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은 숨 가쁘게 격변하는 가운데 LG, SK, 삼성 등 주요 기업들이 특허분쟁에 휘말리고 있다. 이렇게 특허분쟁에 힘을 쏟다보니 정작 신성장동력 산업은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사이에 일본과 중국 기업들은 매섭게 성장하고 있어 순식간에 시장점유율과 경쟁력을 빼앗길 수 있는 상황이다.

“지금처럼 삼성과 LG가 특허문제로 소모적인 싸움을 한다면 결국 중국에 따라 잡히고 말 것이다”

지난 20일 이탈리아에서 열린 'IFA 글로벌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글로벌 시장조사 전문기관인 디스플레이서치의 폴 그레이 유럽 TV리서치 총괄은 위와 같이 말했다.

현재 OLED 특허를 놓고 삼성과 LG가, 자동차용 2차전지 특허를 놓고 SK와 LG가 다툼을 벌이는 등 국내 기업 간 특허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9월 LG디스플레이의 기술유출 의혹에 대해 삼성 디스플레이가 법적 대응에 나섰고, 이후 치고받는 소모전이 이어졌다. 최근 SK이노베이션과 LG화학이 벌이고 있는 자동차용 2차전지 특허분쟁도 예외는 아니다. LG화학은 지난 2011년 12월 SK이노베이션이 자사의 분리막 특허를 침해했다며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했고, SK 측도 LG의 분리막 특허가 무효임을 주장하며 특허청에 심판을 청구한 것이다.

이에 국내외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 간의 소모적인 분쟁에 휩싸여 있는 동안 해외 기업들의 기술개발로 한국을 앞질러 갈 것이다”고 말했다. 특히 2차전지, 디스플레이, 바이오 산업 등은 성장기에 있는 신성장 동력산업으로 초기시장 선점이 중요하다. 업계에서는 양산이 늦어 마켓 리더십을 놓치면 회복하기 어려다고 분석한다. 이 시점에서 국가 주도적으로 신성장동력 사업을 추진 중인 중국과, 풍부한 자금으로 활발하게 R&D투자를 진행 중인 일본기업들이 국내기업들을 위협하고 있다.

제살 깎아 먹는 국내기업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2009년 국내 기업 1000여 곳을 대상으로 특허분쟁 실태를 조사한 결과, 특허소송 등 지식재산권 분쟁 상대는 해외 기업(39.8%)보다 국내 기업(69.9%)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 간 소송은 시장을 선점하려는 목적이 대부분”이라며 “경쟁업체간의 시장 확보 경쟁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기업들은 주력 분야가 비슷하고, 서로의 기술활용 내용을 상세히 알기 때문에 이와 같은 특허소송의 사례가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한창 진행 중인 신성장동력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시장 선점을 위해 국내기업 간의 분쟁이 늘고 있다.

이러한 국내기업 간의 특허분쟁은 작년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의 기술 유출 공방전에서 크게 이슈화됐다. 삼성디스플레이(SD)와 LG디스플레이(LGD)의 기술 유출 공방의 시작은 지난해 7월 LGD가 SD의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기술을 빼돌린 혐의로 수사를 받으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사태가 점점 악화하자 지난 2월 정부가 중재에 나섰고, 이후 양사는 각각 1건씩의 소송을 자진 취하했고 실제로 실무 협상을 시작하면서 사실상 화해 모드에 돌입했다. 하지만 지난 9일 SD가 LGD의 OLED 패널 기술을 빼낸 혐의로 경찰로부터 압수수색을 받으면서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뿐만 아니다. SK이노베이션과 LG화학도 ‘제 살 깎아먹기’ 특허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특허분쟁은 지난 2011년 11월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이 자사의 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하며, 서울고등법원에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하며 시작됐다. SK이노베이션은 이에 반발해 곧바로 특허청에 LG화학이 보유한 특허에 대해 무효심판을 제기했다. 이에 특허법원은 “LG화학의 분리막 특허는 선행기술과 기술분야가 공통되고 그 구성이나 효과도 같아 선행기술과 대비할 때 신규성이 없다”며 SK이노베이션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LG화학 측은 “기술의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즉각 상급 기관인 대법원에 상고하겠다”고 말해 소송이 꼬여만 가고 있다.

이러한 소모적인 분쟁에서 양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다는 게 일반적인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김영우 HMC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디스플레이와 2차전기 같은 신성장 기술은 이슈로 성장하는 산업이기 때문에 논란이 장기화 될수록 소송전에서 이기더라도 얻는 것이 별로 없다”고 설명했다.

독하게 쫓아오는 중국

최근 중국의 국가경쟁력이 급상승하면서 과학기술 측면에서도 한국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의 R&D 투자 규모는 2010년 기준 1043억 달러로, 한국(380억달러)의 3배에 육박했고 특허출원 건수도 39만 건으로 한국(17만건)의 2배, 국제학술논문(SCI)급 논문은 14만 편으로 4배에 달했다. 특히 차세대 중점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중국이 한국을 맹추격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한·중 과학기술 경쟁력 비교와 시사점’ 보고서에서 따르면 최근 2년간 전자 정보 통신 바이오 등을 포함한 7개 중점과학기술분야에서 한국과의 기술격차를 크게 줄었고 이 중 5개 분야에서 한국보다 기술경쟁력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특히 한국업체와 일본업체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한 OLED 사업은 정부 정부의 지원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OLED를 전략적 기술산업으로 채택하고, 2011년에는 COIA(China OLED Industry Alliance)를 설립해 중국 업체들 간의 OLED 관련 정보 및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최근 8세대 OLED 라인을 건설 중인 비오이(BOE)도 COIA에 참여한 기업 중 하나였다.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중국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투자가 현실로 드러나자 국내기업의 독주체제에도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자금 여력이 충분한 중국이 삽시간에 시장을 차지할 수 있는 성장성과 OLED TV 가격을 현재 LED TV 수준까지 낮출 수 있는 생산능력에 견제하는 상황이다.

자동차 2차전지도 마찬가지다. 중국정부는 국유기업 연합 프로젝트로 2차전지 사업에 2020년까지 1천억 위안을 투자할 계획이다. 특히 리튬이온전지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선정하고 중국은 전기차에 탑재되는 전지는 중국 현지에서 생산한다는 기본 방침을 세웠다. 이러한 중국정부의 노력으로 전지산업에 원가 경쟁력을 갖추고 대규모 증설 및 생산을 시작했다. 2차 전지산업에서 국내 업체들에 뒤처진 것을 단번에 뒤집어보겠다는 전략이다. 최근에는 중국의 전기차 배터리 업체인 BYD가 네덜란드에 전기차 버스를 수출하는 등 기술력이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엔저와 기술력이 만나 되살아나는 일본

엔저 배경으로 일본 기업들이 부활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파산을 피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나오는 혁신적 시도와 전년 대비 22%로나 떨어진 엔화가치로 전반적인 일본 사업이 살아났다. 특히 에너지, 환경, 건강, 디스플레이와 같은 신성장산업 부문에서도 대외적인 호재에 수출 경쟁력이 더욱 향상될 것으로 예상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을 호령했던 일본기업들은 국내업체에 1·2위를 내준 충격을 차츰 추스르면서 본격적인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해 소니, 도시바, 히타치는 디스플레이 패널 사업부를 통합한 재팬 디스플레이(Japan Display Inc)는 삼성에 이어 중소형 패널 시장점유율에서 2위를 차지했다. 또한 2013년 매출을 전년 대비 40~60% 높인 7000~8000억엔으로 인상하면서 강한 자신감도 내비쳤다. 또한 지난 1월 미국에서 열린 CES에서 소니는 국내업체들이 지금껏 내놨던 55인치 OLED TV보다도 무려 4배나 화질이 좋은 제품을 내놓기도 했다. 지금까지 삼성과 LG가 디스플레이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서 있었지만, 소니의 반격으로 작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업계 관계자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했을 때 중국 업체보다 일본이 훨씬 한국에 가까이 와있다는 느낌”이라며, “대형뿐만 아니라 중소형에서도 결코 쉽지 않은 게임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2차전지도 일본기업의 거센 반격이 시작됐다. 도요타 사태를 겪으며 흔들렸던 일본은 친환경자동차와 자동차 2차전지를 통해 자동차 산업에 대한 주도권을 노리고 있다. 최근에는 정교한 기술력과 엔화약세로 인한 가격경쟁력으로 국내업체를 바짝 뒤쫓고 있는 형세다. 일본은 2차전지의 4대 핵심 소재인 양극재, 음극재, 전해질, 분리막의 세계 시장을 70% 이상 장악할 만큼 높은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다. 여기에 약화약세로 전기차 가격의 3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전기차 배터리가격을 지금보다 내려 향후 시장점유율을 높일 계획이다. 특히 전기자동차가 장기성장 시장이라는 방향성이 크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일본정부도 보조금 지급, 세금 감면 등 직접 지원으로 2차 전지를 육성하고 있다.

치킨게임에 잃어버리는 미래 먹거리

최근 세계 각국은 미래 육성 산업을 놓고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 중이다. 이에 자동차, TV 등 연관 효과가 높은 거대 산업의 패러다임이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시기에 정부의 시장 창출능력, 기술력 갖춘 업체, 업체 간의 짝짓기가 성공적인 전환의 핵심적인 요인으로 지목됐다.

특히 글로벌 경영환경이 크게 변하면서 기업 간의 생존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더욱이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무역주의와 정부지원이 널리 퍼지면서 시장 확대와 해외진출이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기업간의 분쟁은 해외 경쟁사에게 추격의 빌미를 줄 가능성이 크다. 수년간의 소송 끝에 모든 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핵심기술자들이 소송에 참여하는 등 제품개발이 소홀해져 결국 시장 경쟁에서 밀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2차 전지와 같이 한 국가의 주력 산업으로 그 자체가 막대한 매출을 일으키고 수많은 협력 업체까지 먹여 살리는 기간 산업에서 자칫 경쟁력 강화 타이밍을 놓친다면 국가적으로 막대한 손실이 예상된다. 2차전지는 앞으로 크게 성장할 전기자동차, 신재생에너지, 스마트 그리드까지 신성장 동력 산업의 핵심 요소다.

특히 침체된 순수 전기차 대신 플러그인하이브리드 자동차(PHEV : Plug-in Hybrid Electric Vehicle)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자동차 2차전지에 대한 시장의 전망이 밝아진 상황이다. 전기차 시장도 2015년에는 298만대, 2020년에는 805만대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SK와 LG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양사가 특허분쟁에 힘을 쏟으면서, 정작 두 회사가 신 성장동력으로 삼은 전기차 배터리 사업은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김영우 HMC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2차전지 사용시간 등 성능 개선, 코발트•리튬 등 원자재 안정적 확보라는 과제가 산적한데다, 소재 등 기술의 국산화율도 20% 수준으로 선두를 유지하기엔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상황”고 말했다. 이에 ‘안전성 강화 분리막’ 특허소송에서 이긴 SK이노베이션 관계자도 “서로간의 발목잡기식 경쟁보다 선의의 경쟁 통해 글로벌 시장 공략 해야 한다”고 전했다.

글로벌 시장은 숨 가쁘게 격변한다. LG, SK, 삼성 등 주요 기업들의 시장 주도권도 순식간에 후발 업체에 빼앗길 수 있다. 김 애널리스트는 “국내기업간의 싸움이 이어가는 동안 일본과 중국 업체들이 힘을 키우고 있다”며, “진짜 경쟁자들은 바깥에서 국내 기업을 위협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