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패권, 실리콘밸리의 탄생부터 팬데믹의 유산까지
인텔 보조금 수령...삼성도 8조원 받을 전망 글로벌 반도체 전쟁의 역사 돌아봐야
미국 정부가 반도체법에 따라 자국 기업인 인텔에 대규모 지원을 결정했다. 백악관은 20일(현지시간) "상무부가 반도체법에 따라 인텔에 최대 85억달러(약 11조4000억원)의 직접 자금과 함께 대출 110억달러(약 14조8000억원)를 제공하기로 예비적 합의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반도체법은 미국 내 반도체 생산을 촉진하기 위한 법안이다. 미국에 공장을 건설하는 기업에게 보조금으로 52조원, 연구개발 지원금으로 18조원 등을 제공하며 5년간 총 70조원을 지원하는 것이 핵심이다.
업계에서는 인텔이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수령하기로 결정되며 한숨 놓는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실리콘밸리의 탄생부터 최근의 팬데믹, 이어진 반도체 자급자족의 큰 흐름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8인의 배신자와 6인방의 시대
1957년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반도체의 '창조주' 윌리엄 쇼클리가 팰로알토에 쇼클리 반도체연구소를 설립하며 미국 반도체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반도체라는 것 자체가 트랜지스터의 집약체다. 이를 창조한 쇼클리의 연구소는 지금도 실리콘밸리의 전설로 여겨진다.
문제는 쇼클리의 성격이다.
개발자들은 편집증적이고 괴팍하며 완벽주의자인 그의 성격을 당해내기 어려웠다. 조금만 거슬리면 소리를 지르고 면박을 줬고, 하루에도 기분이 몇 차례나 롤러코스터를 탔다고 한다. 심지어 IQ가 낮은 인간은 자손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고 서슴없이 주장한 우생학 신봉자의 면모도 숨기지 않았다.
노벨 물리학상까지 받은 저명한 학자지만 말년에는 가족과도 멀어져 자식들도 그를 찾지 않았다. 자식들은 1989년 그가 사망할 때 신문기사를 보고 알았을 정도였다.
결국 쇼클리 반도체연구소에 모여든 개발자들은 '탈출'을 결심했다. 줄리우스 블랭크와 빅터 그리니치, 진 호어니, 유진 클라이너, 제이 래스트, 고든 무어, 로버트 노이스와, 셸던 로버츠 등 8명은 연구소를 퇴사해 바로 인근에 페어차일드반도체를 설립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8인의 배신자 사건이다.
페어차일드반도체가 승승장구하자 8인의 '배신자'들은 또 한번 위대한 선택을 하게 된다. 흩어져 새로운 반도체 회사들을 연쇄적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인텔과 모토로라,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를 비롯 반도체의 역사를 새롭게 쓴 기업들이 이때 탄생한다.
사람들은 어느새 이들이 모인 계곡을 '실리콘(반도체의 중요 소재인 규소)밸리'라 부르기 시작했다.
다만 그 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무어의 법칙이라는 마법으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제패한 고든 무어의 인텔 등이 1970년대부터 일본의 대공습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에 수출전선이 주춤거리는 상황에서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보수적으로 움직였으나, 일본은 오히려 승부수를 던졌다. 국가 차원의 강력한 지원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판을 흔들었고 1980년대 기어이 반도체 패권을 장악했다.
당시 일본의 반도체 패권을 장악한 일본전기(NEC)·도시바·히타치·후지쯔·미쓰비시·마쓰시타 등의 기업을 6인방이라 부른다. 이들은 한때 글로벌 반도체 점유율 90%를 가져간 미국을 10%까지 밀어내고, 자신들은 여유롭게 점유율 80%를 쓸어담았다.
삼성전자의 부상
소위 6인방의 부상 시기는 곧 일본 호황 최전성기면서, 버블이 터지기 직전의 마지막 축제기도 했다.
반도체는 물론 글로벌 경제 전체를 뒤덮기 시작한 일본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미국이 결국 움직였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는 일본을 플라자 호텔로 끌고와 흠씬 두들겨 때렸고, 플라자 합의로 달러가 약세로 돌아서자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의 긴 터널로 터덜터덜 들어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소니가 무너지고, 6인방이 무너졌다.
미국은 집요했다. '무역보복의 성경'인 통상무역법 301조를 휘두르며 일본에 대한 관세 압박에 나섰으며, 1986년을 시작으로 무려 1996년까지 세 번이나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해 일본 반도체의 영혼을 '탈탈' 털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대중 반도체 압박이 귀여워보일 수준이다.
미국 반도체 기업은 서서히 점유율을 회복했다. 그렇게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패권은 미국의 손에 들어오는 듯 했다.
반전은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던 곳에서 벌어졌다. 글로벌 반도체 역사와 비교해 20년이나 뒤떨어진 1974년에야 반도체에 뛰어든 한 작은 나라의 후발 기업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 기업의 개발자들은 반도체 기술을 습득하려 일본에 파견, 눈칫밥을 먹으며 허드렛일을 했다. 기술 도면이라도 보려면 휙 걷어가는 일본 개발자들의 냉랭함에 싹싹한 웃음으로 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각자 흩어져 단편적으로 공개되는 자료를 따로 외우고는 늦은 밤 숙소에 모여 자신들이 기억한 것들을 조합해 어설픈 설계도를 그려 나가기도 했다.
금요일 밤에는 일본 개발자를 부산으로 데려와 비위를 맞추며 기술 노하우를 배우는 '달빛관광'도 불사했다.
1980년대 소위 3저가 시작되며 결국 기회가 왔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슈퍼파워가 될 차례. 선대의 반대에도 이건희 회장이 뚝심으로 밀어붙인 한국반도체 인수를 시작으로 차곡차곡 쌓아온 반도체 기초체력을 가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일본으로부터 막 반도체 패권을 탈환한 미국 기업들이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 삼성전자는 가격 후려치기와 물량 공세로 순식간에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장악했다. 전 세계가 놀란 가공한 전격전이었다.
팬데믹, 그리고 공급망 붕괴의 유산
삼성전자는 대량 생산에 적합한 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몸집을 불리는 한편, 조심스럽게 파운드리 전략을 가동하며 판을 키웠다.
메모리 반도체는 사이클이 존재하기에 비즈니스의 불확실성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슈퍼 사이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삼성전자는 글로벌 공급망 체제에서 메모리 반도체 중심 전략을 꾸준히 끌고 나갔다.
파국적 변화가 시작된 것은 코로나 팬데믹이다. 집단 감염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셧다운되자 산업이 쌀인 반도체 유통이 막혀버렸다. 28나노 자동차용 반도체 품귀난까지 벌어지며 백신과 함께 반도체가 전략자산이 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트럼프 행정부 당시의 미국은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는 우방국인 한국에 메모리 반도체를, TSMC의 대만에 파운드리를 맡겨왔으나 팬데믹과 같은 긴급 상황이 되면 그 공급망 자체가 간단히 무너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판국에 가상적국 1호인 중국마저 막대한 자금력으로 반도체 굴기를 시작하자 미국은 결단했다. "이제 전략자산이자 '산업의 쌀'인 반도체 생산을 자국에서 해야 한다"
초반에는 리쇼어링의 범위를 자국 기업의 자국 생산을 원칙으로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자국에서 사업하는 외국 기업도 리쇼어링의 범위에 억지로 넣기 시작했다.
자국 및 외국 기업 자동차, 배터리 공장 등이 속속 미국으로 들어왔다. 트럼프가 떠나고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이러한 아메리카 퍼스트 기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자주의 패러다임 속에서 더 노골적으로 굳어갔다.
보조금 전쟁
백악관은 최근 성명을 통해 "반도체는 미국에서 발명돼 휴대전화기부터 전기자동차, 냉장고, 위성, 방위체계까지 모든 것에 힘을 불어넣지만 오늘날 미국은 세계 반도체의 10% 미만을 생산하며 최첨단 반도체는 일절 생산하지 못한다"고 개탄했다.
그 연장선에서 강력한 자국 반도체 생산 의지를 불태웠으나, 마냥 채찍만 휘두른 것은 아니다.
보조금이라는 달콤한 당근도 흔들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면 미국의 편에 섰을 때 얻을 이익도 확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TSMC는 중국 화웨이와의 거래를 끊고 미국 공장 설립에 나섰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그 행렬에 뛰어들었다.
다만 '당근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보조금 지급이 차일피일 늦어지며 현지 공장 건립 일정이 늘어졌기 때문이다. 최근 인텔과 TSMC는 물론 삼성전자의 미국 공장 건설 일정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최근 늘어진 것도 보조금 지급 지연과 관련이 있다.
보조금의 규모를 두고도 논란이 벌어졌다. 미국 기업인 인텔에 막대한 보조금이 지급되는 반면 외국 기업인 TSMC 및 삼성전자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보조금이 책정됐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겔 싱어 CEO가 언론 기고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보조금에 있어 TSMC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자 모리스 장 TSMC 창업주가 포럼을 통해 인텔의 겔 싱어 CEO를 강하게 비판하는 일까지 있었다.
겔 싱어를 두고 "무례한 자"라고 칭하며 "TSMC에 엄청난 결례를 저지르고 있다"고 원색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자국의 반도체 공급망 전략에 참여한 모든 기업들을 대상으로 민감한 기밀을 제출하라고 주문하는 한편, 대중국 반도체 포위전선에 반강제로 합류를 요청하자 논란은 더욱 커졌다.
다행히 갈등은 어느정도 봉합되는 분위기다. 특히 미 대선이 다가오는 가운데 바이든 행정부는 현지 일자리 창출까지 기대할 수 있는 반도체 공장 건설에 전향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조만간 삼성전자의 미국 테일러 공장에 대한 지원금도 차질없이 발표될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다만 미 대선 후 트럼프 행정부가 귀환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인텔 등 자국 기업에 대한 지원을 키우고 삼성전자 등 외국 기업에 대한 지원을 줄일 수 있다는 우려가 번지는 중이다. 인텔이 처음으로 지원금을 받아 업계 전체가 일단 한숨 돌렸으나, 삼성전자 등 한국 반도체 기업들 입장에서는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