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박민규 기자] ESG 요소 중 특히 환경에 대한 성과가 요구되면서, 시선은 석유·화학 업계에 쏠린다. 태생부터 환경 오염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이 기후 변화가 최대 위기로 논의되는 시점에서 어떻게 존재의 당위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공통적으로는 '탄소 저감'이라는 새로운 숙제가 던져졌다. 해외에서는 석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굴지의 석유 공룡들이 신·재생 에너지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고 '종합 에너지 기업'으로의 변신을 꾀하는 드라마틱한 변화도 포착되고 있다.

트랜스친환경

그래픽=이코노믹리뷰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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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은 아예 친환경 에너지 기업으로 정체성을 전환할 것을 선언했다. BP는 앞으로 10년 동안 석유·가스 생산을 현재의 60% 규모로 축소하고, 매년 50억달러(약 5조7000억원)를 투자해 오는 2030년까지 50기가와트(GW) 규모의 신·재생 에너지 발전 능력을 확보하겠다는 내용의 에너지 전환 로드맵을 제시했다.

50GW는 그동안 다른 오일 메이저들이 제시해 온 목표치의 2배 이상 수준이며, 투자 비용은 현행 대비 10배에 달한다. 또한 앞으로는 석유·가스 탐사를 위해 다른 국가에 진출하지 않을 것이며, 연간 탐사 비용 또한 3억~4억달러(약 3400억~4600억원)까지 줄일 계획이라는 설명이다.

네덜란드 로열더치셸(이하 셸)도 조만간 저탄소 시대에 맞는 계획을 새로 수립해 내놓겠다고 예고했다. 앞서 셸은 지난해 프랑스 에올피를 인수하면서 그린 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연간 20억달러(약 2조3000억원)에서 30억달러(약 3조4000억원)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에올피는 프랑스 부유식 해상 풍력 발전 1위 업체이며, 현재 전 세계 200개 이상의 신·재생 에너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셸은 15개 정유 공장 중 5곳을 매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며, 처분하지 않을 공장들도 저탄소 밸류 체인으로 발전시킬 것을 계획 중이다.

누가 누가 잘 그리나…그린으로 그린 그림

국내 정유사와 화학사들도 '기후 악당' 꼬리표 떼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현대오일뱅크는 올해 9월 BP의 탄소 제로(0) 선언과 맞먹는 수준의 탄소 중립 비전을 제시했다. 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현행 70% 수준인 499만톤으로 줄인다는 게 골자다. 국내 석유·화학 업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탄소를 배출하는 만큼 감축하는 탄소 중립을 목표로 채택하고 있으나, 미래 탄소 배출량을 현재 수준보다 대폭 줄이는 전략을 발표한 곳은 현대오일이 유일하다.

이를 위해 현대오일은 공장 가동 중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탄산칼슘과 메탄올로 전환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탄산칼슘은 시멘트 등 건설 자재와 종이, 플라스틱, 유리 등의 원료로 사용되고 차세대 친환경 연료로도 꼽히는 메탄올은 플라스틱, 고무, 각종 산업 기자재를 만드는 데 쓰인다. 이외 현대오일은 공장 운영도 친환경 방식으로 전환할 방침으로, 2024년까지 중유 보일러 3기를 액화 천연 가스(LNG) 보일러로 교체할 예정이다. 

그래픽=이코노믹리뷰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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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S칼텍스는 폐플라스틱 재활용 소재를 활용한 복합 수지 생산으로 온실가스 배출 감축에 나섰다. LG화학 또한 폐플라스틱 제품 개발에 나섰으며, 생분해성 플라스틱 소재를 통한 미세 플라스틱 문제 해결도 꾀하고 있다. LG화학은 내년 하반기 내 바이오 원료 기반의 PO(폴리올레핀)·SAP(고흡수성 수지)·ABS(고부가 합성 수지)·PC(폴리카보네이트)·PVC(폴리염화비닐) 등을 생산하기 위해 세계 최대 바이오 디젤 기업인 핀란드 네스테와 파트너십을 체결하기도 했다.

롯데케미칼은 이미 국내 바이오 폴리에틸렌테레프탈레이트(PET) 시장을 선점,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다. 바이오 PET는 일반 PET에 비해 가격이 2배 가량 비싼데도 불구하고, 2017년 대비 판매량이 100여톤에서 1500톤으로 15배 급증했다. 친환경 및 가치 소비 트렌드가 확산한 덕분이다.

바이오 플라스틱 소재 뿐 아니라 재생 플라스틱도 최근 화학 업계의 신성장 동력으로 떠올랐다. 올해 3월부터 플라스틱 선순환 프로젝트를 추진해 온 롯데케미칼은 재생 플라스틱 소재인 rPET·rPP·rABS·rPC 등을 개발, 재생 폴리카보네이트(PC)와 재생 아크릴로니트릴부타디엔스티렌(ABS) 등을 스마트폰과 TV 등에 적용하고 있다. 이어 지난 9월 롯데케미칼은 국내 최초로 식품·화장품 용기에 적용할 수 있는 재생 폴리프로필렌(PCR-PP) 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국내의 대표적 배터리 업체로 꼽히는 SK이노베이션과 LG화학의 경우, 폐배터리 재활용 등 순환 경제 시스템도 구축하고 있다. 특히 LG화학은 배터리 공장의 생산 방식에도 친환경을 접목해 유럽 시장 사로잡기에 나섰다. 폴란드 공장은 지난해부터, 미국 미시간주 공장은 올해 7월부터 재생 에너지를 동력 100%로 활용하고 있으며 충북 오창과 중국 남경에 있는 공장 또한 2025년까지 재생 에너지 100%를 도입할 예정이라는 설명이다.

SK이노베이션은 가장 공격적으로 ESG 경영을 타진하는 국내 에너지 기업으로 꼽힌다. 이 회사는 지난해부터 자체적인 친환경 경영 전략인 '그린 밸런스 2030' 에 사활을 걸고, 전사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자회사인 SK루브리컨츠도 용기부터 사용까지 친환경적인 윤활유를 생산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이 여타 석유·화학 기업들과 차별화되는 요소는 환경 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 창출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SK이노베이션은 친환경 사업을 진행하는 소셜 벤처들을 후원하고 이들과 협업해 상생·친환경 가치를 함께 창출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한전 또한 ESG 이슈를 민감하게 좇는 기업 중 하나다. 한전은 최근 해외 석탄 화력 발전 사업과의 이별을 과감히 선언한 데 이어, 이달 4일에는 국내 에너지 기업 최초로 2년 연속 ESG 채권을 발행했다고 밝혔다. 한전이 이번에 발행한 원화 채권은 총 2000억원 규모에 달하며 이를 통해 확보한 자금은 국내외 신·재생 에너지 사업 및 연계 설비 확충, 에너지 효율화 사업, 일자리 창출, 중소기업 지원 등에 사용할 방침이다.

앞서 한전은 올해 상반기 해외에서 5억달러(약 5700억원) 규모의 그린 본드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린 본드는 친환경 프로젝트에 투자할 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발행하는 채권이다.

국내 에너지 기업들의 이 같은 행보는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평가다. 최근 국제 사회는 유럽 연합(EU)을 필두로, 탄소 배출량이 많은 수입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탄소 국경세를 검토하는 등 친환경 관련 규제를 강화하는 모습이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내 기업의 경우, 해외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저탄소·친환경 경영의 도입은 필수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편, 한국수력원자력과 한국가스공사 등 공기업들은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사회적 이미지 강화에 나선 모양새다. 최근 두 업체는 코로나19발 락다운 및 경기 위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협력 중소기업들의 판로 개척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구원 투수로 나서는 등, 상생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