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프라이빗뱅킹(PB)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금융위기로 인한 부(富)의 감소로 고객 자산 이탈이 잇따르자 이를 견디지 못한 시중은행들이 부유층 고객의 기준을 대폭 낮춰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

과거 최상위 계층을 상대로 귀족 마케팅을 펼쳐온 스위스계 대표적 PB 전업은행 율리우스 바에르는 최근 부유층 고객의 정의를 재조정했다.

보리스 콜라르디 율리우스 바에르 최고경영자(CEO)는 “PB서비스의 고객 유치 기준을 100만스위스프랑(약 11억4000만원)에서 80만스위스프랑(약 9억1000만원) 수준으로 낮출 것”이라고 밝혔다.

스페인 2위 은행인 BBVA 역시 부유층 고객의 자산 기준을 완화한다는 방침이다. 엔리케 마라수엘라 BBVA 펀드매니지먼트 사업부 최고투자책임자(CIO)는 “PB서비스의 이상적인 고객 자산규모는 적어도 200만유로(약 34억4000만원)라고 판단하고 있지만 근래 들어 150만유로(약 25억8000만원) 정도의 투자자산을 가진 고객들에게도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스위스의 1, 2위 은행으로 PB사업에 강점을 보이고 있는 UBS와 크레디트 스위스도 최근 25만유로(약 4억3000만원) 이하 투자자산을 가진 일반 부유층 상대 PB서비스와 리테일 뱅킹서비스를 시작했다.

최상위 부유층 고객 유치만을 고집하며 일반 부유층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중은행들이 갑작스레 자세를 낮춘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금융 위기가 불어닥치며 발생한 고객 자산의 대규모 이탈 현상에 있다.

캡제미니와 메릴린치가 내놓은 월드 웰스 리포트(WWR)에 따르면 작년 말 100만달러(약 11억6000만원) 이상의 투자자산을 보유한 세계 인구는 전년 대비 14.9% 줄었으며 그들의 재산 또한 19.5%나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3000만달러(약 349억2000만원) 이상의 순자산을 보유한 최상위 부유층의 경우, 평균 24%씩 손실을 입었다.

세계 최고의 부자들이 모여 있는 미국에서는 그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미국 경제 격주간지 <포브스>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400명의 자산가치가 총 1조2700억 달러로 1년 새 19%나 줄었다고 전했다.

미국 갑부들의 재산 규모가 감소한 것은 1982년 이후 5번에 불과하다.
특히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나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 등 미국 내에서도 자산가치가 ‘톱 10’에 드는 초특급 부자들은 같은 기간 무려 392억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잃었다.

이처럼 최상류부유층들의 재산이 대폭 줄어들면서 PB은행들도 고객 타깃의 눈높이를 자연스레 낮출 수밖에 없게 된 것.

게다가 최상위 부유층을 상대로 한 서비스보다 평범한 부유층 상대 서비스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이 더 많다는 점도 PB은행들이 눈을 돌리는 이유 중 하나다.

마라수엘라 CIO는 “200만유로 이상의 투자자산을 가진 고객들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 마진은 1%가 채 안 되는 데 반해 10만∼30만유로(약 1억7000만∼5억2000만원)의 자산을 보유한 고객들로부터는 거둬들이는 마진은 이를 능가한다”며 “현 상황에서는 오히려 적은 투자자산을 가진 고객들을 확실하게 잡는 것이 은행으로서도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아시아경제신문 김기훈 기자 (core8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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