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3.0, 中企의 미래 | ① 국내 주얼리 업계 최초 ‘한국산’ 원산지 획득… 조현숙 HNK G&I 대표

주얼리도 이제 원산지 확인하세요 

주얼리 시장은 대부분 대량생산에 의존하기 때문에 100% 수작업만으로는 버티기 힘들다. 수작업을 한다는 곳은 대부분 작은 공방이다. 여기 100% 수작업을 40년간 이어온 사람이 있다. 수작업을 하면서도 대량 주문생산까지 가능한 공정라인까지 갖췄다. 2012년에는 국내 최초로 주얼리 원산지 증명까지 획득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는, 조현숙 HNK G&I 대표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이미화 기자

 

방금 전까지 생화였지만, 아주 세찬 바람에 갑자기 언 꽃 같았다. 입김을 불면 금방이라도 살아날 듯했다. 섬세한 잎맥과 살짝 나풀거리는 끄트머리가 그랬다. 여러 가닥 꽃잎 가운데는 수술을 대신한 진주가 박혀 있다. 여자라면 절로 손이 갈 만했다. 만져봤다. 의외로 가벼웠다. “브로치예요. 가볍죠? 실크 소재 옷에 꽂아도 옷감이 늘어지지 않을 정도죠.”

주얼리 업체인 ‘HNK G&I’의 대표이자, 수석 디자이너인 조현숙 씨. 한눈에 봐도 욕심이 날만큼 수려한 액세서리를 만들지만 정작 자신은 수수한 모습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그 흔한 액세서리 하나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은 액세서리를 하면 예뻐진다. 그 모습을 보는 게 더 좋다”고 했다.

송파구 방이동, 어느 골목에 있는 쇼룸. 겉으로 보기에 전혀 특별할 것 없는 곳이었다. 40년 전통을 등에 업고 주얼리 업계 최초로 한국산 원산지 증명을 얻었다거나, 전 세계 유일한 제조기법을 쓰는 곳이라기엔 너무도 ‘겸손한’ 외관이었다. 쇼룸 안쪽, 한 평 남짓한 작업 공간에서 조 대표를 만났다. 그는 디자인 작업에 심취해 있었다.

“감성을 그대로 액세서리에 전달해야 합니다. 머리로 애써 ‘예쁘게 만들어야겠다’고 하면 그저 제품에 불과하죠. 감성을 담아야 ‘작품’이 나옵니다. 이론적인 것만 적용하면 기교를 부렸다는 느낌뿐이에요.” 외마디 말을 뱉은 조 대표는 다시 작업에 빠져들었다. 열처리를 한 금속을 손으로 몇 번 구부리자, 무심했던 쇠붙이가 어느새 팔락거리는 이파리로 변했다.

 

깃털처럼 가벼운 액세서리의 비밀

‘HNK G&I’는 ‘브리지주얼리’ 업체다. 브리지주얼리는 귀금속주얼리(파인)와 패션주얼리(커스텀)의 중간을 뜻한다. 브랜드는 인써니(INSSONI), 히라도(HIRADO), 아이파리(ifari)로 총 세 개다. 세 브랜드 모두 목걸이, 브로치, 팔찌, 귀걸이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고, 타깃과 가격대는 조금씩 다르다.

“보통 브리지주얼리는 합금을 가공해서 제작합니다. 순재료를 이용해 수작업하는 것, 그게 저의 강점이에요.” 조 대표는 순도 99.999%에 육박하는 금속재료(금, 은, 동)만 쓴다. 원료도 원료지만 핵심은 제조기법에 있다. 이른바 ‘필리그리(Filigree) 기법’이다. 선작업, 혹은 누금세공이라고도 한다. 금속을 이용해 잠자리 날개까지 표현할 수 있는 세밀한 기법이다. 앞서 실크에 달아도 늘어나지 않을 정도의 가벼움은 여기서 비롯된다. 조 대표는 “필리그리 기법은 작업 공정이 굉장히 까다롭고 복잡하다”면서 “고대 때부터 주얼리 제작에 쓰였지만, 양산형 작업 공정에 밀려서 퇴화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하나를 만드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가격 상승과 생산성 저하를 피할 수 없죠. 이런 이유 때문에 장신구를 아이템으로 하는 양산형 사업체에서 이 기법을 쓰는 곳은 전 세계를 통틀어 저희가 유일합니다.”

 

가업 승계 이후 죽을힘 다했다

조 대표의 원래 전공은 패션이다. 한때는 의상실도 운영했었다. 거래선은 대부분 굴지의 기업들이었고, 방송사 가요제 의상도 담당할 만큼 입지가 좋았다. 그는 “공공기관이나 일반기업의 공개 입찰에 참가해 어렵잖게 수주할 정도였다”고 했다. 20대, 젊은 나이에 운영하던 의상실은 결혼과 동시에 정리했다. 왜 접느냐, 아깝지 않느냐는 반응이 따랐지만 미련은 크게 없었다. “당시 시댁 어른이 주얼리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규모 면이나 내용 면이나 훨씬 매력적인 사업이었죠.” 1980년대 말께, 가업에 참여하며 주얼리 업계에 발을 들였다. 시어른 옆에서 부품 제작을 그저 흉내 내는 시기를 지나, 1990년 가업을 물려받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조 대표는 “몇 년간 가업승계를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고 회상했다. “소질이 있다고 칭찬은 하면서도 핵심기술은 공개하지 않았으니까요. 보이지 않는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치고, 일단 보이는 부분만이라도 완벽히 체득하자고 마음먹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어요. 몇 년간 열의를 보이니 결국 인정하셨습니다.”

공장은 아주 잘됐다. 필리그리 기법을 쓴 부품 및 반제품을 공급하는 공장이었는데, 국내는 물론 미국, 유럽 및 일본 등의 선진국에 수출도 했다. 사업 경험 덕인지 가업을 물려받은 후에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본사가 봉천동에 있었어요. 당시 일대의 거의 모든 주민이 우리 회사 부품을 조립하는 부업을 받아 갈 정도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죠.”

공장이 잘될수록 드는 고민도 있었다. “가용 생산라인을 총동원해도 절대 수요를 맞추기 벅찬 거예요. 현금을 선지급하고도 상당시간 기다려야 공급받을 수 있었죠.” 사업 규모를 확대해야겠다 싶었다. 마케팅 네트워크를 재정비하고 총판 체제를 갖췄다. 실질적으로 매출 확대에 기여하고 좀 더 안정적인 운영을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진통은 그때 찾아왔다. 총판장을 열고, 관리책임자를 뒀을 때다. 독보적인 입지에 흑심을 품은 걸까. 총판 책임자가 본사 몰래 ‘모조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상당수의 샘플을 편취하거나 제품을 대량 구입한 후 중국에서 투자자를 끌어들여 주물을 뜨도록 한 겁니다. 100% 수작업이 필요한 액세서리를 대량으로 마구 찍어내니 단가는 당연히 떨어지죠.” 책임자는 원제품의 10% 가격인 모조품을 들고, 거래선을 찾아가 물량 공세를 펼쳤다. 거래선 입장에서는 거절할 리  만무했다. 총판 직원과 중국 투자자와의 ‘공모’는 꽤 오래 지속됐다.

2~3년이 지난 후에야 결국 덜미가 잡혔다.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했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어요. 무게가 현저히 무겁고, 탄성과 인성이 없어 후공정 작업에서 제품이 뒤틀리고 파손되니까 거래선에서도 이상하다 싶었던 겁니다.” 비보를 접했을 때는 이미 모든 거래선을 잃은 후였다. 승승장구하던 사업체는 급속히 곤두박질쳤다.

    

‘반제품’서 ‘완제품’ 생산하기까지

문제점은 알았다고 해도, 이미 동력을 상실한 뒤였다. 재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주변에서도 어려울 거라고 했다. 하지만 조 대표는 생각이 달랐다. 이제부터가 진짜 내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쓴맛’을 톡톡히 본 그는 모든 공정을 직접 맡기로 했다. 디자인, 샘플링, 검수, 조립, 생산 등 전 과정에 참여했다. 이전과 비교도 안 되는 극히 적은 주문량이었지만 성의껏 대응했고, 남아 있던 소수의 거래선에는 최상의 샘플을 공급했다. 더뎠지만 서서히 이전의 명성을 되찾는 듯했다. 그리고 전환점도 찾아왔다.

10년 전쯤, 시장조사 차원에서 백화점에 들렀던 날. 조 대표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름만 대도 알 만한 해외 명품 브랜드 매장에 제가 만든 작품이 걸려 있는 거예요.  순수 한국산인데, 프랑스산으로 둔갑해서요.” 원산지는 엉뚱한 데 가 있었고 가격은 껑충 뛰어 있었다. 만원이 채 안 되는 가격으로 수출했는데, 약간의 가공을 거쳐 100만원에 가까운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득달같이 백화점 바이어를 불렀다. “제가 만든 제품들을 보여줬죠. 동일한 제품인 걸 증명하고, 순수 한국산인데 어떻게 프랑스산으로 둔갑해서 초고가로 팔릴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 상품들은 그 즉시 매장에서 철수됐다. “1, 2차 산업인 부품 및 반제품 수출은 부가가치가 낮다는 걸 그때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혼을 다해 만들면 뭣하나요. 결국 완제품을 만드는 해외 업체 배만 불리는 것이지요.”

그 길로 별도의 완제품 사업부를 가동하기로 했다. 디자인 도용을 방지하기 위해 유통 사이클을 대폭 줄였고, 소매와 도매를 병용한 시장 관리에 들어갔다. 재도약을 결심하고, 투자를 늘렸지만 손익분기점은 최대한 여유 있게 잡았다. 그야말로 ‘버티기’를 각오하고 뛰어든 셈이다. 그 가운데 줄일 수 있는 건 최대한 줄였다. 하지만 핵심 설비만은 끝까지 지켰다. “당시는 많은 주얼리 업체들이 중국으로 생산 거점을 이전할 때였어요. 국내 인건비와 임대료를 포함한 운영비가 급격히 상승했었거든요. 자칫하면 기술만 넘겨줄 수 있다는 생각에 끝까지 국내에 남기로 했습니다.”

 

업계 최초, ‘한국산’ 원산지 증명 획득

현재 공장은 암사동에 있다. 공장 내부는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는단다. 조 대표는 “제작 기법과 전체 생산 공정은 오랜 노하우를 통해 자체 개발한 것으로 철저한 기밀 운용 방식을 택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공장 내부를 모두 둘러본 이는 가족밖에 없다. 조 대표가 말한 노하우는, 철저한 독립 공정에 숨어 있다. “28개에 이르는 모든 공정이 각각의 특성별로 분리돼 있습니다. 메인 생산 공정도 몇 개의 단위로 분리돼 상호 협조할 필요가 없죠. 따라서 종사자라고 해도, 전 라인을 파악하기는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조 대표는 “이런 방식은 과정별 별도의 인원과 설비를 필요로 해서 생산성 향상에 일부 역행하기도 한다”면서 “초기 많은 주얼리 업체들이 이 같은 한계에 부딪쳐 생산 공정을 아웃소싱하거나 일부 사입하는 것으로 전향했다. 하지만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가장 큰 경쟁력을 버린다면 결국 ‘기성품’만 남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주문생산까지 걸리는 시간이 그리 긴 것도 아니다. 조 대표는 “바이어들이 일반 주물제품에 비해 리드타임이 길 것으로 예상했다가 오히려 더 짧은 제작 및 선적 기간에 놀라워한다”면서 “오랜 경험을 결합한 제조 공법으로 전 세계 어느 업체도 따라올 수 없는 기술적 장벽을 구축했다”고 했다.

완제품 생산 10년째. 조 대표는 지난 2012년, 대한상공회의소로부터 주얼리 업계에서는 최초로 ‘한국산’ 원산지 증명을 획득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주물을 뜨고, 단가를 낮추기 위해 중국에 공장을 세우는 걸 극구 반대한 ‘고집’이 빚은 결과다.

조 대표의 ‘메이드인코리아’ 주얼리는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이미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서 열린 각종 전시회를 통해 여러 차례 입증됐다. 세계미녀공회, 미스태평양콘테스트, 세계보디빌딩대회 등 세계적인 대회의 왕관과 메달 제작, 주얼리 협찬에 참여한 것도 ‘세계적 인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세계 시장을 향한 더 큰 목표는 없을까. 그는 “지금껏 그랬듯, 그저 내 길을 우직하게 가면 된다”고 했다. “시댁 어른이 운영하던 때와는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그때는 완제품에 ‘메이드인 코리아’를 붙이기에는 인지도가 없었어요. 지금이요? 반제품은 중국 시장에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요. 한국산 ‘완제품’ 주얼리가 세계 시장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란 걸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