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불사 중국?...‘통하지 않는 美 제재’

멈출지 모르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 “레거시에서 中 파운드리 싸고 품질 좋아” 내수 시장 지랫대 삼아 유혹

2024-04-22     진운용 기자
중국이 미국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굴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출처=셔터스톡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제재 강화에도 글로벌 반도체사들이 중국 전용칩을 출시하고, 장비 판매 및 유지보수(AS)를 지속하는 등 미 규제를 우회하는 모습이 포착되고 있다. 중국이 거대한 내수 시장을 무기로 존재감을 쌓아가는 가운데, 미국의 대중국 압박 전술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반도체 장비사 대중국 수출↑

18일 업계에 따르면 세계적 반도체 장비사인 네덜란드의 ASML의 올해 1분기 매출액과 순이익은 각각 52억9000만유로(한화 약 7조8000억원), 12억2400만유로(약 1조8000억원)로 지난해 동기 대비 21.6%, 37.4% 감소했다. 

1분기 신규 수주액은 36억1000만유로로, 시장 예상치인 54억유로에 한참 못 미쳤다. 

미국 주도의 반도체 장비 수출 제한 움직임 속에서도 ASML의 대중국 판매가 어느정도 실적을 방어해준 것으로 나타났다. ASML은 1분기 전체 매출액 중 49%를 중국이 차지했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아직 제재를 받고 있지 않는 구형 노광장비에서의 매출이 늘어났다는 설명이다.

미국은 중국의 첨단 반도체 자체 생산을 막고자 ASML에게 EUV(극자외선) 노광장비에 이어 올해 1월 그 아래 급인 DUV(심자외선) 노광장비 모델까지 대중국 수출을 금지했다. 현재 ASML은 EUV 장비와 최고사양 DUV 노광장비인 NXT:2100i, NXT2050i, NXT2000i의 대중국 수출이 막혔으며, 이외에도 중국의 일부 첨단 시스템 반도체 기업을 대상으로 중위사양인 NXT:1980, NXT:1980의 판매가 금지돼 있다.

그러나 판매가 금지돼 있지 않은 나머지 DUV 장비의 판매가 늘어나면서 전체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한 것으로 분석된다.  

ASML의 전체 매출에서 중국의 비중은 지난해 1분기 8%에 그쳤으나 2분기 24%, 3분기 46%, 4분기 39%로 꾸준히 상승해 올 1분기 최고치를 기록했다. 

중국 반도체 압박을 경계하는 미국 입장에서는 갑갑한 일이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네덜란드와 일본 반도체 장비사를 상대로 대중국 압박을 높이고 있다. 이에 이미 판매한 장비의 유지보수(AS)까지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나, 이에 대한 장비사들은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지난주 중국 외신인 환구시보는 피터 베닝크 ASML CEO가 중국에 AS 서비스를 계속 제공할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전했다. 

실제 피터 베닝크 CEO는 지난 17일 1분기 실쩍 발표에서 “미국과 네덜란드 정부간에 대중국 AS 제공과 관련된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ASML은 이에 대한 조언을 하고 있다. 국가안보 차원에서 양국 정부간에 논의할 사항들이 있을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현재로서는 중국에 AS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당분간 중국에 AS를 제공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는 이어 중국 업체들의 주문이 ASML 전체 수주 규모의 20% 정도를 계속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답답한' 미국은 초강경 대응 카드까지 빼들었다. 중국의 첨단 반도체 자체 생산을 막기 위해 레거시(범용) 반도체와 AS로까지 제재 대상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이 미국의 규제를 피해 중위사양 장비를 대거 사들이고, 장비사들이 미국의 제재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으면서 미국의 이같은 조치가 먹혀들고 있지 않는다는 평가다.

레거시 반도체는 AI(인공지능) 같은 첨단 기술에 쓰이는 반도체보다 수준은 낮지만, 자동차·항공기·가전 등 다양한 제품에 쓰이며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의 70%를 차지한다. 미국의 첨단 반도체 분야에서 강력히 제재하자 중국은 레거시 반도체에서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지난해 중국의 파운드리 기업들은 일본의 반도체 장비사를 대상으로 레거시 반도체 장비를 대량 구입했다. 덕분에 작년 극심한 반도체 한파에도 일본 반도체 장비사들의 대중국 수출액은 약 5% 늘어났다. 

전용칩 출시하며 제재 우회

미국의 규제를 우회하는 것은 장비사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인 엔비디아와 인텔 또한 최신칩을 미 정부의 제한에 맞춰 새롭게 출시한다. 먼저 엔비디아는 미국 정부 규제에 맞춘 AI 가속기인 H20을 2분기부터 대량 생산에 들어갈 것으로 전해진다. H20은 엔비디아의 주력 AI 가속기인 H100은 물론, 화웨이 AI 가속기 ‘어센드 910B’보다도 주요 성능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칩간 연결 속도와 가격 측면에서 화웨이 칩보다 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인텔은 최근에 선보인 최신 AI 가속기인 ‘가우디3’를 대중국 수출 제재에 맞춰 성능을 낮춘 칩 2가지를 올해 6월과 9월에 각각 출시할 계획이다. 인텔은 구체적 사양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열설계전력(TDP)에 있어 기존 제품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제재가 통하지 않는 이유로 무엇보다 거대한 중국의 내수 시장이 꼽힌다. 2021년 기준 전세계 반도체칩 시장규모는 5100억달라며 그중 중국이 1865억달러, 36.5%를 차지한다. 이는 대부분의 기업과 국가에게 중국이 가장 중요한 판매처라는 것을 뜻한다. 

2023년 한국의 반도체 수출액 중 중국과 홍콩이 각각 35.8%, 14.1%를 점유하며, 두 지역이 한국 반도체 수출액의 49.9%를 차지했다.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책도 세계 반도체사들이 중국 시장을 놓을 수 없는 이유로 지목된다. 중국 정부는 미국의 제재를 뚫고 첨단 반도체를 자체 생산하기 위해 2014년 25조4000억원, 2019년 36조6000억원에 이어 올해 35조5500억원에 달하는 반도체 펀드를 조성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10여년간 지속돼 온 중국의 반도체 펀드는 부정부패 등 많은 문제로 인해 실패로 평가돼 왔으나, 화웨이가 7나노 기반 칩 생산에 성공하고 중국 파운드리 기업들이 레거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나자 재평가되는 모습이다. 

한국의 한 팹리스 관계자는 “중국의 파운드리 업체들의 레거시 부문 기술력은 이미 상향 평준화됐다”며 “싸고 피드백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미국이 팹리스를 대상으로 완성칩의 대중국 수출을 완전히 막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중국이 레거시 분야에서 이미 상당한 경쟁력을 쌓았고, 미국의 일차적인 목표가 중국에서 자체 생산된 첨단 반도체를 막는 것인 만큼 장비사에 대한 규제가 강하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미국의 제재가 효과적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중국이 자립에 성공하고 있으나, 그 기술적 완성도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뒤따른다는 지적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은 지난 21일(현지시간) 방송된 CBS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반도체 기술이 미국보다 여전히 뒤처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은) 미국보다 몇년 뒤처져있다”면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반도체를 만들어내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혁신에서 중국을 앞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의 반도체 성능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점은 우리의 (대중국) 수출 통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자평했다. 

이어 대기업에 대한 대중 수출 통제가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지나 러몬도 장관은 “나는 그 누구 못지않게 기업에 책음을 묻고 있다. 내가 그들에게 중국에 반도체 수출하지 말라고 하면 그들은 좋아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렇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