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국내 프로농구계를 풍미하고 지금은 유명 방송인으로 활동하는 서장훈 씨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지금까지 가장 위대했던 스포츠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몇몇 레전드를 거침없이 꼽으면서도 1위는 "축구선수 안정환"이라 단언했습니다.

출연자 중 한 명이 "서장훈 씨 당신도 위대한 농구인 아닌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서장훈 씨가 한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납니다.

그는 "나도 프로농구계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안정환 선수는 월드컵 당시 전 국민에게 엄청난 감동을 준 선수"라며 "나는 선수로서 성공할 수 있었지만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안정환 선수가 가장 위대한 선수인 이유"라고 말했습니다.

바닥에서 위로

혁신의 승부사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주도하는 비전펀드가 야놀자에 1조원을 투자하고 지분 10%를 확보할 것이라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9일(현지시간) 보도했습니다. 야놀자는 여세를 몰아 미 나스닥 상장에 도전할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소프트뱅크 및 비전펀드는 쿠팡에 약 3조4,000억원을 투자했으며 쿠팡은 여세를 몰아 미 뉴욕증시 상장에 성공한 바 있습니다. 손정의 매직이 쿠팡의 비상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가운데, 야놀자도 비슷한 흐름을 탈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리는 중입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전통의 여행업계가 눈물의 구조조정에 돌입하는 등 최악의 위기를 겪고 있지만, 야놀자는 일찌감치 모텔이 아닌 숙박, 나아가 '여가'의 영역을 기민하게 파고들어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역대급 투자 유치에 역대급 외연 확장에 나서며 글로벌 시장까지 정조준하는 한편 최근에는 '테크 올인' 전략까지 발표했습니다.

이제 네카쿠라배(네이버 카카오 쿠팡 라인 배달의민족)으로 이어지는 국내 IT 업계 신조어도 상장 여부 및 기업 가치 등을 고려할 때 야놀자가 포함되어 네카쿠라야로 달리 불러야 한다는 말도 나옵니다.

그 중심에는 이수진 총괄대표가 있습니다.

2010년대 중반 당시 스타트업 업계를 취재할 때 이수진 대표를 스치듯 만난 적 있습니다. 조용하면서도 왠지 '우울'해 보였던 기억이 인상적인 가운데 그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조직을 성찰할 줄 아는 CEO였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이 아니라 묘한 침묵이 어울렸던 그는 소위 말하는 흙수저 출신 CEO기도 합니다. 형편이 어려워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어도 한글을 다 떼지 못했고 사회생활을 하며 모은 돈도 주식으로 모두 날렸던 그는 어쩌면 우리 주변에 가끔 보이는 '노답 인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기 위해 체념보다는 의지를 택했고, 모텔 종업원으로 일하며 틈틈히 네이버 카페에 자신의 이야기를 남겨가며 지금의 야놀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는 하버드대 출신 CEO의 이커머스 기업을 선택했던 혁신의 승부사로부터 두 번째 선택을 받을 국내 스타트업 CEO가 될 예정입니다.

2015년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고있는 이수진 야놀자 총괄대표. 출처=야놀자
2015년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고있는 이수진 야놀자 총괄대표. 출처=야놀자

감동을 써 내려가는 유일한 산업계
이수진 총괄대표는 아직 보여줄 것이 많습니다. 그가 총괄대표 역할을 수행하며 부쩍 조직 내 존재감이 강해진 김종윤 대표의 강력한 경영 전략이 가동되는 가운데 야놀자의 글로벌 시장을 위한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가 보여준 삶의 역경과 흔적들은 국내 스타트업 업계에 잔잔한 감동을 줄 전망입니다.

물론 감동을 주는 스타트업 업계의 주역은 이수진 총괄대표가 처음은 아닙니다. 맞습니다.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창업자(현 우아한형제들 비전 CEO)가 있습니다.

그가 서있는 무대가 워낙 화려하기에 많은 사람들은 김봉진 CEO가 탄탄대로를 걸어온 '스카이캐슬의 아이들'일 것이라는 선입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 화가를 꿈꿨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꿈을 접고 공고에 진학했으며 전문대에 들어가(물론 인지도가 있는 대학이기는 합니다) 디자이너로 일했고, 2008년에는 야심차게 사업을 시작했다가 홀라당 말아먹기도 합니다.

김봉진 창업자 부부. 출처=우아한형제들
김봉진 창업자 부부. 출처=우아한형제들

그러나 지금은, 독일인듯 독일이 아닌 것 같은 기업인 딜리버리히어로가 아시아 시장을 위해 간절히 원했던 CEO이자 국내 스타트업 업계에서 수출(?)한 1세대 벤처기업가가 되어 역시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 감동의 여운은 직원들은 물론 라이더와 창고 직원들에게도 아낌없이 쏘아지는 따뜻한 방한용품과 차가운 쿨토시 만큼이나 선명합니다.

사실 김 대표가 화려한 CEO라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지만, 그 역시 직접 만나면 약간 주책스러운(...) 이웃집 아저씨같은 느낌이 납니다. 한 때 배달의민족과 날을 세우며 열심히 틈새를 찾던 시기에 사옥에서 갑자기 첫 만남을 가져 당황해하는 기자에게 기념사진을 권하는 능글스러움도 인상적입니다.

다만 그가 전하는 감동의 무게는 역시 삶의 오래된 '축적'에서 기인합니다.

몇년 전 취재했던 '대한민국 배달대상 시상식'이 기억납니다. 배달의민족에서 활동하는 전국의 점주들을 유명 호텔로 모아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상을 시상하는 자리. 그 때 한 중년의 남성 점주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들의 손을 잡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가 말하더군요. "어릴 때는 먹고 살려고, 결혼해서는 가족을 부양하려 정신없이 사느라 평생 상이라는 것은 잘나신 분들만 받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유명한 호텔에서 당당히 상을 받으니 여한이 없다. 아들에게 자랑스럽다" 구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김봉진 CEO는 눈물을 흘리더군요. 그가 감동의 연극무대 총연출이 되는 순간입니다. 스타트업 업계라는 하나의 산업계에서만 연출할 수 있는 감동입니다.

여기어때 창업자인 심명섭 전 대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업무 겸 생활하는 오피스에서 인터뷰를 하자며 스스럼없이 소주 이야기를 하던 그는 역시 무일푼에서 여기어때의 창업자가 되어 국내 스타트업 업계의 거물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그 자체로 감동을 주고, 또 그 감동의 여운을 퍼트리려는 인물입니다.

심명섭 전 여기어때 대표. 출처=갈무리
심명섭 전 여기어때 대표. 출처=갈무리

감동을 준다면, 더 큰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처음 '공화국 만세'라는 사명의 뜻을 알았을 때 혹시 지극히 왼쪽에 서있는 회사인가 싶었던 토스 비바리퍼블리카의 이승건 CEO는 치과의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중보건의로 활동하며 '세상에 도움을 주겠다'라는 신념 하나만으로 토스 이전 무려 8번의 창업 실패를 감내합니다.

이제 스타트업은 아니지만 한 때 스타트업이자 아직도 스타트업스러운 카카오의 김봉진 의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걸어온 길은 진흙탕과 장애물이 켜켜히 쌓여 진득한 삶의 무게까지 느껴지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일가를 이뤘고, 그 성공은 감동을 줍니다.

이승건 토스 대표. 출처=토스
이승건 토스 대표. 출처=토스
김범수 카카오 의장. 출처=카카오
김범수 카카오 의장. 출처=카카오

물론 고난을 겪지 않고 우리에게 오로지 서비스로만 감동을 주는 사례도 많습니다. 반드시 흙수저여야만 감동을 주는 것도 아니고, 꼭 흙수저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공식도 없습니다.

다만 냉정한 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산업계의 한 섹터인 국내 스타트업 업계에는 감동이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탄탄한 스토리에 기반한 감동의 여운이 가장 넓고 선명하게 번지는 중입니다. 다른 산업계도 마찬가지지만 국내 스타트업 업계가 보여주는 감동의 무게는 유난히 우리에게 산업 그 이상의 가치를 깨우치게 만듭니다.

최근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이러한 감동이 많이 잦아들기는 합니다만, 역시 바닥에서 하늘로 올라서는 창업자들이 가장 혁신적으로 깨어나는 영역은 스타트업 업계가 최고타율을 보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타트업 업계가 지켜야 할 가치이자 단순한 산업계 이상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장훈 선수가 말했던 '위대함의 조건'이 아닐까요.

*IT여담은 취재 도중 알게되는 소소한 내용을 편안하게 공유하는 곳입니다. 당장의 기사성보다 주변부, 나름의 의미가 있는 지점에서 독자와 함께 고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