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어릴 때 읽은 위인전기 속 많은 위인들이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쉽지만 필자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날 수는 없었다. 선친이 약사(藥師)였기 때문이다. 약사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빈농은커녕 윤택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 같지만, 7남매를 두고 소매약국을 하는 약사 집이 그렇게 풍족하지는 않았다. 딩크(DINK)족도 적지 않은 요즘, 7남매라고 하면 무슨 가정사에 사연이라도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아무튼 어린 시절부터 ‘약’은 항상 필자 곁에 있었다. 어머니는 식사가 끝나면 꼭 각종 비타민을 서너 알 씩 먹게 했다. 하루는, 자는데 귀 속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 울고 난리가 난 적이 있다. 아버지는 집에 붙어 있는 약국에서, 스포이드가 달린 액체 약을 가져와 귀 안에 넣어주셨고 이내 평화가 찾아왔다. 귀에 들어간 벌레 잡는 약도 있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코로나 때문에 일상이 마비된 지 1년이 되어 간다.

코로나 대유행을 끝내기 위한 노력의 선두에는 백신이나 치료제가 있다. 모두 약(藥)이다.

의대 과목에는 약리학이 있다. 의사가 치료를 하는데 있어서 약이 빠질 수 없고, 따라서 약리학은 의대의 필수전공과목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면, ‘약’이란 말은 우리 주위에 참 흔히 쓰인다. 어떤 질병을 치료하는 약제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파생된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엄마 손은 약손” 하며, 배앓이를 하는 자식을 어루만져주는 것이 요즘 신세대 엄마, 아빠들에게도 구전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약이 되는 말‘과 같은 표현에서 약은 사람의 몸이나 마음에 이로운 것을 뜻한다. 몸에 좋은 약을 보약이라고 한다.

약의 여러 뜻 중에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것은 건전지의 뜻을 가진 약이다. 사전에도 나와 있다. 배터리를 약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중고물품 거래사이트에서 전지로 작동되는 시계를 판매하면서, “약은 다 닳아서 교환하셔야 되요” 라는 설명이 자주 따라붙는다. 소화제도 진통제도 비타민도 아닌 ‘약’을, 시계에 넣는다는 표현은 아마 세계 어디에도 없을 듯하다. 건전지만 약이 아니다. 구두약도 있고, 술을 점잖게 약주라고도 한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다소 답답하게 들리는 말에는 나이를 먹을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인간관계를 포함해서 많은 일에서, 달려들어 해결하려고 하는 것보다, 한발 물러서서 관조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낳는 경우가 적지 않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라는 속담도 있다. 양약고구(良藥苦口)라는 이 말은, 충언(忠言)은 귀에 거슬리나 자신에게 이로움을 이르는 말로 <공자가어>의 육본편(六本篇)에 나오는 말이라고 하는데, 영미권에도 똑같은 의미의 속담이 있다.

정반대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약’들이 있다.

약을 친다는 표현은, 사전적로는 속된 말로 뇌물을 주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조금 다른 의미지만, 저녁 식사 내기로 골프를 하는데, 전날 허리를 삐끗했다든지, 요즘 공이 전혀 안 맞는다든지 엄살을 피는 경우에도 ‘미리부터 약 친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약에 취했다, 약쟁이와 같은 표현은, 주로 향정신성 의약품이나 마약류에 중독된 경우를 가리킨다.

그 뿐 아니다. 쥐약(쥐藥)이라는 약도 있고, 농약도 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쥐약은 쥐를 죽이는 데에 쓰는 독약을 뜻하는데, 어떤 사람에게 결정적인 약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극약, 독약, 사약 도 있으니, 약이라는 단어는 죽는 사람을 살리는 것부터, 산 것을 죽이는 것까지 참 다양하게도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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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출입수술, 광대뼈수술, 사각턱수술을 해 온 20년간, 필자의 생각 몇 가지를 ‘약’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첫째, 돌출입 환자에게 잘못된 치료방법은 ‘쥐약’에 다름 아니다.

심한 돌출입을 가려보겠다고 이마, 코, 턱끝에 실리콘 보형물을 넣거나, 필러, 지방이식, 턱끝전진수술을 한 환자들이 적지 않다. ‘술을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처럼, 입을 넣지 않고도 입이 들어간다는 수술들이 바로 이마, 코, 턱끝을 보강해주는 이런 수술들이다. 동양인에서 이런 위장 수술(camouflage operation; 눈가림 수술)은 성형미인 혹은 성형괴물을 만들어낸다고 성형외과학 교과서에 이미 나와 있다. 돌출입만 빼고 싹 다 수술한 환자들이 뒤늦게 필자를 찾아오면 참 안타깝다.

치아교정을 했는데도 돌출입의 완벽한 개선에 실패한 환자들도 적지 않다.

사실, 치아교정은 오랜 역사를 가진 안정적인 치료방법이다. 발치교정을 통해서 전치부 치아를 후방이동해서 중등도 미만의 돌출입을 성공적으로 개선시킨 예가 많을 것이다. 문제는 골격성인 중등도 이상의 돌출입에서다. 인중 상부 즉 잇몸뼈 자체가 앞으로 나온 돌출입을 치아교정만으로 개선시키려 하다가 결과적으로 제대로 된 돌출입 개선에 실패한다면, 몇 년간의 시간과 비용, 돌출입 개선의 기회, 치아 4개를 모두 잃고 마는 셈이다. 심한 돌출입이 될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성장기에 이미 치아 4개를 빼고 교정을 한 경우 역시 안타깝다. 유전자의 힘은 교정철사의 힘보다 강하다.

다만, 교정과 수술 중에 어떤 치료방법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이 아니고, 치료 대상 자체가 다르므로 잘 구분해서 치료 방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교정만 해도 될 환자에게 무리한 돌출입수술을 한다면 역시 실패하게 된다.

둘째, ‘만병통치약’인 단 한 가지 수술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얼굴이 작아지고 예뻐지기 위해서는 양악수술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일부 의료인들조차도 교정으로 한계가 있는 모든 악안면의 문제를 오로지 양악수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디에나 만능인 수술은 없다.

양악수술은 주걱턱에서 아주 효과적인 치료 방법이다. 양악수술은 태생적으로 회전형 이동을 통해 위턱보다 아래턱을 더 많이 뒤로 넣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돌출입을 양악수술로 해결하려고 하면 특히 인중 상부와 윗입술은 덜 들어가면서 아래턱은 불필요하게 후방으로 과도하게 이동되는 문제가 생기기 쉽다. 그런데 한국인에서 돌출입과 무턱이 동반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양악수술로 돌출입을 해결하려면 무턱이 더 심해지게 되고, 다시 턱끝전진수술을 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가뜩이나 무턱인데 더 뒤로 보냈으니, 전진술을 최대한 해도 턱끝이 여전히 모자르기 십상이다.

물론 돌출입 중에는, 양악수술로도 돌출입수술로도 개선 가능한 교집합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치명률이 보고된 바 없는 돌출입수술을 선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돌출입수술의 경우, 상대적으로 수술부위가 더 제한적이고 출혈이 더 적으며, 수술 시야가 깊지 않고, 신경선에 근접한 절골이 적으며, 수술시간이 훨씬 짧고, 수술 후 위, 아래 치아를 묶어놓지 않으므로 호흡과 기도확보, 질식예방 측면에서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환자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며, 의사는 기본적으로 환자의 안전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겨야 마땅하다. 물론, 모든 수술은 합병증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셋째, 모든 치유과정은 시간이 약이다.

상처치유(wound healing)는 거의 모든 성형외과학 교과서의 1권 제 1장에서 가장 먼저 다루는 주제이다. 우리 몸의 상처가 스스로 치유된다는 것은 실로 놀랍고도 정교한 과정이다. 종이처럼 얇은 코뼈가 부러진 사람도 치료를 잘 받으면 조각난 코뼈의 골유합이 일어나 문제없이 살 수 있다. 사랑니를 뺀 자리는 처음에는 결손 부분이 커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건강한 잇몸살로 완벽하게 채워져 있다. 우리는 그 결과만을 경험하지만 우리 몸 속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세포와 물질, 인자(factor)들이 상처치유 과정에 유기적으로 관여한다.

바로 이런 의학적인 치유과정을 이용해서 성형외과 전문의가 입안 점막을 절개하고 들어가 얼굴뼈를 절골하고, 옮기고, 붙일 수 있는 것이고, 심미적으로 더 아름다운 얼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름다움의 정도는 미적감각과 수술실력에 좌우될 것이다.

단, 돌출입수술 뿐만 아니라 어떤 수술을 해도, 수술 후의 치유과정에는 시간이 걸린다.

돌출입수술의 경우 수술 직후에 바로 입이 들어간 변화가 확인되지만, 그 이후 며칠간 붓거나 감각의 변화를 느끼는 과정도 모두 상처치유 과정의 일부이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돌출입수술 후 2주에 엉엉 울다가, 수술 후 6주에는 방긋방긋 웃었던 환자에게 해 줄 수 있었던 이야기는 믿고 기다리라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약이다.

마지막으로 사족 같지만, 의사는 수술 전 환자가 어떤 약을 복용 중인지 알고 있어야 한다.

코로나로 ‘집콕’이 뉴노멀이 되면서, 벽에게 말을 하는 것까지는 정상이고, 벽이 말을 걸어오면 그 때는 병원에 가보라는 농담이 생겨났다. 그만큼,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사회활동이 위축된 정신적 스트레스와 우울감이 적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 이전에도, 항우울제, 수면제 등을 꾸준히 복용하는 환자들이 종종 있었다. 고혈압이나 당뇨병 약을 복용중이거나, 여드름, 녹내장, 갑상선, 고지혈증, 비만, 혹은 피임 목적 등으로 각종 약을 먹는 환자들도 생각보다 많다.

의사가 진료 시 약의 복용 여부를 포함한 병력들을 묻고 기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돌출입, 광대뼈, 사각턱 수술처럼 전신마취를 하는 수술에서는 특히, 수술 전에 끊어야 할 약, 그렇지 않은 약이 있고, 마취 중에도 혈압이나 당뇨 등의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병의 위중에 따라서는 전신마취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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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출입수술이 있는 날, 필자의 가상의 하루는 이렇다.

아침밥이 보약(補藥)이라는 말을 지켜본 적이 없는 나는, 빈 속에 매일 먹는 약(藥) 한 알과 요구르트만 마시고 출근한다.

돌출입수술을 할 환자는 고혈압 약(藥)을 복용중이다. 금식하고 오시되 아침 약까지는 물 반 잔으로 드시고 오시게 했다. 마취과장은 물론 환자가 고혈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마취 시 몇가지 약(藥)을 쓰는데 반영될 것이다.

금식을 한 환자가 처음으로 맞는 약(藥)은 수액이다. 전해질과 당 성분이 들어간 소위 링겔(링거액)이다. 그리고 예방적 항생제 주사 약(藥)을 미리 맞는다.

수액을 달고 내 앞에 앉은 환자의 수술 전 사진을 직접 찍는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잘 안 터지는 것은 약(藥)이 다 닳아서다. 건전지를 교체한다.

환자가 수술대에 눕고 마취가 시작된다. 마취 약(藥)이 환자를 편히 재우면, 소독 약(藥)으로 환자의 얼굴 피부와 입안을 모두 소독한다. 환자 눈에는 안연고가 소량 들어간다. 이것도 약(藥)이다.

수술 들어가기 전 점심 식사가 끝나면 몸에 좋다는 종합비타민을 먹고 싶은데, 먹으면 속시 더부룩해 도무지 이 약(藥)은 먹을 수가 없다.

목과 허리의 통증은 수술하는 외과의사(surgeon)들의 지병이다. 오늘은 견딜 만해서 골관절염 약(藥)은 안 먹기로 한다. 베타딘이 포함된 소독약으로 손을 깨끗이 스크럽(scrub;솔로 문질러 씻음)한 후 수술에 들어간다.

수술을 하는 데는 잔잔한 음악이나 발라드 음악이 약(藥)이 된다. 특히 수술하는 내게 랩 음악은 쥐약이다.

오늘 돌출입수술을 하는 환자는 턱끝의 실리콘을 제거해주어야 한다. 이 물질인 실리콘을 빼고 나면, 깨끗이 세척을 해주기 위해 소독약을 사용하기도 하고, 염증/감염의 징후가 있다면 항생제 용액으로 세척해주기도 한다. 항생제는 맛이 매우 쓰다고 한다. 좋은 약(藥)은 입에 쓰다더니, 사실인 셈이다.

돌출입수술과 턱끝수술이 잘 끝난 환자는 마취에서 깨어나는 약(藥)을 투여 받고, 스스로 호흡하게 된 후 회복실로 옮겨진다. (마취)약(藥) 기운이 남은 환자는 아직은 몽롱하다. 환자가 더 청명해지고 나서 혹시 아파한다면 진통제 약(藥)을 줄 수 있고, 메스꺼워 한다면 덜 울렁거리는 약(藥)을 주기도 한다.

환자를 몇 번 더 회진하고 안전을 확인한 후 저녁 약속에 간다. 메뉴는 삽겹살. 약주(藥酒) 한 잔을 안 할 수가 없다. 약(藥)이 다 되어 카운터에 맡겼던 핸드폰을 찾아 대리를 불러 집으로 간다.

아까부터 배가 살살 아프다는 어린 딸내미 배를 어루만져주며 ‘아빠 손은 약(藥)손’을 하다가, 문득 그 날 하루만큼은 본인 아빠보다 필자를 더 믿고 수술대에 누웠을 환자 생각이 났다. 밤샘 간호사가 특별히 보고할 일이 없는 무소식이 일상이고 희소식이지만, 혈압이 있는 환자니 전화를 해본다. 다른 활력 징후와 혈압이 괜찮은지 물어보고 혈압 약(藥)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체크한다. 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환자 괜찮대?” 제 배는 다 나은 모양이다. 환자는 다음날 진통, 소염, 소화제와 항생제 약(藥)을 처방받고 퇴원할 예정이다.

이렇게 약(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루가 지나면 이 세상의 또 한 명에게서 돌출입이 사라진다.

돌출입을 아름다운 입으로 만들어주는 수술은 필자가 집도했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 환자가 가진 놀라운 상처치유(wound healing) 능력 덕분이고, 소독약부터 마취제, 항생제까지 여러 가지 약제의 도움도 받은 것이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간 환자의 시간이다.

절골선이나 절개선이 치유되듯 돌출입으로 인해 환자가 겪었던 마음의 상처도 같이 치유되고, 필자에게 받은 수술이 환자에게 일생동안 좋은 약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