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으로 항공산업이 직격탄을 맞은 가운데 업계 종사자들의 삶은 말 그대로 막막한 터널을 지나는 고통 그 자체였다. 당장의 생계를 걱정하는 이들이 생겨나는 한편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파랗게 질려 떨어지는 숫자의 아래에는 우리가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

팬데믹이 끝나며 위드 코로나 시대가 성큼 다가왔으나 아직 이들의 삶은 정상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여전히 난기류에 빠져있다.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이 마저도 언제든 연료가 떨어진 비행기처럼 추락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희망을 노래한다.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공항이 열리고 활주로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끝 모르는 터널

“2년 동안 13개월을 쉬었습니다. 근무한 기간보다 휴직 기간이 더 길었네요. 여전히 직원들이 교대로 휴직 중입니다. 다음달부터는 항공편이 늘어난다고 하니 기대해 봐야죠”

국내 저비용항공사(LCC)에서 정비 업무를 맡고 있는 A씨(남·33)는 씁쓸하게 웃었다. 코로나 기간 세상에 시달린 그에게 남은 것은 허무한 웃음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

A씨는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시작한 2020년 3월 ‘첫’ 휴직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별스런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언론을 통해 하늘길이 막히고 있다는 보도가 연이어 나왔지만 2~3개월이면 다시 복직하게 될 줄 알았다. 그는 "나는 물론 주변 동료들과 심지어 회사도 그렇게 믿었다"고 말했다.

A씨의 뜻과는 달리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늘길은 막히고 A씨는 6개월이란 시간 동안 업무에 복귀하지 못했다. 정부가 고용유지지원금을 지급했기 때문에 휴직 기간 기본급의 70% 수준을 받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점점 커졌다. 

A씨는 그래도 버텼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며 6개월을 쉬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동료들은 하나 둘 사라졌다. 금전적인 문제로 방을 빼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겸직 신청서를 내고 배달 알바나 택배 상하차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하는 동료들도 있었다. 배달음식을 시켰는데 라이더가 익숙한 번호로 연락을 했고, 알고보니 동료였다는 믿기 싫은 소문들이 유령처럼 A씨 주변을 배회했다. 

다행히 6개월이 지난 후 A씨는 일터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안도의 한 숨도 잠시. 더 날카로운 삶의 나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인적인 노동. 업무는 이전과 같이 바빴지만 일터에 출근하는 동료들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마저도 두 달 일하고 한 달 휴직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녹초가 될 정도로 일을 하고 휴직 기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잠드는 시간이 반복됐다.

공포는 더욱 커졌다. 항공사 매출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제선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회사도 근무 인력을 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휴직 기간 급여는 기본급의 70%에서 60%, 50%로 점점 낮아졌다. A씨는 불안해졌다. 코로나19 사태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막막함이 더 생생하게 손가락에 걸렸다.

그렇다고 재취업을 준비할 수도 없었다. 항공 정비라는 직무 특성상 근무할 곳은 항공사나 군으로 한정돼서다. 대학 전공까지 한 전문 기술을 버리고 뒤늦게 다른 공부를 할 용기도 생기지 않았고 무엇보다 A씨가 일을 넘 사랑했다.

악착같이 버티기로 했다. A씨는 “그때(첫 휴직 후)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불면증이 온듯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다”며 “스트레스 때문인지 1년 사이 몸무게도 8kg이 늘었다”고 호소했다.

못 참겠다, ‘탈’항공

"허무함이 느껴지더라고요"

A씨의 상황은 그나마 나았다. 어떻게든 일의 주변부라도 붙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항사 객실 승무원인 20대 후반 B씨(여)는 운이 더 없는 편이었다.

B씨는 2020년 3월부터 휴직에 들어가 현재까지도 휴직 상태다.

휴직 기간 동안 회사에서 기본급은 지급됐지만 상여금 등 수당이 대부분인 급여 체계로 인해 월급은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입사한 지 2년이 채 안된 계약직 신분 승무원들은 정규직 전환 이전에 모두 퇴직 처리됐다. 부푼 꿈을 안고 같은 공간에서 달리던 동료들이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발걸음을 돌리던 날, B씨는 속상함을 넘어 처음으로 허무함을 느꼈다.

안좋은 일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당장 현지 공항 주변에 거주하던 승무원들은 타국에서 부업을 할 수도 없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돌아와서는 항공사 취업 전문 강사나 교육업계, 부업 등 재취업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정규직이이라 하더라도 무기한 휴직 상태에서 복직을 장담할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B씨도 결국 휴직 기간 재취업을 준비했다. 알바도 틈틈히 병행했다. 일용직이나 단기 알바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친척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서빙을 돕고 용돈을 받았다. 결국 그는 지난해 9월 퇴사를 결정하고 승무원이었던 특기를 살려 스피치 강사로 전업했다.

"지금의 일을 사랑하지만...글쎄요" 아쉬움이 없느냐는 질문에 말머리를 돌려버린 B씨의 눈가에 빗방울이 튄 것 같다. 잘못봤겠지만.

줄어든 인력 탓에 업무는 과중

"정신적으로 힘들어지고 있음을 느껴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시름에 빠진 건 항공사뿐 아니라 공항 종사자도 마찬가지다.  이들도 팬데믹의 공포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천공항 안내 데스크에서 근무하는 30대 초반 C씨(여)는 “코로나19로 인해 승객 수가 줄었음에도 할 일은 더 많아졌다”고 토로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출입국 시 필요한 서류나 절차가 복잡해지면서다. 특히 승객들에게 생소한 코로나19 백신증명서(영문), 유전자증폭(PCR) 검사결과지, 국가별 건강상태 문답지 내용 기입 등에 대해 한명한명씩 설명해줘야 했다. 출입국 관련 서류는 승객 본인이 직접 출력해야 하지만 데스크 직원에게 모든 걸 처리해달라고 요청하는 승객도 늘어났다.

외국인이 환승할 시 출발지에서 필요서류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다음 여정 비행기를 탑승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런 경우 승객은 면세 구역에 수일~한 달 정도 격리된 채로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도착지로 출국하거나 원래 출발지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그 과정을 파악하고 안내, 조율하는 역할은 안내 데스크 직원의 몫으로 넘겨졌다.

과도한 업무에도 인력 충원은 되지 않았다. 2019년 이후 신규 채용이 뚝 끊겼기 때문이다. 안내 데스크 업무 특성상 정해진 카운터 개수를 운영해야 하는데 퇴사자가 늘면서 근무 인력은 점점 줄어들었다. 남은 직원들은 연차를 사용하지 못하는 건 물론 근무 시간에 화장실을 가거나 물을 마신 시간도 부족했다. 결국에는 인력 부족으로 카운터를 폐쇄하는 단계에 이르기도 했다.

C씨는 “코로나19 이전에도 하루에 수천수백명의 승객을 응대하며 바쁘게 근무했다”면서도 “코로나19 기간에는 인력 자체도 부족하고 출입국 절차가 복잡해지면서 고객불만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잦아져 정신적으로 힘든 점이 있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그럼에도, 희망을 노래한다

팬데믹으로 닫혔던 하늘길이 열리며 LCC의 날개가 다시 펼쳐지고 있다. 많은 언론과 대중들은 이제야 항공업계가 살아나기 시작했다며 홀가분한 표정이다. 벌써부터 일각에서는 "찬란한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호들갑도 나온다.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2년의 고통스러운 터널을 지나는 시간 그 안에서 불확실성의 악령과 싸운 이들에게는 아직 앞으로의 미래도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다. 펼쳐지지 않은 미래는 여전히 현실의 상상에 갇혀있기 마련이다. 이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과 더불어 경영 정상화를 위한 다양한 법적, 제도적 시스템 구축이 필요한 이유다.

다행히 이들은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지난 2년간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묵묵히 지나 드디어 살아났음을 간신히 체감하는 중이다. 물론 깜깜한 미래와 암담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일터를 떠난 사람들도 짧지 않은 인고의 시간을 버텨낸 것은 마찬가지다. 

항공업계에 다시 볕이 들고 있다. A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힘들었지만 길었던 터널의 끝이 조금씩 보이는 기분입니다.” 그의 말대로, LCC는 이제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