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신양명의 길은 멀고 험하다. 중국 송대에 변법 개혁을 이끌던 왕안석은 지원세력의 이반으로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입속의 혀처럼 굴며 그의 총애를 받던 '젊은 신료’는 후견인이 실각하자 바로 말을 바꿔 탔다. 천하를 호령하던 왕안석은 외로웠다.

진나라 부국강병의 기반을 닦은 상앙도 파국은 피할 수 없었다. 태자를 보필하던 사부의 얼굴에 사정없이 먹물을 새겨넣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도 강력한 지지자인 제후가 서거하자 ‘문득’ 초라해진다. 기세등등한 집권세력은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대륙 통일의 기틀을 놓은 개혁가의 비참한 최후였다. 정권은 유한하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을 몰아붙이던 개혁가 왕안석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자 ‘상앙’도 이 법칙을 비껴갈 재간은 없었다. 권력이 덧없이 사라지면 ‘부귀영화’도 뿔뿔이 흩어진다.

다섯 왕조에 걸쳐 10여명의 황제를 보필한 재상 ‘풍도’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는 ‘권력은 유한하지만 나라는 영원해야 한다’고 했다. 재상 ‘풍도’의 정치 철학은 늘 후대의 연구대상이다.

참여정부에서 고위 관료를 지내고도 MB정부에서 다시 승승장구하는 공무원들이 세간의 화제이다. 한국경제호의 ‘합참사령관’격인 윤진식 청와대 정책실장의 롱런 비결은 무엇일까.

뛰어난 官運의 사나이…산자부 장관 인선
과천 관가는 떠들석했다. 신임 각료 명단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남자가 있었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 이었다.

“청와대에 출입하는 한 일간지 기자의 전화 연락을 받고 이미 장관 인선 소식을 알고 있기는 했어요. 분명한 점은 의표를 찌른 인사였다는 것입니다.” 윤진식 정책실장이 당시 참여정부 산업자원부 장관에 선임된 것은 공무원 사회를 술렁이게 했다.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 관료가 털어놓은 후일담이다.

그래서일까. 윤 장관 인선을 둘러싼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재정경제부 출신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남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불만이었다. 일부 관료들은 사석에서 ‘막말’도 서슴지 않을 정도였다.

분노를 날것 그대로 토했다. ‘지역 안배 차원의 인선’이라는 정치적인 해석도 꼬리를 물었다.

막판에 충청도(충주) 출신을 끼워 넣었다며 폄하했다. 윤 장관은 당시 이같이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산업자원부에 입성한다.

윤 장관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실세 장관 그룹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대선 수개월전만 해도, 그의 이름은 후보자 리스트에 없었다. 정치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는 유력 후보들이 득세했다.

참여정부는 민영화를 밀어붙여야 할 절박함이 덜했다. 재정경제부를 비롯한 경제부처들과의 정책조율도 수월하지 않았다. 지원사격도 신통치 않았다. 분주하게 뛰었으나 역부족이었다. 민주화 운동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참여정부 실세그룹들과도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정치 바람에 유력 후보들 잇달아 낙마
대선이 코앞이던 2002년 8월, 산자부 출신의 국공립대 총장이 과천 관가를 찾았다. 그는 당시 차기 산자부 장관 물망에 오르며 안팎의 주목을 끌었다.

국내 정치의 본향인 영남 출신에다, 최고 학부를 나왔다. 그리고 산자부의 요직도 두루 거친 ‘테크노크랏’이었다.

공무원들의 승진 코스로 알려진 ‘정권 인수위원회’ 출신의 엘리트였다. 그가 주최한 점심식사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벌써 인사를 했어야 하는데, 찾아오지 않는 인물들이 있다며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대선 승리는 불가항력의 ‘자연법칙’처럼 보였다.초대 장관은 따논 당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참여정부의 초대 산업자원부 장관직에 오르지 못한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패배와 더불어 그의 꿈도 사라졌다.
‘정몽준-노무현’ 연대는 또 다른 산자부 장관 후보의 부상을 불러왔다.
미국 변호사 출신의 법조인이었다.

“그가 초대 산업자원부 장관이 됐다면 산자부 관료 상당수가 아마도 혼쭐이 났을 거예요. 당시 무역위원회에서 민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섭섭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그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산자부 공무원의 전언이다.

하지만 정몽준 당시 국민통합21 대표는 노무현 후보 지지를 철회했다. 선거를 불과 하루 앞둔 때였다.

‘연정’은 허물어지고, 이 법조인의 산업자원부 장관의 꿈도 멀어진다. 당시 산자부에서는 가슴을 쓸어내린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두 명의 유력한 산자부 장관 후보는 이런 식으로 ‘분루’를 삼킨다. 두 사람 모두 최고학부를 나왔으며, 정치적 후원자들의 탄탄한 지지도 얻고 있었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당시 초대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선임된 이가 바로 윤진식 현 청와대 정책실장이다.
이회창 후보가 패배하면서 ‘입신양명’의 꿈을 접어야 했던 인물들은 차고 넘친다. 노무현 후보 진영에 ‘올인’을 했다 구설수에 오르며 게도 구럭도 모두 놓친 관료도 눈에 띈다.

윤 실장은 관운이 따르는 타입이다. 하지만 관운만으로 승승장구할 수 있을까.


강철은 두드릴수록 단련…시련의 산자부 시절
장관 시절은 말 그대로 ‘시련의 연속’이었다. 한전 민영화 문제를 비롯해 복잡한 현안들이 발목을 잡았다. 한전 발전 자회사간 상호 경쟁을 유도하고 운용의 효율성을 높여 매각한다는 것이 참여정부의 기본 구상이었다.

한국전력은 가스공사 등과 더불어 개혁의 성패를 좌우할 시금석이었다.
한전은 버거운 상대였다. 이 공기업은 자회사 매각 저지 총력전을 펼쳤다. 이 회사 노조는 물론 사장, 그리고 임원들까지 정부 방안을 공공연히 성토했다.

분할한 회사를 원상복구할 것을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다. 한전에 투입된 최고경영자들마저 민영화에 반대했다.

백약이 무효였다. 정보통신부와의 치열한 영역 다툼도 윤 장관의 임기 내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참여정부 내각의 떠오르는 스타 ‘진대제’ 정통부 장관은 당시 삼성전자 출신이라는 후광이 대단했다. 정통부는 산자부의 영역을 넘보았다. 정통부가 단지 IT를 담당하는 곳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산자부내 동요도 만만치 않았다. 핵폐기장 선정 문제도 걸려 있었다. 제갈공명이 다시 살아와도 풀기 어려운 난제들이 수두룩했다.

윤 장관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당시 윤 장관은 부지런히 뛰었다. 하지만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있었다.
바로 참여정부 실세들의 전폭적인 지지였다. 방사성 폐기물 후보지 주민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 그리고 한전노조는 국민의 정부 시절 분할한 자회사들을 원상회복시키라며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외풍을 막아줄 바람막이가 절실한 시기였다. 윤진식 정책실장은 참여정부 시절 마음고생이 많았다. 한전 민영화, 방사성 폐기장 부지 선정은 난제였다. 참여 정부가 똘똘뭉쳐 강단있게 밀어붙여도 힘이 부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학자 출신의 ‘브레인’ 들은 적전분열했다.

그들 스스로도 한전 민영화의 효과를 확신하지 못했다. 참여정부는 민영화를 밀어붙여야 할 절박함도 덜했다. 재정경제부를 비롯한 경제부처들과의 정책조율도 수월하지 않았다.

지원사격도 신통치 않았다. 당시 윤장관은 분주하게 뛰었으나 역부족이었다. 민주화운동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참여정부 실세 그룹들과도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바로 참여정부 실세들의 전폭적인 지지였다. 방사성 폐기물 후보지 주민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 외풍을 막아줄 바람막이가 절실한 시기였다.

산업대 총장 시절…은인자중의 묘를 배우다
“윤 장관이 산업대 총장으로 물러난 후 인터뷰를 한차례 요청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총장의 직분에 충실하고 싶다며 완곡히 거절을 하더군요.” 한 일간지 기자의 전언이다. 그는 2004년 4월 서울산업대 총장직에 부임한다.

윤 장관은 장관급인 서울산업대학교 총장 시절 ‘은인자중’했다.
언론 인터뷰도 가급적 자제했다. 총장시절, 산업자원부 사무관들과 아반떼 승용차 뒷자리에 타고 행사장으로 이동할 만큼 소탈하다는 평가를 받던 그는, 하지만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 캠프에 전격 합류한다.

참여정부 최고위급 관료의 ‘전향’은 두고두고 화제를 불렀다.
MB의 대학(고려대 경영학과) 후배인 그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 후 인수위원회의 경쟁력강화위원회 투자유치 TFT팀장, 부위원장을 맡으며 다시 화려하게 무대 전면에 등장한다. 이번에도 행운은 그의 편이었다.

“관운이라는 건 마치 주식투자와 같습니다. 내가 ‘몰빵’을 하면 주가는 곤두박질하고, 손절매한 종목은 꿈틀거리며 다시 살아나거든요.” 산자부에서 근무하다 지금은 민간기업으로 옮긴 전직 고위 관료가 털어놓은 푸념이다.

‘관운’이 있는 사람은 따로 있기 마련이라는 것.
당이 망하고 5대 10국 시절 이민족이 번갈아가며 중국을 지배하던 시절, ‘풍도’가 꼭 그랬다.

官運은 마치 주식투자와 같지만…
재상 ‘풍도’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당이 망하고, 북방의 기마민족들이 중원을 휘젓고 다니던 난세였다. 왕은 성을 버리고 패퇴했으며, 새로운 권력자는 성 밖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풍도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갈래였다.

사대부들과 더불어 ‘옥쇄’를 택하거나, 아니면 한때 왕의 신하이던 인물을 다시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풍도는 사대부들과 성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새로운 권력자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다섯 왕조에서 무려 10여명의 왕을 섬겼다.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하지만 왕조는 망해도 나라는 유지돼야 한다는 것이 풍도의 정치철학이었다. 최명길은 훗날 비슷한 말을 되뇌며 척사파 김상헌이 찢어버린 항복문서를 다시 붙인다.
윤진식 전 산자부 장관은 MB정부의 경제수석 비서관을 거쳐 최근 우리나라 경제 정책의 ‘합참의장’격인 청와대 정책실장에 부임했다.

주요 경제 현안이 불거질 때 장관들과 협의해 정책을 조율하는 역할이 윤 실장의 몫이다. 그는 저녁 이후에도 사무실로 복귀하는 경우가 많다는 후문이다.

체력이 달려 소파에 누워 업무지시를 내릴 정도로 ‘일벌레’로 알려졌다. 풍도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늘 ‘실리’를 좇았다. 한번 결정한 뒤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윤 진식 청와대 정책 실장의 별명은 ‘진돗개’이다.

부드러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한번 맡은 일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그가 참여정부 시절의 쓰라린 경험을 밑거름 삼아, 선진화의 깃발을 내건 현정부의 비전 현실에 얼마나 공헌할 수 있는지 관심을 모은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