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박민규 기자] 경제 학자보다 더 실물 경제를 잘 예측해 '닥터 코퍼(Dr. Copper)'라는 별명이 붙은 구리 가격이 최근 심상치 않다. 톤당 1만 달러를 돌파한 데 이어 역대 최고가를 약 10년 3개월 만에 갈아치우며 슈퍼 사이클을 예고하고 있다.

구리는 건설·전자·통신 등 다양한 산업에서 두루 쓰여 경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원자재로 꼽힌다. 구리 가격 자체가 대표적인 경기 선행 지표로 꼽히는 만큼 시세 상승을 두고 세계 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감도 고조되는 분위기다. 다만 지금의 구리 시세 상승은 경기 회복의 신호탄이 아니라 친환경 신재생 에너지로의 대전환을 의미한다는 말도 나온다.

구리 제련 과정. 출처=파이낸셜타임스(FT)
구리 제련 과정. 출처=파이낸셜타임스(FT)

구리 시세 상승, 경기 회복 신호?

10일 업계 등에 따르면 영국 런던 금속 거래소(LME)에서 거래되는 3개월물 구리의 종가는 지난 7일(현지 시간) 전일 대비 3.5% 오른 톤당 1만361 달러에 장을 마감하며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지난해 3월에 4,630달러까지 떨어진 이후 1여년 동안 130% 가량 상승한 수치다. 지금은 전고점 대비 다소 유연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으나 구리 가격의 전고점이 중국이 원자재 구매 러시로 '원자재 슈퍼 사이클'을 촉발했던 시기인 지난 2011년 2월에 기록했던 1만190 달러라는 점을 고려하면 '심상치 않다'는 말이 나온다.

새계 최대 소비 국가인 중국이 정부 주도 투자로 글로벌 수요를 견인하고 있는 가운데, 코로나19 백신 접종 확대에 따라 경제 성장에 대한 기대와 인플레이션 우려 등도 불거지면서 구리 가격 상승을 이끈 것으로 분석된다.

구리 외에도 납·니켈·알루미늄·철광석 등 다른 원자재들의 가격도 급등하고 있어 원자재 슈퍼 사이클이 다시 도래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달 4일 미국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같은 날 기준으로 블룸버그 원자재 현물 지수는 2012년 이후 최고치인 192.93을 기록했다. 자연스럽게 '원자재 슈퍼 사이클=경기 회복의 신호탄'이라는 공식이 성립되고 있다.

다만 구리 가격의 상승세를 단순히 경기 회복 시그널로만 볼 수는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구리 시세 상승이 경기 회복이 아닌, 신재생 에너지 흐름이라는 큰 틀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소현 대신증권 연구원은 "최근의 구리 가격 상승이 주목 받고 있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신·재생 에너지으로의 산업 구조 변화에서 구리가 차지하는 역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구리는 열·전기 전도성이 뛰어난 데다, 가공 및 합금 처리가 용이해 기존의 산업은 물론 전기 자동차와 배터리,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 분야에서도 전기가 필요한 곳이면 모두 적용된다. 전기 자동차에 투입되는 구리의 양도 내연 기관 자동차에 비해 네 배 이상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구리는 새로운 원유"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과 유럽의 그린 뉴딜 정책이 아직 본격화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구리 공급 부족이 점쳐지지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당장 국제 에너지 기구(IEA)에 따르면 세계 각국의 에너지 정책과 탄소 중립 목표가 현실화할 시 오는 2040년 구리 수요는 올해보다 75%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파리 기후 변화 협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2040년 구리 수요가 2020년에 비해 165% 이상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파리 협약은 지구 평균 온도가 산업화 이전 대비 2℃ 이상 오르지 않도록 탄소 배출량을 감축하는 것이다.

여전한 잠재력 눈길

구리 시세 반등이 경기 회복의 신호탄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구리 부족 가능성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와 눈길을 끈다.

구리 광산을 보유한 국가들이 구리 채굴에 제대로 투자하지 않고 있어 장기적으로는 구리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김소현 연구원은 "실제로 신규 구리 광산 개발 프로젝트들이 구리 원광 등급 저하 등 때문에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는 상황"이라 말하면서 "구리의 경우 원광의 등급이 떨어질수록 채굴과 제련 등에 비용 및 에너지 더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에 따르며 칠레에서는 구리 원광 등급이 2005년 이후 30% 가량 하락했으며, 현재 칠레 구리 원광에서 구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0.7%다. 이와 관련, 세계 최대 원자재 중개 업체 영국 글렌코어의 최고 경영자(CEO)인 이반 글라센버그는 구리의 가격이 생산 비용을 고려했을 때 현 수준보다 50% 이상은 더 상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주요 국가들이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매년 구리를 100만 톤은 더 생산해야 한다"라며 "까다로워지고 있는 구리 생산 여건을 감안하면 구리 가격은 1만5,000달러까지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재생 에너지 중심으로의 산업 변화에 따라 중장기적으로 구리 가격은 더 상승할 전망이다. 다만 중국 내 수요 둔화로 구리 가격이 단기적으로 조정될 가능성도 상존한다는 것이 김 연구원의 진단이다. 실제로 중국의 지난달 제조업 구매 관리자 지수(PMI)는 51.1로, 글로벌 제조업 업황보다 상대적으로 부진하다.

게다가 중국의 구리 수입량도 2020년에 비해 증가세가 둔화된 모습이다. 중국의 올해 4월 구리 광석 수입 규모 및 비가공 구리 수입량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5.3% 감소와 5.1% 증가를 기록했다. 김 연구원은 "구리 현물 제련 수수료가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점과 중국 구리 수입 마진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구리 가격의 단기 조정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언급했다.

미국 매체 CNBC는 "구리 가격이 톤당 1만3,000달러까지 치솟을 것이며, 2025년에는 톤당 2만 달러에 도달할 것"이라 전망하기도 했다. 미 투자 은행(IB) 골드만삭스 역시 "현 구리 공급은 다가올 수요 폭증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며 “2025년까지 구리 가격은 1만5,000 달러까지 오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여기에 미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구리 공급이 증가하지 않을 시 구리 재고가 앞으로 3년 내에 바닥날 수 있다며 구리 가격이 2025년에는 2만 달러까지 오를 수도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