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조원 아파트관리비 시장, 그리고 불편한 진실

2024-12-09     최진홍 기자

"전기차 충전소 관리, 스마트 원패스 시스템, 모바일 검침까지... 업무는 늘어나는데 20년 전 그대로인 시스템으로 버티고 있죠"

서울 강남의 한 대형 아파트 단지 관리소장 A씨의 말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시장의 역동성은?

국토교통부 '2023 주택업무편람'에 따르면 전국 공동주택은 1486만 세대에 달한다. 이들이 매년 지출하는 관리비는 24조원(2022년 기준)으로, 2012년 대비 72% 증가했다. 특히 2024년 8월 한 달간의 공용관리비만 1조1002억원을 기록했다.

이 거대한 시장의 핵심은 아파트 ERP(전사적자원관리)다. ERP는 관리비 부과, 회계처리, 시설관리, 입주민 서비스 등 아파트 운영의 모든 것을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각 가정이 사용하는 전기료 및 수도료를 계산한다. 또 공용면적에 사용된 각종 비용을 계산해 세대별로 부과한다. 부과된 관리비에 대한 수납 관리는 물론, 수립된 예산 계획에 따라 비용을 집행한다. 그리고 회계처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무가 아파트 ERP를 통해 진행된다

공동주택이 고급화되고, 운영이 세분화되면서 업무가 복잡화되는 추세다. 커뮤니티센터가 대표적이다. 요즘 건설되는 아파트는 카페테리아, 각종 운동시설 등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을 포함한다. 주민이 커뮤니티 시설을 예약하면, 예약 현황은 물론이고, 이용료가 자동 산출되어 세대별 관리비에 실시간 집계된다. 

'아파트 관리비 전자고지결제(EBPP)' 시스템은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Ebpp는 erp와 금융사간 관리비 데이터 및 결제 결과를 중계하는 역할이다. 관리비 고지서를 모바일로 발송하고, 카드나 계좌이체로 즉시 결제할 수 있게 한다. 또 미납 관리, 분할납부 등 복잡한 수납 과정을 자동화한다.

이 시장은 20년째 한 업체가 장악하고 있다. 이 업체는 ERP 시장의 75%, EBPP 시장의 95%를 차지하며, 40%에 달하는 영업이익률을 기록 중이다. 지난해 매출 352억원, 이익잉여금 904억원이라는 놀라운 실적이다.

문제는 시장의 역동성이 사라지는 대목이다. 시장 과점이 길어지며 생태계의 역동성이 떨어지는 것은 이 시장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배달앱은 물론 이커머스 시장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지적이다.

최고의 시스템으로 무장해 오랫동안 고객의 선택을 받는다면 그 자체로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관성에 따라 과점 현상이 고착화되며 그 불편함이 커지는 순간, 새로운 시도가 잘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다만 시장에서 새로운 도전자들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됐으나 다행히 변화의 움직임은 보인다. 당장 우리관리와 NHN의 합작사 '엔마스터' 등은 폐쇄된 시장에서 고군분투하며 의미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싱가포르의 교훈

아파트 관리 업무는 이제 단순 관리비 정산을 넘어 전기차 충전, 커뮤니티 시설 운영, 에너지 절감, 전자 투표, 모바일 검침, 주차 관리까지 확대됐다. 그러나 관리 시스템은 여전히 2000년대 초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서울 강남의 한 대형 아파트 단지 관리소장 A씨의 하소연이 나오는 이유다. 한달 평균 4000만원이 넘는 관리비를 처리하지만, 여전히 수기 작업이 많고 시스템 오류도 잦아 큰 어려움을 겪는 중이다.

업계에서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싱가포르의 사례에 시선이 집중된다. 싱가포르는 2014년부터 'Smart Nation' 계획으로 공동주택의 디지털 전환을 정부가 주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빅데이터 기반 예측 정비, IoT 센서를 활용한 실시간 시설 모니터링 등 혁신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전문가들은 "아파트 단지의 대형화와 첨단화로 ERP 수요는 지속 증가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현재 시스템으로 미래 수요 감당이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들은 "정부 차원의 제도 개선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특히, 공정한 시장 경쟁 환경 조성과 기술 혁신을 위한 지원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5G 시대에 3G 폰을 쓰는 것처럼, 현재의 아파트 관리 시스템은 시대에 뒤처져 있다. 24조원 규모의 시장이 한 업체의 독과점 구조에 갇혀있는 현실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문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