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에 선 임동확 시인


처음 안좌도 읍동항에 들어가던 석양녘, 잔물결마다 반짝이는 수천수만의 황금빛 편린들을 보면서 그의 점화(點畵) 세계의 비밀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아주 미세하고 희미할지라도 차이와 다름을 가짐으로서만이 모든 사물들은 자기다움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걸 집약시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수화 김환기의 그림들이라고 생각한 바 있다.

젊은 날, 내륙 태생으로서 막연히 바다를 동경해온 나는 남해안과 서남해안의 모든 섬을 순례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운 적이 있다.

첫 방문지는 거문도. 거기서 나는 푸르디푸른 바닷물과 하늘을 배경으로 보이는 하얀 등대. 칠흑의 바다를 지키는 외로운 등대의 불빛과 쏟아질 듯 반짝이는 남국의 별들과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내 마음의 중심을 차지했던 것은 안좌도. 그중에서도 수화(樹話) 김환기의 고향 앞바다였다.

남도 섬 기행에 나선 캐나다 출신 사라(가운데)씨 일행과 만난 시인


나는 처음 안좌도 읍동항에 들어가던 석양녘, 잔물결마다 반짝이는 수천수만의 황금빛 편린들을 보면서 그의 점화(點畵) 세계의 비밀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아주 미세하고 희미할지라도 차이와 다름을 가짐으로서만이 모든 사물들은 자기다움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걸 집약시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수화 김환기의 그림들이라고 생각한 바 있다.

다시 그걸 확인이라도 하듯 나로선 두 번째가 되는 안좌도행. 연신 여객선의 뱃머리를 부딪쳐오는 파도도 이미 그 파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배 뒷전을 따라붙은 하얀 물거품들도 단 한번이라도 똑같은 질량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바로 그것이 우주 생성의 첫째 가는 비밀이라고 말하는 듯 순식간에 저만큼 떠밀려 간다.

그렇듯 언제든 자신의 흔적을 지우며 보다 큰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던 수화의 일생을 통해, 나는 진정한 예술가의 조건이 무엇인가 가만 되묻는다.

하지만 그걸 알 턱이 없는 캐나다 여성 사라(27) 양이 여객선 난간에서 《최북극(Far North pole)》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다가 서남해안에서 가볼 만한 섬이 어디냐고 묻는다.

대답 대신 나는 비금도 해변에서 일광욕하며 민박할 예정이라는 그녀의 푸른 눈을 들여다본다.

수화 김환기 생가


그녀는 왜 자신의 땅과 먼 거리에 있는 이 바다와 섬으로 찾아든 것일까. 그러면서 왜 남쪽 바다와 가장 멀리 떨어진 북극에 관한 책을 배 난간에 기대어 앉아 읽고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화 김환기는 이 바다, 이 섬들에서 더욱 멀어지고자 했을까. 끊임없이 탈향(脫鄕)을 시도하며 도쿄와 서울, 파리와 뉴욕으로 떠돌았을까.

나는 일차적으로 그것이 모더니스트이고자 했던 그의 작가적 행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 본다.

예컨대 아방가르드 연구소를 조직하거나 신미술 운동에의 참여는, 되도록 한 종족의 기억이나 역사적 전통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일 수밖에 없다.

그가 불법 체류자의 신분을 감수하면서까지 뉴욕에서 활동한 것은, 자신이 속한 문명보다 더 진보적이고 화려한 신세계로 탈주하고자 했던 모더니스트의 열망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수화 김환기는 어떤 면에서 엄청난 욕심쟁이였다고 할 수 있다. 화가로서 한국사회에서 쌓은 일체의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세계 미술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미술적 역량을 확인하려 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예술가적 욕망은 자기 몫을 키우거나 과시하려는 욕망이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자기가 가진 것을 덜어내고 나눠주는 자발적인 가난과 연결되어 있다.

침묵과 절제, 겸손과 양보가 바탕이 된 순수한 빈자의 욕망이 바로 예술가의 욕망인 셈이다. 내가 보는 그의 그림세계는 단연 그런 예술가적 가난의 산물이다.

나는 그의 색점화 속에서 어느 순간 말하기보다 침묵을, 의도하기보다 놓아두기를 지향하는 그의 자발적 가난 또는 가난의 미학과 만난다.

수천수만의 물방울 같은 색점들이 화면 가득히 등장하는 그의 그림들 속에서 마주친 세계를 재현하겠다는 표상과 형상을 여윈 가난의 마음이 지나간 흔적들을 본다.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를 그친 욕망 아닌 욕망. 그럼에도 끊임없이 말하기를 그칠 수 없는, 순수한 생의 유희로서의 욕망.

분명 욕망이되 전혀 욕망 같지 않는 욕망이 바로 참된 예술가의 욕망이자 수화 김환기의 욕망임을 확인한다.

그가 남긴 작가노트 역시 이를 증거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린다. 생각한다면 친구들 그것도 죽어버린 친구들, 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친구들뿐이다. 서러운 생각으로 그리지만 결과는 아름다운 명랑한 그림이 되기를 바란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리다니! 그러나 그것은 글자 그대로 아무렇게나 그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예술가적 야심과 야망이 아닌 무심과 무욕의 운필(運筆)을 뜻한다. 개별적인 형상을 넘어 무한히 이어지는 생명의 그물코, 생성의 인드라망을 포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온갖 계산과 이해관계가 뒤얽힌 냉혹한 자본의 세계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우정이 살아 있는 세계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기에 서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그림들이 아름다우며 명랑하기를 바란다.

또한 그것들이 새로운 세상과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배반하는,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적 좌절과 실패에서 오는 설움과 한의 감정에 매몰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슬픔과 결핍의 세계 그 자체에 머물지 않은, 신명과 결합된 환상적이고 심미적인 그림들을 꿈꾼다.

김환기작 <어디서 무엇이되어 다시 만나리>


널리 알려진 대로 그의 그런 간절한 소망의 결정판은 한국일보사가 침체된 한국미술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주최한 공모전에 젊은 작가나 제자들과 동일한 조건 속에서 응모했다가 대상을 수상한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끊임없이 고향을 그리워했던 망향(望鄕)의 작가이면서도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망향(忘鄕)의 작가 수화 김환기에게 우리가 남긴 유산은 바로 그것이리라.

그는 가장 멀고 긴 우회로를 통해, 가장 풍부하고도 깊은 고향의 이미지를 재창조하는데 성공했다.

지역과 인종, 계층과 국적,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지닌 모든 장벽을 허물어버리는 아방가르드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시로 이성과 의식의 표면을 뚫고 나오는, 그러나 영원히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캄캄한 무의식.

애써 감추고 억압하려 했던 것들과 정면대결을 통해 자신의 고향 바다를 우주적 고향으로 승화시켜 갔다. 허이데거의 말대로 “고향을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낯선 타자들”, 즉 서양 현대미술이었던 것이다.

안좌도 가는 길목서 만난 등대


그러니까 수화 김환기가 멀고 낯선 이국땅에서 뜻밖에 발견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순수한 조형미를 창출할 수 있다는 서구 추상미술과의 접촉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는 노자적 침묵의 세계였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물의 배후에 숨어 가려진 장자적 허정(虛靜)의 세계였다. 무궁한 생성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여백.

이미지를 넘어선 이미지(象外之象)와의 만남이었다. 나는 그것을 어느 날 갑자기 그의 그림 속에서 사라진 형상 대신 등장한 무수한 그의 색점들에서 본다.

그의 색점들은 구체적 자연에 의탁하지 않고도 뭔가를 표현할 수 있다는 직관과 감응의 세계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외물(外物)에 끌려 다니거나 현혹되는 것을 경계했던 동아시아들의 삶의 태도. 굳이 형상을 그리지 않고도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할 수 없다는 불교적인 침묵과 닮아 있다.

서구 작가들의 색점 또는 색면들이 다른 것들과 엄격한 구분과 경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오히려 그의 색점화들은 언제든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 자세가 되어 있는 물방울과도 같다.

서구의 추상화가 근본적으로 타자를 적대시하고 배척해 온 사유체계의 반영이라면, 수화의 점화들은 타자들과 언제든 친화하고 공존할 자세가 되어 있는 동아시아인 또는 한국인의 심성을 닮아 있다.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의 점화 속의 소용돌이는 또 어떤가.
한때 나는 그것이 급속하고도 종종 격동적인 세계 제일의 현대 도시 뉴욕생활에서 오는 현기증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 바 있다.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기꺼이 그 세계적 도시의 리듬과 율동에 적응해 가는 과정 속에서 얻는 소용돌이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우연히 파블로 네루다의 시 〈시>를 떠올리면서 나는 나의 생각을 바꾼 바 있다. 그 소용돌이는 필시 수화가 무심히 색점들을 찍어가는 도중에 문득 찾아온 마음의 고양 또는 우주와의 일체감과 관계되어 있다고.

“…전략…

그리고 나, 이 미약한 존재는
그 커다란 공허에 취해
신비의 모습 그대로
별이 총총한 허공에 도취되어
나 자신 어느 심연의
순수한 일부가 되어 있는 것을 느꼈지요.”

김환기 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안좌도가 낳은 세계적 화가에 대한 경의일까. 아니면 일종의 유행인 지역 브랜드화의 연장선상일까.

서둘러 목포 북항으로 향하는 농협배 안. 수화 김환기 그림들이 선실의 벽과 천장, 그리고 선장실 밖을 장식하고 있다.

서울 부암동 소재 ‘환기미술관’이 있다지만, 진품 유작 하나 없는 생가 방문의 서운함이 조금 가신다. 이렇게나마 전문가들만이 아닌, 일반인들에 그의 미술세계가 알려지는 것도 차차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듯 우린 화려하거나 이름 없거나 간에 저마다의 안좌도. 제각기 다른 한 세계를 고집하고 옹호하면서도 홀로 고립되어 반짝이지 않는 자기만의 빗방울.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저만의 바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하나의 중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설령 빠르거나 느리거나 간에 우리는 그 어떤 식으로든 귀향길에 들어서고 있다.

마치 엄마 곁에 자던 아이가 한밤중에 무심히 제 어미의 젖꼭지를 물듯이 자신도 모르게 고향의 기억에 입술을 대고 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금세 큰 바다와 한 몸이 되어버린 빗방울 하나하나가 그 나름의 존재 의의를 갖는 것이라면 살아 있는 날들의 허무와 불안, 방랑과 좌절은 한낱 엄살.

순식간에 바닷물과 뒤섞여 그 존재감을 잃어버리는 무수한 빗방울들이 하나의 색점이 되어 영원한 현재의 시간을 호흡하고 있다면, 그걸 아쉬워하거나 애달파하는 건 일종의 난센스가 아닐 것인가.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여름비의 바닷속에서 나는 자신의 작품과 홀로 맞대면하며 무한대의 고독감을 맛보았을 수화를 생각한다. 낱낱의 빗방울 또는 모든 잔물결 같은 그의 색면들 속에 살아 숨쉬고 있을 전체. 마침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게 될 광대무변한 불멸의 바다를 훔쳐본다.

임동확 시인 ▲1959년 광주 출생 ▲전남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87년 시집 《매장시편》으로 등단, ▲시집 《살아 있는 날들의 비망록》(1990), 《운주사 가는 길》(1992) 《벽을 문으로》(1994) 《처음 사랑을 느꼈다》(1998) 등을 펴냈다. 편저로 《꿈, 어떤 맑은 날》, 《한승원 삶과 문학》 등 다수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및 계간 《작가》 편집위원 ▲한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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