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시 창작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간 적이 있었다. 필자는 그곳에서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관찰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반응은 어떠했을까. ‘뭐, 저런 말을 하는가’ 하는 반응이었다. 그러더니 결국 “우리는 수준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많은 교육을 받았고 그로 인해 등단한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나는 그 말에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다시 공부해야 한다. 이제 등단을 했거나, 등단 과정에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면 그동안의 시 공부는 헛것이다. 등단한지 20년, 30년이 된 시인들도 관찰 공부를 다시 하는 형편인데 벌써 마치 대가인양 하는 태도로는 결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어찌 보면 이들의 태도는 당연한지 모른다. 사람들은 관찰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관찰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물으니 ‘자세히 보는 것’이라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등단한지 23년이 되고, 시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시 창작 관련 책과 평론집까지 출간한 필자도 관찰 공부를 다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시창작론 시간에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있다. 관찰 태도와 방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관찰은 창조의 시작이다. 아인슈타인도 그의 업적을 이룩한 근본 바탕에는 관찰학교에 나닌 것이 큰 효과를 보았다고 하지 않은가. 관찰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통찰이 되지 않으니 어떤 창조아이디어도 나올 수 없다.

시 창작 시간에 학생들에게 눈(雪)을 제목으로 설정해 창작을 해보라고 한 적이 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쓰겠는가. 학생들의 95%는 눈이 땅에 쌓이는 것을 형상화했다. 나머지 5%는 눈이 내리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그런데 눈은 하늘에서 내린다.

하늘 맨 위부터 관찰해야 새로운 창조가 나오게 된다. 눈이라는 제목의 시를 쓸 때는 하늘부터 땅 끝까지 모두 관찰 대상이다. 그런데 땅과 공중만을 그 대상으로 했다. 그렇다면 ‘하늘이 눈을 낳는다’는 표현은 나올 수가 없다.

‘하늘도 아픔을 겪으며 자신의 자식을 지상으로 내려 보내고 있다’는 상상은 할 수가 없다. 하늘을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보는 것을 보는 것은 관찰이 아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 관찰이다. 남들이 모두 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 대상을 관찰하는 방법이 있다. ‘상식과 반대편을 들여다 보라’는 것이다. 눈을 관찰할 때 사람들이 땅에 쌓인 눈만 보았다면 하늘을 보아야 하고, 사람을 관찰하는 데 일반적으로 얼굴과 머리를 보는 것이 통상이었다면 상대편에 있는 발을 봐야 한다. 이것이 관찰 잘하는 방법의 하나다.

아동문학가 이미애 선생의 <큰 나무 아래 작은 풀잎>이라는 동시는 그래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는 ‘큰 나무를 보러 왔다면’ 그 반대편에 있는 ‘그 아래 피어난/키 작은 풀잎을 꼭 찾아보라’고 권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키작은 풀잎을 보러 왔다면’ 반드시 ‘아름 굵은 큰 나무를 꼭 쳐다 보고 가’야한다.

목표 대상을 관찰하면서 그 하나만 보는 게 아니라 반대편에서 살고 있는 존재까지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이 관찰의 기본이다.

황인원 시인ㆍ문학경영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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