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법 회장이 뿔났다?’
지난 8월 모일.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금호아시아나그룹 본사 27층의 그룹 회장실에서 박찬법 회장의 고성이 새어나왔다.

그룹 계열사 한곳이 입찰 로비 사건에 연루돼 본사가 압수수색당하고 관련자가 소환되는 등 그룹의 이미지에 적잖은 타격을 입히자 그룹 관계자들에게 크게 호통친 것이다.

평소에 온화하고 부드럽기로 소문난 박 회장이 왜 이토록 화가 났을까?

“전문경영인이다 보니 오너경영자에 비해 책임의식이 더 강하신 것 같다”는 그룹 관계자의 말에서 그 정답을 찾을 만하다.

아무래도 ‘형제분쟁’의 진통을 벗어나 그룹을 리모델링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지 2주도 채 안 돼 ‘악재’가 발생하자 그룹 총수로서 실망과 함께 큰 책임감을 느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 재계사에서는 금호의 박찬법 회장처럼 위기에 빠진 재벌가를 구하기 위해 오너경영자의 뒤를 이어 등장한 전문경영인들이 종종 있어왔다. SK그룹의 손길승 전 회장이 그러했고 지난해 이건희 전 회장의 뒤를 이어 삼성그룹을 대변하고 있는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의 경우도 그렇다.

재계의 ‘구원투수’로 통하는 전문경영인 그룹 총수들. 과연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고 또한 입지를 굳혀왔을까.

“앞으로 실적으로 시장과 대화를 하겠습니다.”
지난달 30일 취임식에서 박삼구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구원투수’로 등장한 박찬법 회장이 밝힌 포부다.

최근 금호그룹은 이처럼 형제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벌가의 단골 얘깃거리가 된 ‘형제의 난’을 겪은 신규(?) 기업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에서는 전문경영인을 그룹의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올린 또 하나의 기업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따라서 재계는 지난 1998년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의 타계 이후 2004년 최태원 회장이 그룹 전면에 나서기까지 ‘SK 마운드’를 책임지며 구원투수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던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과 연관시켜 박찬법 회장이 ‘제2의 손길승’이 될 수 있을 것인가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선발투수’ 박삼구와 ‘구원투수’ 박찬법

팀의 승리를 견인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선발투수와 구원투수의 호흡은 상당히 중요하다. 기업경영 측면으로 따져볼 때 경영권을 넘기는 선임자와 경영권을 넘겨받는 후임자 간 ‘자연스러운 연결’이 이뤄져야 한다는 말이다.

자칫 리더십 부재 상황을 겪어 그룹 전반적으로 ‘경영공백’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금호그룹의 ‘투수교체’는 그나마 잘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딜로이트컨설팅의 김경준 부사장은 “가족 내 갈등으로 경영안정성이 훼손되었을 때 위기관리 능력을 가진 제3자를 선임해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좋은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우선 금호그룹에서 최근까지 선발투수 역할을 해온 이는 박삼구 명예회장이다. 그동안 그는 대우건설, 대한통운 등 거물급 M&A를 성사시킨 것을 토대로 한때 ‘M&A계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며 10위권 밖의 금호그룹을 재계 순위 7위까지 끌어올렸다.

비록 동생인 박찬구 전 화학부문 회장과의 분쟁으로 위기 상황에 처한 후, ‘금호 마운드’를 박찬법 회장에게 넘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의 영향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선발투수인 박 명예회장에게 공을 넘겨받은 ‘구원투수’ 박찬법 회장은 박 명예회장과의 ‘호흡’이 잘 맞다는 점이 최대의 강점이다.

박 명예회장과 1945년생 동갑내기인 그는 IMF 외환위기 시절, 박 명예회장과 아시아나항공 사장과 부사장으로 각각 있으면서 그를 도와 그룹의 힘든 시기를 극복해낸 바 있다.

또한 그는 금호에서만 40여년을 지낸 ‘정통 금호맨’으로, 창업주인 고 박인천 회장에서부터 최근 박삼구 회장까지 총 4명의 회장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특유의 성실함과 합리적인 판단으로 회장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왔고 그룹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좋은 평판을 갖고 있다.

금호에 과장으로 입사해 회장까지 오른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흔히 야구계로 말하는 ‘연습생 신화’를 일으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경영능력 역시 이미 검증됐다는 의견이 많다. 홍콩, 미주 등 여러 국외 지사를 거치며 그룹 내 최고 ‘영업통’으로 불리는 데다 아시아나항공 출범 2년 뒤부터 줄곧 아시아나에서 일한 ‘항공 전문가’로도 꼽힌다.

특히 1990년대 후반 아시아나항공을 흑자로 전환시킨 일등공신으로도 평가받는다. 경영스타일로는 목표에 대한 추진력이 강하고 동시에 겸손하고 부드러운 리더십의 소유자로 통한다.

이 같은 이유로 그룹 내부에서는 선발과 구원투수 간 ‘콤비플레이’가 괜찮은 상황에서 구원투수 역시 전문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제2의 손길승’과 같은 역할은 충분히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구원투수의 부족한 ‘워밍업’이 문제점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투수가 충분히 불펜에서 예비투구를 한 다음에 마운드에 올라야 하는데, 박찬법 회장의 경우 오너 경영체제에서 갑작스럽게 두 형제 회장이 물러나면서 경영권을 책임지게 됐다는 것.

이로 인해 채권단과의 재무구조개선약정 이행 외에 그룹 체질을 개선할 정도의 힘이 과연 그에게 있을까 하는 것에 의문이 생긴다는 논리다.

어찌됐건 박찬법 회장이 일단 구원투수로 금호 마운드에 오른 만큼, 향후 관심은 박 회장이 금호를 둘러싸고 얽혀 있는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갈까에 쏠리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숙제는 금호그룹을 유동성 위기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도록 해야 하며 이를 위해 구조조정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박 회장 역시 이 부분을 크게 염두에 두고 있는 눈치다. 취임 직후 “구조조정 속도를 높여 조기에 완벽히 마무리하고 그룹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하겠다”고 밝힌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박 회장은 대우건설 인수로 유동성 문제가 불거진 만큼 산업은행 등 채권단과의 재무구조 개선약정에 따라 대우건설을 재매각하고 추가 자금을 확보해 4조원대 풋백옵션(대우건설 인수에 참여한 투자자들의 주식을 금호가 되사주기로 한 계약)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과제도 안고 있다.

구조조정 매듭짓고 유동성 위기 넘겨야 ‘승리’

물론 이 과정에서는 큰 걸림돌이 하나 더 있다. 박찬구 전 회장의 반발로 분쟁에 또다시 휘말리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는 것인데, 박 회장이 금호석유화학과 박 전 회장의 아들 박준경 부장이 있는 금호타이어 등 ‘박찬구 체제’였던 계열사를 제대로 장악할 수 있느냐가 향후 구원투수로의 역할 부분에 깊게 관여할 것으로 보인다.

박 회장이 “구조조정 의사결정에 금호석유화학의 역할이 중요한데 의견을 달리하면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 것도 이와 연관이 깊다.

원활한 구조조정과 함께 대우건설과 금호생명을 매각하는 일도 박 회장으로선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유동성 위기 극복의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인데, 실제 박 회장은 취임 직후 첫 대외 일정으로 ‘대우건설 챙기기’에 나서며 이 부분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지난 3일 인천 송도 국제업무단지에서 열린 쉐라톤인천호텔 개장식에 김봉구 금호리조트 사장, 서종욱 대우건설 사장 등과 함께 참석한 행보로 쉐라톤호텔은 대우건설이 지분 100%를 갖고 있는 곳이기에 매각이 진행 중인 대우건설이 팔릴 경우 함께 팔려나갈 가능성이 높다.

이 밖에 전문경영인으로서 대주주와의 원만한 관계를 상시 유지해야 한다는 점도 박 회장이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비록 박 명예회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회장 자리에 올랐지만 박 명예회장이 여전히 주요 계열사의 대표이사로 있는 이상 박 회장이 자기 목소리를 내다 박 명예회장과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박 회장 역시 대주주와의 역할 분담과 관련해 “통상 그룹의 모든 임무는 그룹 회장의 책임하에 추진된다.

다만 재무구조개선 약정 내용에 대주주로서의 의무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그것은 명예회장이 끝까지 책임지고 마무리 짓겠다 했고, 그리 될 것이다”고 말한 것도 이런 뉘앙스를 풍기게 한다.

한편 박 회장의 역할 부분에 대해서는 ‘3세 경영’을 연결시켜 주기 위한 ‘중간 계투’ 역할에 그치지 않겠냐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비록 박 명예회장이 “박찬법 회장에게는 65세 룰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밝혀 꽤 오랜 기간 그룹 수장을 맡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기는 했지만, 전문경영인 체제는 오너 2대에서 3대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기에 존재한 경우가 그동안 많았다.

따라서 현재 금호그룹의 3세들 중 가장 유력한 차기 경영권 승계 후보자로 꼽히는 박 명예회장의 아들 박세창 상무의 올해 나이가 만 34세인 점을 감안할 때, 박 상무가 언제고 경영수업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그룹 전면에 나서는 시기가 되면 박찬법 회장은 자연스럽게 물러날 것이라는 시각이 대세다.

김진욱 기자 action@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