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배송수수료 500원'의 불편한 진실
[이코노믹리뷰=전지현 기자] "물량이 잘못 배송됐나 봐요. 윗층에 둔 것 같아요. 내일 제 자리에 가져다 놓겠습니다."
주문했던 16개의 생수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지만 막상 집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값도 안 나가는 생수를 누가 훔쳐가기라도 했을까’ 의문이 갔지만, 배송기사에게 문자를 넣고 집앞 CCTV를 살폈다. 그리고 A택배 B기사는 위와 같은 문자를 보냈다.
다음날 들릴 듯 말 듯한 노크가 두번. 문앞에 생수 총 16개가 놓여있다. 엘리베이터로 눈을 돌리자, 모자를 눌러쓴 청소년이 "아버지가 너무 바쁘셔서 제가 대신 가져다 놨어요. 잘못 배송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수줍게 인사했다.
단돈 500여원. 택배기사들이 택배 1건을 배송하고 손에 쥐는 금액이다. 이 500원을 위해 아들은 그렇게 아버지의 바쁜 일상을 덜어주고 있었다.
1990년대 등장한 국내 택배산업은 약 20년간 물량이 14배 가량 뛰어 오르면서 한국을 '택배공화국'으로 만들었다. 2001년 2억개 수준이던 연간 택배물량은 지난해 27억9000개까지 급증했고, 올해는 코로나19 영향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택배물량이 늘수록 노동자들의 과로는 더해갔다. 한국통합물류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민 1인당 연 택배이용횟수는 53.8회에 달했다. 그에 비해 전국 택배서비스 종사자수는 2020년 현재 5만명으로 코로나19 확산이 본격화된 이후 물량 증가로 인한 피로도가 커진 상황이다. 그사이 택배기사들은 올해만 13명, 지난 5년간 27명이 생을 마감했다. 배송수수료 500원을 손에 쥐기 위해 '죽음의 길'을 달린 것이다.
택배기사들의 처우문제는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몇년간 특수노동직 처우 문제가 거론되면서 택배기사들도 시위 대열에 참여한지 오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문제가 도마 에 오른 것은 코로나19가 당긴 비대면 시대로 택배 물량이 급증한 영향이다. 과로에 의한 사망자가 증가하면서 시장과 정부, 언론이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구조적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택배노동자들이 '공짜 노동'이라 비난을 퍼붓던 것은 바로 분류작업이다. 택배기사들 과로의 주 원인으로 꼽히는 이 작업은 배송순서대로 물량을 차로 옮기는 것으로 배송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동이 투자된다는 게 노동자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렇다고 본사만 탓할 수도 없다. 실제 올해 상반기 기준 시장점유율 50.4%를 차지하는 CJ대한통운은 매출이 5조1654억원임에도 당기순이익이 476억원뿐이었다. 한진과 롯데글로벌로직스 역시 각각 상반기 택배사업 매출이 4765억원, 4385억원을 기록했지만, 회사 전체에 쌓인 돈은 고작 71억원과 8억원에 그친다. 그나마도 롯데글로벌로직스는 같은 기간 영업이익 14억원을 기록하며 지난해 마이너스에서 겨우 돌아섰다. 즉, 3사가 당장 분류작업 충원인력 비용부담을 떠안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30년전 택배비는 5000원이었다. 택배비는 과당경쟁으로 2500원까지 하락했다가 지난해 들어 겨우 500원 올랐다. 그럼에도 본사 영업이익률은 여전히 4% 안팎에 그친다. 그렇다면 택배비 인상으로 소비자가 부담을 떠안는 것이 해결책일까.
본사와 대리점 기사들이 나눠 갖는 수익분배 구조상 현재 3000원인 택배비를 소폭 올린다고 해도 인상된 가격만큼 택배기사들에게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다. 더욱이 최근 폐지 수입량 감소와 박스 원자재인 골판지 원지 생산공장 화재로 골판지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원자재 가격 인상이 불가피해진 상황이다.
결국 소비자, 택배사 등 모두가 손해를 감수해야 죽음을 달리는 택배기사들을 한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택배사가 인력 투자에 과감히 나서고, 정부도 앞장서 불공정 관행 개선을 시행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소비자들도 가격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한국경제는 성장을 지속하면서 기형적으로 발전시킨 산업이 많다. 3년여전 프랜차이즈업계도 한국형 프랜차이즈란 말을 양산했을 만큼 기형적인 구조적 불공정행위로 문제점을 떠안고 있었으나 업계와 정부가 나서 새로운 판을 짠 바 있다.
한국의 택배산업사 30년. 그간 굳어진 택배산업의 구조적 문제점은 오늘날 택배기사를 사망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 가격인상이 당장의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근본 해답은 아니다. 제2의 전성기를 맞은 택배업계가 30년 역사에 걸맞는 시장환경 조성을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다. 기업과 소비자, 그리고 택배기사 간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최적의 시장시스템을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