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건…》
-강길수 지음
-김&정 펴냄
-2009년

운악산 현등사를 오르는 계단은 108개입니다. 인간에게 108개의 번뇌가 있는데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삶을 되돌아보고 그 번뇌를 끊으라는 의미에서 만든 거랍니다.

그렇다면 그 번뇌를 끊고 오른 계단 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법정의 《일기일회(一期一會)》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아마도 번뇌를 끊은 뒤의 내 모습은 이런 경지가 아닐까 합니다.

“때때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십시오. 자신이 겪고 있는 행복이나 불행을 남의 일처럼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행복과 불행에 휩쓸리지 않고 물들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오르는 길이 케이블카나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아니라 계단이라는 점입니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면서 올라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길엔 지름길도 없고 편법도 통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케이블카나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다면 굳이 계단으로 올라갈 필요가 없겠지요.

이용하라고 만든 것을 이용하지 않는 것도 지혜롭지 못한 처사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만들지 않은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면 지름길을 찾게 되고 편법을 찾게 됩니다. 이왕이면 고생 없이 무임승차하고 싶고 별 다른 장애 없이 잘살고 싶은 게 인간의 기본적인 정리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나쁜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고도 아주 잘살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은 공정하거나 공평하지 않다면서 상황을 정당화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한번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도대체 계단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기에 그렇게 기를 쓰고 오르려고 하는 것인지.

우리에겐 계단 위 저 너머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있습니다. 실제 그 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면서 말이지요.

정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르려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위로 오르고자 한다면 최소한 계단을 밟고 오를 수 있는 정도의 체력은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케이블카나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가 있다면 모르지만 그런 것이 없다면 최소한 계단으로 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 더 덧붙인다면 계단을 오르는 다른 사람을 보고 시샘하거나 비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서 오르는 사람도 있고 뒤처져 오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각기 나름의 그릇과 능력에 맞게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오르기로 작정했다면 오르는 일에 충실하세요. 세상을 사는 한 지혜입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계단을 오르고 있습니다. 히야, 사람들이 엄청 많네요. 근데 왜 계단을 오르는지 나도 잘 모릅니다.

그냥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다른 사람들이 마구 뛰기 시작하네요. 에라 모르겠다. 나도 일단은 뛰어야겠습니다.

저런! 떨어지네요. 이 사람들은 지쳤나 봅니다. 쯧쯧. 우와 저 사람은 엄청 빠르네요. 정말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나는 앞만 보고 정말 열심히 달렸습니다. 어? 근데 저건 뭐지? (헬리콥터였습니다.)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계단을 오르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습니다. 아, 후회가 됩니다.
문득 고개를 들었던 그 순간이.-《산다는 건…》 4~7쪽

이현 지식·정보 디자이너, 오딕&어소시에이츠 대표 (rheeyhyu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