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 맞은 'K행동주의'[주주행동주의, 파수꾼? 먹튀?①]
헤지펀드 이어 PEF·자산운용사·연기금까지 가세
2021년 1월 주당 9만8000원대를 기록했던 삼성전자 주가는 같은해 7월 7만8100원까지 미끄러졌다. 주가가 빠지자 2021년 7월 기관들은 삼성전자 매수에 나섰고, 같은해 8월초 주가는 8만원을 넘어섰다.
그 무렵 삼성전자의 실적 발표에 앞서 모건스탠리 보고서가 나왔다. 2021년 8월 11일(현지시간) 모건스탠리는 '메모리, 겨울이 오고 있다(Memory, Winter Is Coming)'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고 삼성전자 목표주가를 9만8000원에서 8만9000원으로 낮췄다.
당시 국내 증권사들이 "반도체 업종의 주가는 극심한 저평가", "과매도 구간" 등으로 평가하며 매수 타이밍이라고 외쳤던 것과 비교하면 모건스탠리 보고서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던 셈이다.
지금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모건스탠리 보고서는 시기 적절했었다. 이후 삼성전자 주가는 10월 7만5000원이 무너진 후 두어달 반등을 시도하긴 했지만 지속적으로 하락해 지난해 9월 5만원대 초반까지 밀렸다. 반등을 시도하고 있는 최근에도 주가는 6만원선에 불과하다.
모건스탠리의 보고서가 나온 이후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해외 헤지펀드가 그 무렵 이재용 부회장의 가석방 이슈 등 기업 경영상의 중요한 사건에 맞춘 '이벤트 드리븐' 전략을 사용한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됐다.
이벤트 드리븐은 기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상황을 활용해 차익을 챙기는 것으로 헤지펀드들이 주로 사용하는 전략 가운데 하나다.
헤지펀드가 모건스탠리 보고서와 삼성전자의 경영적 불확실성을 어떻게 활용해 어떤 이벤트 드리븐 전략을 썼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벤트 드리븐 전략을 구사했다면 선물과 현물 등 상품 간 가격 차이를 활용한 '차익거래', 비싼 종목과 싼 주식을 동시에 매수·매도(공매도)하는 '롱 숏' 등의 기법을 썼을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절대 수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헤지펀드는 항상 새로운 투자기법을 모색한다. 사모펀드의 일종인 헤지펀드의 국내 공식명칭은 '전문투자형 사모펀드'로, 다른 종류의 투자펀드와 비교해 투자 리스크가 크고 정부 규제는 적은 편이다. 이에 헤지펀드는 레버리지를 기법을 이용해 주식, 채권 등 금융시장이 상승하든 하락하든 최소한의 손실로 최대한의 이익을 내는 투자방식을 취한다. 헤지펀드 투자자는 사모 방식으로 모집한 소수이고 비공개다.
헤지펀드는 '롱 숏' 기법 뿐 아니라 기업합병 차익거래, 부실채권(NPL) 투자 등 상승장에서나 하락장에서도 절대적으로 수익을 내기 위한 여러 방법을 사용한다. 심지어 버뮤다, 케이만군도 등 조세회피지역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들기도 한다. 자산 가치 상승에 따른 수익을 추구하는 전통적 펀드와 다른 점이다.
주주행동주의, 이른바 액티비즘(액티비스트)은 헤지펀드가 구사하는 이벤트 드리븐 전략의 하위에 속해 있는 여러 전략중 하나이지만, 그간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적절한 가치가 기대되는 대상을 골라 투자를 하고 시간이 지나 가치가 오르면 매도하는 가치 추구형 투자와 달리 행동주의는 주식을 사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투자 대상 회사의 경영에 관여를 한다.
그러나 행동주의 펀드 얼라인파트너스가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 지분 1.1%를 확보한 후 지난해 12월 지배구조개선을 요구하는 비공개 주주서한을 보낸 것처럼 자본시장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사례는 지극히 드물다.
오히려 드러나지 않는 행동주의가 훨씬 많다. 원래 행동주의가 처음에 하는 액션은 비공식으로 경영진에 대화부터 거는 것이다. 공시 의무가 없는 5% 미만의 지분만 확보해 경영진에게 주주환원 확대, 지배구조 및 영업방식 변경, 이사회 재편 등을 요구를 한다. 대화가 잘 되면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행동주의는 마무리된다. 대부분 행동주의는 이 단계에서 끝난다. 주주제안을 해서 주총까지 가는 건 자본시장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국민연금 등 연기금 또는 기관들의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책임 원칙)도 마찬가지다. 스튜어드십코드는 흔히들 알고 있는 의결권 행사가 아니다. 주총에서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은 주주로서의 단순히 권리를 행사하는 것 뿐이다. 주총이 열리기 전 단계인 이른바 언더 더 테이블(Under the Table)에서 주요주주로서 의견을 적극 건의하고, 주주제안을 하는 등의 액션이 바로 행동주의다. 단순한 의결권 행사를 넘어서 이같은 적극적 주주활동을 할 경우 국민연금 역시 이른바 '액티비스트'로 간주되는 것이다.
스튜어드십코드는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기관투자자들이 투자대상 회사의 리스크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본격 도입됐다. 주요주주인 기관투자자들이 기업의 오너처럼 책임감을 가지고 기업경영에 개입해야 한다는 영국의 워커보고서 등을 통해 '스튜어드십 코드'는 자율규범의 형식으로 구체화됐다. 이후 2010년 7월 미국에서는 금융개혁법(도드-프랭크법·Dodd-Frank Rule)을 통해 미국 내 은행과 계열사의 투자 행태를 규제하고 감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스튜어드십코드를 강제화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4년 신제윤 당시 금융위원장이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의사를 밝혔지만 이후 금융당국 수장 교체와 담당부처 변경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2016년 12월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스튜어드십코드 최종안(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을 공표했다. 국민연금은 2018년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한 후 이를 강화해왔다.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이전에는 국민연금은 주로 배당 관련 사항에만 주주권을 행사했으나, 이후 과도한 임원 보수 등 여러 사안에 대해 주주권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행사 방법도 비공개 대화, 중점 관리기업 선정과 공개, 공개서한 발송, 주주제안 등으로 다양화했다.
지난해 12월 KT 이사회가 당시 구현모 대표이사의 연임을 결정하자 국민연금은 이례적으로 즉각 입장문을 내고 반대 의견을 표명해 금융투자 업계와 재계의 화제가 됐다. 국민연금은 KT 이사회의 결정이 'CEO 후보 결정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경선의 기본 원칙에 부합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서원주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은 "KT, 포스코홀딩스, 금융지주 등 소유분산기업들이 CEO 선임을 할 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절차를 따라야 불공정 경쟁, 셀프 연임, 황제 연임 같은 우려들이 해소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올해 2월 윤석열 대통령은 "소유가 분산돼 지배구조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모럴헤저드(도덕적 해이)가 일어날 수 있는 경우에는 스튜어드십코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이 지적한 소유분산기업, 이른바 주인 없는 기업에서는 대부분 국민연금이 최대주주 역할을 한다.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국민연금이 최대주주이거나 주요주주인 소유분산기업은 KT(10.74%), 포스코홀딩스(8.5%), KT&G(7.44%), KB금융(7.97%), 신한지주(8.22%), 하나금융지주(8.4%), 우리금융지주(7.86%) 등이 있다.
윤 대통령의 주문까지 더해져 이같은 소유 분산기업에 대한 국민연금의 경영 개입이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대통령까지 나서서 연기금의 행동주의를 독려하는 이유는 뭘까?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무역수지 적자와 국민연금의 고갈 우려 등이 그 배경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박소연 키움증권 연구원은 "무역적자 장기화로 자본시장을 통해 외국인 투자자금을 유인해 외환시장 안정을 담보해야 한다는 인식 변화가 발생했을 수 있고, 대기업들의 주주환원을 유도해 국민연금 운용 수익률을 제고하고 기금 고갈을 늦춰야 한다는 절박감 역시 더해졌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헤지펀드 뿐 아니라 연기금까지 이벤트 드리븐의 한 기법인 행동주의 전략을 강화하면서 이젠 이를 구사하는 자본의 주체에 있어 경계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사모펀드들의 행동주의 전략도 점점 다양화되고 있다.
과거 20여년간 사모펀드가 행동주의 전략을 펼친 사례로는 2003년 소버린자산운용의 SK 경영권 요구, 2004년 헤르메스인베스트먼트의 옛 삼성물산 우선주 소각 요구, 2006년 칼 아이칸의 KT&G 자회사 매각 요구, 2015년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반대, 2018년 엘리엇매니지먼트의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 합병 등이 손에 꼽힌다.
그간 국내에서는 해외 헤지펀드가 행동주의 전략을 취해 이익을 먹고 튀는 이른바 '히트 앤 런'이라는 부정적 시각이 많았다. 더 쉽게 표현해 '먹튀'다.
그도 그럴 것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먹잇감을 찾는 헤지펀드는 행동주의를 통해 한국에서 한번 수익을 챙기고 나면 또 다시 한국 시장에서 다른 표적 기업을 찾아 지분을 인수하고 이후 다른 주주들에게 자신이 제안한 주주행동에 동의해 달라고 할 일이 거의 드물다. 먹고 튈 지언정 이미지까지 관리할 필요가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근래 들어서는 헤지펀드 뿐 아니라 강성부 펀드(KCGI), 얼라인파트너스 등 행동주의를 추구하는 사모펀드(PEF)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PEF 뿐 아니라 KB자산운용(2019년 에스엠에 자회사 합병 및 배당 확대 요구), 트러스톤자산운용(2023년 태광산업, BYC에 주주제안), 안다자산운용(2023년 KT&G에 사외이사 및 배당 확대) 등 자산운용사들이 행동주의 전략을 구사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젠 일반 사모펀드 또는 자산운용사들마저 기업의 지분을 매입하고 이 기업의 주가가 단순히 오르기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기존 투자 방식에 변화를 주고 있다. 경영진과 이사진들과의 효율적 협력을 통해서 이 기업의 내재 가치가 점점 더 오를 수 있도록 하는 행동주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것이다. 심지어 경영 참여를 통해 주주가치 제고를 추구하는 주주행동주의 전략도 자주 나타난다.
올해 3월 주총시즌 중 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FCP), 안다자산운용, 얼라인파트너스 등 행동주의 펀드와 자산운용사들이 KT&G, JB금융지주, 태광산업 등에 배당 및 임원선임 안건 등의 주주제안을 했다.
비록 주주총회 표결 과정에서 상당수 부결됐지만, 주주제안 안건은 72건으로 지난해 18건과 비교해 4배에 달했다.
안건은 재무배당, 정관, 임원 선임, 임원 보수 등 기업 경영에 있어서의 여러 분야에 골고루 제안됐다. 주주제안 안건의 비율도 지난해에는 전체 안건 4762 건 중에서 0.4%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전체안건 4588 건 중에서 1.6%로 크게 뛰었다.
가히 'K행동주의'라 부를만큼 이제 한국은 행동주의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