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기업 제약‧바이오 진출, 약일까 독일까[포커스]
내수 축소 고민 식품사…활로 개척 의미 바이오 키워 적기 매각, 본업 경쟁력↑ 도움
최근 식품기업들의 제약‧바이오 진출이 뜨겁다. 가장 큰 이유는 인구 감소로 내수가 축소되며 활로 찾기를 고민한 데 있다. 제약‧바이오 사업은 일견 식품과 관련 없다고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둘은 화학으로 연결돼 있다. 식물 세포를 개량해 인공적으로 새로운 식물을 만들거나, 품종을 개량하는 등의 일을 생각하면 쉽게 연결고리가 그려진다. 식물 세포의 분자식을 바꿔 신약 후보물질이나 새로운 소재의 플라스틱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제약‧바이오업계에서는 식품기업의 관련업계 진출이 ‘양날의 검’이라고 내다봤다. 기존 사업과 연결성을 생각해 장기적인 관점으로 진행하면 약이 될 수 있으나, 단기적인 안목으로 진행한 인수합병(M&A) 등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진단이다.
R&D+M&A 양방향 확장
식품업계의 제약‧바이오 진출은 기초소재 연구개발(R&D)과 M&A 등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먼저 기초소재로 접근한 곳은 CJ제일제당(제일제당)과 대상, 삼양사 등이 있다. 3사는 올해 창사 71주년, 68주년 그리고 100주년을 맞은 장수기업이라는 특징이 있다. 오랜 시간 식품을 다루며 축적한 노하우가 기초 소재 사업으로 연결됐을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주력 기초소재 사업에는 차이가 있다. 먼저 제일제당과 대상은 식품‧사료용 소재인 라이신을 중심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제일제당은 해당사업군을 세계 1위 규모로 성장시킨데 이어 패키지 소재가 되는 화이트바이오 기술력도 쌓았다. 의료‧제약 분야의 레드바이오 기술은 2021년 ▲7월 천랩(약 1000억원) ▲11월 바타비아 바이오사이언스(바타비아, 약 2700억원) 등의 M&A를 통해 역량을 확보했다. 천랩은 마이크로바이옴(장내 미생물) 치료제 전문기업이며 바타비아는 네덜란드 유전자 치료제 CDMO 업체다. 지난해 대상도 항염증, 항노화 신약을 개발하는 앰틱스바이오에 75억원의 지분투자를 단행한 바 있다.
삼양사를 운영하는 삼양그룹도 1992년 의약바이오연구소를 설립하고 제약‧바이오시장에 본격 진출했다. 삼양사는 제당(製糖)을 중심으로 한 식품과 석유화학 등 쌍두마차 체제다. 이러한 특수성을 살려 봉합원사(수술용 녹는 실) 세계 1위를 비롯해 고분자 필러 기술을 개발했다. 2011년부터 삼양사가 지주사로 전환하며 의약‧바이오사업이 분리되며 현재는 그룹사 아래 바이오팜그룹을 두고 있다. 향후 세포독성 항암주사제 전용 위탁개발생산(CDMO) 전문성 강화와 메신저리보핵산(mRNA) 전달체 연구개발에도 속도를 높일 전망이다.
불닭볶음면으로 전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삼양식품도 최근 관련 사업에 불을 붙였다. 올해 그룹 내 연구소인 삼양스퀘어랩에 노화연구센터와 디지털헬스연구센터를 신설하고 신약 후보물질 발굴에 총력을 다할 계획을 밝혔다.
M&A를 중심으로 영역을 확대한 기업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올해 리가켐바이오사이언스(리가켐바이오)를 계열사로 완전히 편입한 오리온이다. 리가켐바이오는 핵심 기술이자 세계 정상급으로 평가받는 ADC(항체약물접합체) 플랫폼 ‘콘쥬올(ConjuAll)’로 향후 성장이 기대된다. hy는 2011년 의료 로봇 기업 큐렉소를 인수했다. 큐렉소는 인공관절 수술 로봇 분야 국산화를 비롯해 ▲정형외과 수술 로봇 ‘큐비스 조인트’ ▲척추 수술 로봇 ‘큐비스 스파인’ ▲재활 치료 로봇 ‘모닝워크’ 등을 개발하고 수출 다변화를 진행 중이다.
롯데는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광폭 확장 중이다. 롯데그룹은 지난 2022년 글로벌 톱10 바이오의약품 CDMO 기업을 목표로 롯데바이오로직스를 출범시켰다. 그해 글로벌 제약사 BMS의 시러큐스공장을 1억6000만달러(약 2200억원)에 인수했으며, 올해는 인천 송도에 CDMO 1~3공장을 짓기 위해 첫삽을 떴다. 공장 건설에 소요되는 자금만 4조원이 넘어갈 전망이다.
이와관련 업계 관계자는 “자체 기술력을 발전시켜 제약‧바이오로 확장한 경우는 사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면서도 “제약‧바이오 산업이 뜬다고 무턱대고 인수한 기업들 중에는 경우에 따라 어려움을 겪는 곳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고 우려했다.
CJ제일제당, 두 번째 ‘선택과 집중’
제일제당의 바이오사업 활용은 식품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달 투자은행(IB)업계를 중심으로 한 제일제당의 그린바이오 사업부(식품‧사료용 소재) 매각 추진 소식이 보도됐다. 이와 관련 지난달 19일 제일제당은 “당사는 바이오사업에 대한 다양한 전략적 방안을 검토 중에 있으나, 현재까지 구체적으로 결정된 사항은 없다”고 공시했다.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이미 사모펀드 등 국내외 기업 다수와 제일제당 측이 소통하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제일제당이 비핵심 사업부를 매각해 식품사업부를 확장하는 거름으로 쓸 것으로 판단했다.
이 같은 사업 방법이 유력한 이유는 2018년 이미 선례가 있어서다. 당시 제일제당은 1조3000억원에 비핵심 사업부인 CJ헬스케어(현 HK이노엔)를 매각했다. 이후 미국 냉동식품 2위 회사 슈완스컴퍼니를 2조1000억원에 인수해 글로벌 식품사 도약 토대를 든든히 세웠다는 평가다. HK이노엔 매각 자금을 슈완스컴퍼니 인수 종잣돈으로 사용한 셈이다. 일각에서는 HK이노엔 연매출이 매각 당시보다 60% 가량 급등한 점을 들어 아쉽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반면 주력인 식품사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해석이 대다수다.
‘적기 판매’도 제일제당의 바이오 매각 핵심이다. 이번에 매각 대상으로 거론된 그린바이오 사업부는 세계 1위 규모를 자랑한다. 5조~6조원 사이 몸값에도 원매자가 다수인 이유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도 지금이 매각 적기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린바이오 대표 제품인 라이신(돼지 단백질 공급원) 생산에 중국 기업이 뛰어들며 가격 하방 압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HK이노엔 또한 매각 당시 케이캡(위식도역류 질환 치료제) 출시 이전으로 그 가치를 더해 매각가를 높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식품업계 입장에서는 바이오의 또 다른 쓰임을 발견한 것과 같다. 바이오 사업 확대로 매출 위축 불안을 줄이는 한편 매각을 통해 주력인 식품 사업 지원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제일제당은 현재 바이오 사업 캐시카우인 그린바이오만 매각하고 생분해플라스틱 등을 생산하는 화이트바이오와 신약 분야 레드바이오는 미래 성장 동력으로 남길 것으로 전망된다. 해당 분야에서 어떻게 투자금을 확보해 성장동력으로 키울 것인지는 숙제로 남았다.
한 제약‧바이오업계 관계자는 “모든 것은 자본 싸움”이라며 “신약 개발에는 10년 이상 걸려 막대한 투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확실한 자본력과 기다려줄 수 있는 인내심이 바탕이 됐을 때 제약‧바이오 사업이 성장할 수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