 발언에 객관성이 실리는 이유다. 장 교수의 사촌형인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문재인 정부시절 '소득주도성장'을 뒷받침했을 뿐 아니라, 이미 2006년 '장하성 펀드(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 KCGF)를 설립하기도 했다.
삼성의 경영진 의사 결정을 감시하는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감위) 위원장 역시 상법개정 목적 자체가 정치적 이해 관계를 떠나 국민을 중심에 둬야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4월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생명 서초사옥에서 열린 3기 준감위 정례회의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국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상법 개정안 등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닌 국민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며, 글로벌 경제 위기 극복 차원에서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며 "어떤 법을 바꾸느냐보다 그 법을 어떻게 준수하고 잘 적용해 나갈지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이는 재계의 대표격인 삼성그룹의 준법 감시 및 통제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경영진의 적법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지를 감시하는 위원를 이끌고 있는 인사가 상법개정안에 대해 피력한 견해다.
삼성 준감위는 문재인 정부 시절인 지난 2019년 8월 29일 국정농단 사건 관련 재판에서 재판부의 주문으로 2020년 구성됐다. 즉, 이 위원장의 발언은 이 후보가 지적한 '소수들의 저항'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새겨볼 필요성이 있다는 평가다.
정부 역시 상법 개정안 관련해서는 부작용을 여전히 우려하며 주주권익 제고를 위해서라면 자본시장법 개정의 필요성이 더 크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상법 개정안은 100만개 이상의 모든 법인을 대상으로 모든 주주를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면,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2500여 상장법인에 한정하여 합병, 분할 등 특정 행위에만 적용하며,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절차적 장치를 중심으로 규제하고 있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4월 21일 외신기자 간담회를 열고 "자본시장법 개정은 상장사 2500개 정도만 적용되는데 상법 개정은 비상장사 포함 100만개 정도 회사에 모두 적용된다. 또 자본시장법은 합병이나 분할과 같은 자본거래만 해당하지만, 상법은 일상적인 영업활동도 모두 포함된다"며 "일상적인 영업 활동까지 소송 대상이 되고 배임죄도 적용될 수 있어 기업 활동이 어려워질 수 있으며, 외국 투기 자본이 악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속도 조절?...민주당, 상법개정안 폐기된지 5일만에 재발의
이같은 우려에 민주당은 상법개정안을 재추진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속도는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상법개정안이 국회 재표결 끝에 폐기된 지 5일 만에 민주당 소속 의원은 재발의에 나서며 이 후보의 예고에 박차를 맞추는 모습이다.
4월 22일 노종면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당 원내대책회의 이후 기자들과 만나 '지난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폐기된 상법 개정안 입법을 언제 재추진할지'를 묻는 질문에 "부결된 법안을 재추진하는 것이 대선 정국에서 가능한지에 대한 부분이 계속 고민이 있다"고 했다.
노 원내대변인이 이같은 입장을 밝힌 당일 같은 당 이소영 의원은 이사의 충실의무를 모든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고 밝혔다. 대선에 출마한 이재명 전 대표가 상법 개정안 재추진을 표명한 지 하루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