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는 1980년대 초 ‘데모 명문’으로 불렸다. 시위가 한창일 때는 명륜동 그 작은 캠퍼스의 정문은 물론 후문까지 툭하면 봉쇄되어 화염병으로 그을린 방패와 방패 사이의 틈으로 등하교를 해야 했다. 사복형사들은 공공연히 ‘김밥’(소형무전기)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왔다. 수배자 색출과 교수발언 검열이 ‘청강’의 목적이었다. 자칭 해방구라 했지만 그곳은 삼엄한 봉쇄구역이었다.

하지만 다들 포기하지 않았다. 최루탄에 눈물 콧물 흘리며 데모현장과 중앙도서관을 오가던 친구에게도 나름 확신이 있었다. “생각해보라. 물을 계속해서 끓이다 보면 섭씨 100도에서 수증기로 바뀌지 않는가. 힘들어도 결코 포기하지 말자.” 그에게는 ‘양적 변화가 일정 단계에 도달하면 질적 변화를 초래한다’는 마르크스-엥겔스의 ‘양질전화(量質轉化) 원리’가 신앙이었다. 믿음처럼, 간단 없는 투쟁 끝에 수년 후 민주화가 이뤄졌다.

지난 7일 문득 그 친구가 떠올랐다. 이날로 삼성그룹은 신경영 20주년을 맞았는데 삼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하룻동안 롤러코스터를 탔다. 아침에는 20년간의 경이적 실적을 평가하는 기사와 해설, 칼럼이 쏟아지더니 외국계 증권사와 국제신용평가사의 혹평으로 삼성전자 주가가 6% 이상 폭락하면서 일제히 우려로 바뀌었다.

호평과 우려가 모두 틀리지 않은 듯하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봐!” 이건희 회장이 이렇게 프랑크푸르트의 사자후를 토한 지 20년 만에 그룹 매출은 29조원에서 380조원으로 13배, 이익은 47배나 증가했다. 그룹 시가총액도 7조6000억원에서 338조원으로 44배나 늘어났다. 세계시장에서의 평가도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이건희의 '신경영'이 이룬 성과는 가히 경이적이라 할 만하다.

시장의 걱정도 일견 타당하다. 그룹 상장사 이익의 30%를 삼성전자 한 곳이 차지하고 있고, 그중 70%는 스마트폰에 집중돼 있는데 이 분야에서 경쟁자들의 추격이 턱밑을 위협하고 있다. 물론 JP모건의 실적 둔화 예상은 과할 수 있다. 그러나 피치의 진단은 ‘쓰지만 옳은’ 지적일 수 있다. 지금까지 삼성은 소니, 애플 등 선도기업의 제품을 빠르게 추격함으로써 반도체ㆍ디스플레이ㆍ스마트폰 시장에서 세계 정상에 올랐으니 ‘민첩한 적응자’ (agile adaptor)이나 ‘진정한 혁신자’(true innovator)는 아니라는 피치의 분석을 오진(誤診)이라고 치부키 어렵다.

문제는 현실인식이다. 현시점에서 지난 20년간의 성과를 자축하거나 삼성의 미래가 오로지 일개 제품에 달린 듯 갤럭시 S4의 수익성 문제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게 그리 중요한가. 지금은 일반적인 국면인가, 아니면 대전환기이거나 변곡점에 와 있는가.

마르크스로 돌아가 보자. 양질전화 법칙의 핵심은 반드시 양적 과정이 쌓여야만 질적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치열한 양의 축적이 전제이다. 추정컨대 ‘신경영’ 20년의 치열함과 세계 정상 등극으로 삼성은 적응자에서 혁신자로 전화할 비등점을 코앞에 두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삼성을 둘러싼 비등한 논란도 커피포트가 섭씨 100도에 도달하기 전 들려오는 기포의 파열음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결코 후퇴해선 안 되는 상황인 셈이다.

이건희 회장도 이를 간파하고 있는 듯하다. 삼성 임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이젠 '자만의 위기'와 싸울 때”라는 대목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관련대목은 다음과 같다. "앞으로 우리는 1등의 위기, 자만의 위기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며, 신경영은 더 높은 목표와 이상을 위해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