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인터뷰] ‘포니의 역사’ 이충구 前 현대차 사장, “현대차 유산은 정주영 DNA”
포니의 시작이 담긴 ‘이대리 노트’의 주인공
“완전한 과학은 있어도 완전한 기술은 없습니다.”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하며, 역사는 지금도 쓰여지고 있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 발전과 궤를 함께하는 현대자동차의 헤리티지(유산)는 단연 1975년 탄생한 포니일 것이다. 12월 28일 방문한 현대모터스튜디오에서 마주한 포니는 제네시스, 싼타페에 뒤지지 않는 투박한 멋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포니 오디세이’를 함께한 주역이 있으니 바로 이충구 前 현대차 최고경영기술자(CTO)다.
친근한 미소와 달리 이충구 전 사장이 지닌 이력은 화려하다. 그는 포니부터 시작해 스텔라, 에쿠스, 아반떼, 그랜저 등 현대차의 굵직한 모델들을 개발한 대한민국 1세대 자동차 엔지니어다. 한국자동차공학회 회장, 대통령 자문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 자리를 역임했으며, 서울대학교와 국민대학교, KAIST 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했다. 2019년에는 자동차 분야 최초로 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가 됐다.
최근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우리 기업들의 도전은 매 순간 감동의 드라마였다”며 포니 개발에 앞장선 이충구 전 사장을 호명하며 참석자들에게 박수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충구 전 사장은 2002년 연구개발부문 사장을 끝으로 회사를 나올 때까지 30년이 넘는 시간을 현대차와 함께했다. 1970년, 당시만 해도 자동차 산업이 수준은 조악하기 그지 없었다. 그가 입사한 직후 현대차의 생산력은 울산 작은 공장에서 포드 차량을 하루 2~3대 조립하는 것이 전부였다. 국내 다른 자동차 회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 자체의 ‘틀’이나 ‘기준’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그런 현대차에게 변화는 찾아왔다. 1974년 정주영 선대회장이 고유 모델 개발을 위한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팀장의 권유 아래 고유 모델 개발팀에 들어간 이충구 대리는 이탈리아라는 생면부지 타국에 떨어졌다. 할 수 있는 것은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히는 것 뿐이었다.
“제일 처음 이탈리아로 갔어요. 말도 안통하는 상황에서 현대차 고유 모델을 만들어야 했죠. 모르니까 모든 걸 다 따라 그리고 적었습니다.”
당시 막내였던 이충구 전 사장은 포니의 모든 제작 과정을 기록했다. 모르면 묻고 또 물었다. 그 과정에서 현대차만의 시스템과 체계도 잡혔다. 지금은 색이 바랜 노트 안에 빼곡하게 많은 수식들, 수많은 자동차 엔지니어의 귀감이 된 이대리 노트가 탄생한 순간이다.
◆영동 방앗간집 아들이 써내려간 한국 자동차의 역사
충북 영동군에서 늦둥이로 태어난 이충구 전 사장, 그의 유년시절에는 몇 번의 가슴 시린 아픔도 있었다. 6·25 전쟁 피란길에서 누나를 폭격으로 잃은 것. 훌쩍 커버린 어린 동생은 아직도 누이의 따뜻한 등을 기억하고 있었다. 애써 자신의 앞에서 누나의 죽음을 입 밖에 내지 않는 어머니를 보면서 그는 다시 한번 삶의 의지를 다졌고, 자동차의 역사로 성장했다.
그가 서울로 상경하기 전까지 제대로 본 ‘차’라고는 미군이 모는 군용 트럭이 전부였다. 군용 트럭이 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신작로를 달릴때 뿌옇게 이는 먼지, 그럼에도 쫒아가게 만드는 매력. 그에게 자동차란 그런 것이었다.
- 자동차 불모지에서 자동차 엔지니어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1940년대 충북 영동에서 자동차는 쉽게 볼 수 있는게 아니었어요. 보이는건 기차와 군용 트럭이였죠. 군용 트럭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도로를 달리면 꼭 그 뒤를 쫓아갔어요. 먼지가 몸에 나쁜지도 모르고 말이죠. 기계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방앗간을 하셨어요. 형은 옆에서 고장난 라디오를 가져와 고치는데 그게 꽤 재밌어 보이더라고요.”
그가 자동차 산업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우연의 연속이었다. 대학 진학 당시 높은 점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의대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학을 쓸 때 3지망까지 쓸 수 있었어요. 기계공학이나 전자전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모두 떨어지고 3지망으로 쓴 서울대 공업교육과에 붙었습니다. 양영학원에서 재수를 준비하고 있는데 공업교육과에 자동차 공학 전공이 생긴 걸 알았습니다. 그때 재수를 포기하고 자동차 공학을 공부하게 됐죠.”
-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았을텐데, 왜 현대차에 입사하게 됐나요.
“1960년대 자동차 사업을 하는 곳이 두 곳이었어요. 대우의 모태인 신진자동차와 현대자동차였죠. 아는 선배가 현대차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울산 공장에 놀러갔는데, 우연히 공장장과 인사까지 나누고 면접 아닌 면접을 보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이 현대차로 기운 것 같아요. 사실 ‘일본이 싫다’는 마음도 조금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신진은 토요타의 차량을 조립하고 있었거든요.”
◆누군가의 추억, 누군가의 첫차가 된 포니(PONY)
- 현대차 입사 이후 포니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당시 국가에서 수출전략산업 육성을 못박아 두고 있었어요. 현대차도 해외 수출을 할 수 있는 우리 첫 고유의 모델을 만들자는 목표가 생긴거에요. 시작부터 종합 자동차 회사를 목표하던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특명이 내려왔죠. 첫 고유 모델 개발이라는 과제를 안고 5명이 이탈리아로 떠났습니다.”
모든 과정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밑바닥부터 시작하며 수많은 과정에서 ‘실패’가 따라왔다. 막상 차를 만들고보니 잡음이 들리기도 했다. 그럴 땐 청진기를 들고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그렇게 모두가 반신반의하며 고개 저었던 일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자동차 개발을 위해 떠난다고 했을때 주변 사람들은 ‘말도 안된다’고 했죠. 정말 원시적인 실패부터 시작했어요. 핸들이 뽑히기도 하고, 크래시 패드가 깨지기도 하고. 설계가 잘못된 걸 만들어 놓고 나서 아는 경우도 있었죠. 그 당시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꼴찌를 벗어나자.’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니 희망이 보이더라고요.”
- 포니를 제작하면서 특별히 신경 쓴 디테일이 있을까요.
“우선 부품을 자체적으로 만드는 것에 가장 많은 공을 들였죠. 그 다음은 부품이 제대로 조립되고 작동하는지 사실상 모든 과정을 신경써야 했어요. 그 과정에서 항상 코티나, 브리사, 렌서보다는 더 우수하고 더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각기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일도 쉽지 않았어요. 디자이너가 그리는 것, 개발자가 할 수 있는 것, 고객이 필요로 하는 것이 모두 다를 때도 있었죠. ”
- 지금 봐도 포니는 독특한 정체성,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동차의 미학은 어디서 시작된다고 생각하나요.
“포니 디자인은 당대의 디자이너 주지아로가 담당했어요. 저는 디자인 안에 기술을 담으려고 노력했어요. 결국 고객 만족도로 이어지는 건 기술이니까요. 골프를 시작하고 보니 차에 골프백이 몇 개가 들어가는지, 트렁크는 얼마나 넓은지 공간 활용성이 중요하더라고요. 황금비율, 아름다운 디자인과 동시에 기능적인 부분도 포기하지 않았죠.”
포니 개발에만 매진했던 노력은 결국 빛을 발했다. 출시 이후 포니는 말 그대로 ‘대박 행진’을 이어갔다. 포니를 구매하기 위해 대리점에 줄을 서는 것은 물론, 국내 승용차 시장 점유율은 44%까지 치솟았다. 포니는 출시 첫 해에만 1만726대가 팔렸다. 국내 고유 모델을 만들겠다는 정주영 회장의 큰 그림은 결국 성공으로 이어졌다. 지금도 그랜저, 싼타페와 같이 포니의 헤리티지를 이어받은 모델들이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정주영 회장이 던진 ‘MISSION COMPLETE’
누군가를 추억하는 일은 누군가를 애정하는 일이라고 했던가. 그의 자동차 삶에서 고(故) 정주영 회장은 빼놓을 수 없는 귀인이다. 그는 현대차의 헤리티지는 곧 정주영 회장이 가졌던 ‘꿈’과 ‘DNA’였다고 고백했다. “해봤나?”로 대표되는 정주영 회장 리더십 아래 이충구 전 사장이 있었다.
- 결국 정주영 선대회장의 ‘미션’을 수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요.
“포니 이후 프레스토와 엑셀을 개발할 시기에요. 정주영 회장께서 차량 브리핑을 보러 오셨어요. 쭉 둘러보시더니 ‘차가 작네’ 하시면서 손잡이 부분을 가르키더라고요. 개발자 입장에선 이미 설계가 다 진행됐는데 손잡이를 바꾸면 도저히 수출 일정을 못 맞추겠더라고요. 중량도 늘어났죠. 머릿 속으로 계산을 끝내고 ‘무게가 40g 정도 늘어나니 어렵다’고 말씀을 드렸죠.”
- 부장이 회장한테 ‘안된다’고 말한거네요.
“그렇죠. 저 나름대로 계산을 끝내서 안된다고 말한 건데 당시엔 너무 떨렸죠. 돌려서 말하는 법도 몰랐으니까요. ‘혹시 언짢으신건 아닐까’ 나름의 걱정도 하면서요.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중역들끼리 식사를 하는 자리에 초대됐어요. 말단이라 맨 끝에 조용히 숨어있던 저를 회장님이 불렀죠. ‘잘 해’라는 말과 함께 로얄살루트 한 잔을 따라주시더라고요.”
발로 뛰는 현장 기술자들을 애정하던 정주영 회장은 결국 이충구 전 사장의 손을 들어줬다. ‘한 번 해보자’는 정 회장의 지지 아래 그는 차량 개발에 매진했다. 그렇게 미국 시장을 저격한 전륜구동 프레스토와 국내 베스트셀러 엑셀이 탄생했다.
◆ 남은 고지는 독일, 필요한 건 ‘냉정과 열정사이’
울산 매립지의 비포장 도로를 달리던 신입사원은 어느새 현대차 연구개발부문 사장 자리에 오르게 됐다. 개발한 승용차 신모델만 35종, 그 사이 현대차는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며 글로벌 시장에서도 손 꼽히는 자동차 회사로 성장했다.
- 개발자에서 경영자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 과정에서 느꼈던 감회나 어려움이 있다면요.
“제가 가진 역량보다 일이 더 크고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과정에서 어려움은 계속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배우고 해결하는 것에 항상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그 과정에서 현대차의 성장도 지켜봤죠. 승용차 풀 라인업도 완성됐고, 남양 연구소도 지어졌으니까요. 전기차의 경우 도요타보다 일찌감치 시작을 했어요. 특히 작은 공터에서 시작해 부두까지 지어진 울산공장을 보면 감회가 남다르죠.”
- 한국 자동차 산업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어요.
“그 전까진 한국이 앞서 나가는 선진국을 추격하는 부분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가 글로벌 리더가 됐죠. K-pop, K-food 같이 한국이 선도하는 문화가 세계로 퍼지고 있어요. 자동차 산업도 전과 다르게 한국에서 내로라 하는 인재들이 모이고 있어요. 그럼에도 부족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 발전을 위해 보완이 필요한 부분은 어떤 걸까요.
“재능을 가진 인재들이 모여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빠른 성장을 일궈냈습니다. 아이오닉 5, 싱가폴 혁신센터만 봐도 그렇죠.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너무 뜨거워요. 독일이나 일본의 장점은 차가운 머리입니다. 기계 공학에서는 차가운 머리가 필요해요. 독일의 경우는 모든 지식을 문서로 정리해요.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탈리아와 결이 비슷하죠. 한국도 미국이나 일본처럼 자동차를 냉정하게 또 깊이있게 평가해야 해요. 아직 성숙도가 더 올라가야 해요. 자동차 문화 수준의 발전이 필요합니다. 지금 자동차 산업은 한국, 독일, 일본 삼파전이에요. 일본을 넘어서 독일을 이겨야죠.”
- 마지막으로, 제2의 이충구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앞으로를 이끌어갈 MZ 세대의 역할이 크죠. 기술에 대해선 항상 ‘완전한 설계는 없다. 아는 척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루션은 늘 있습니다. 솔루션을 거쳐 더 나은 기술을 쫒아야죠.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운동장은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다음 세대들이 그 운동장을 가꿔야죠.”
자장면 한 그릇 150원, 소주 한 병 115원. 근대화의 초입에서 현대차는 무모한 도전으로 여겨졌던 포니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 그 생생한 현장의 순간에 이충구 전 사장이 있었다. 일선에서 물러나 황혼을 즐기고 있는 그는 이제 후배들의 새로운 항해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의 애정이 가득 담긴 포니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