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전 꽃살문에 모란·연꽃 활짝…돌계단 숲길은 개상사화도

꽃이 피어난다. 아름다운 모란과 연꽃이 사시사철 화사한 꽃을 피운다.

사분합문살 화병에서 시작된 꽃은 잎사귀, 줄기와 가지채로 힘차게 뻗어 올랐다.
그리고 사바세계와 부처세계를 이어주는 피안의 길문이 되어 대중들의 기쁨과 슬픔을 어루만진다.

단아하게 자리 잡은 꽃잎을 더듬어보고 향기를 맡아본다. 조심스런 대중의 손끝에 천년의 세월을 잠들었던 꽃들이 깨어나 향기를 내뿜는다.

긴 장마가 끝을 보이고 있다. 하늘은 푸른빛을 다시 찾았고 뭉게구름 사이로 햇살이 따갑게 쏟아지고 있다.

산과 들, 피서지를 달궜던 인파도 이번 주말을 고비로 한풀 꺾일 게 뻔하다. 이제 차분히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다.

그럴 때에는 조용한 절집을 찾아 마음을 추스리며 새로운 일상을 설계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것도 천년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절집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지난 주말 천년의 꽃을 찾아 강화도로 향했다. 초지대교를 지나 해안도로를 달렸다. 서해바다를 향해 펼쳐진 넉넉한 갯벌에는 먹잇감을 찾아나선 갈매기들의 날갯짓이 힘차고 수많은 바다생물들의 움직임이 생생하다.

해안도로를 따라 함허동천을 지나 2km쯤 달리자 정수사를 알리는 커다란 돌비석이 나왔다.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의 마니산 기슭에 자리한 정수사(淨水寺)는 보물로 지정된 꽃살문을 달고 있는 절집이다.

입구부터 절집까지는 1km 남짓, 걷기에 충분한 거리다. 자동차로 바로 올라갈 수 있지만 길이 좁아 차 두 대가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난감한 일이 벌어진다.

‘힘이 드는 만큼 보람도 크다’라는 말이 있듯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절집의 운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헉~헉 깊은 숨을 쉬며 산길을 오르지만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깊은 숲의 맑은 기운에 온몸에 쌓인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듯 개운하다.

30여분을 오르자 활엽수 울창한 숲길을 따라 절집 마당으로 통하는 운치 있는 돌계단이 나왔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면 마니산 자락에 살짝 걸터앉은 정수사 담장 너머로 대웅보전(보물161호)이 눈에 들어온다.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년)에 회정대사가 마니산 참성단을 참배한 후 세웠다 전해진다. 지금 남아 있는 사찰은 무학대사의 제자로 차의 달인인 함허대사가 조선 세종8년(1426년)에 중창했다.

정수사 대웅보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살문을 가지고 있다.

사찰의 꽃살문 중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꼽히는 부안 내소사 대웅전의 꽃살문에 결코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내리쬐는 햇살을 받은 대웅보전 문살 한편에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꽃살문은 이채롭게도 꽃이 꽂힌 꽃병을 투각했다. 꽃병으로부터 화사한 꽃들이 피어 나간 모양이 일품이다.

꽃무늬뿐만 아니라 꽃나무를 통째로 새겨 문을 짰다. 연꽃이나 모란꽃들을 앞사귀, 줄기와 가지채로 길게 새겨 올린 것이 보다 살아 있는 듯 자연스럽다. 활짝 핀 꽃들은 담백하고 청초하며 깔끔한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서울에서 왔다는 한 신도는 “실제 피어나는 모란꽃을 보는 것처럼 정교하게 조각돼 있어 그 자체로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이라며 감탄했다.

더욱이 백자꽃병에 꽃꽂이 형태의 꾸밈으로 눈길을 끈다. 이는 불상을 생화로 장식하거나 금은보화로 만든 조화를 불상의 머리 위에 매달아 장식하는 꽃장식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천년의 꽃향기에 취했다면 이젠 맛에 취할 때다. 대웅보전 왼쪽에는 약수터가 있다.
함허대사가 경내에서 솟는 맑은 약수로 노상 차를 우려 마시며 서해 앞바다를 관조해 황홀한 선정삼매에 빠져들곤 했다고 전해지는 그 약수다.

작은 바가지로 한 모금을 떠서 마시자 한순간에 더위가 사라질 정도로 시원함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약수 한 모금에 함허대사가 내려다본 곳을 바라보니 탁 트인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 아래로는 감색의 갯벌이, 갯벌 너머로는 부푼 배처럼 둥근 바다가 펼쳐진다. 산과 바다와 절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수사에는 꽃살문의 꽃 말고도 또 하나의 꽃이 있다.

입구 돌계단 양쪽 숲에서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는 개상사화(노랑상사화)다. 개상사화는 4월 초쯤에 나온 잎이 5월 말쯤 없어지고 8월 말에서 9월 초 사이에 잎 없이 꽃대만 올라와 꽃을 피운다.

상사화는 잎이 있을 땐 꽃이 없고 꽃이 있을 땐 잎이 없어 꽃과 잎이 서로를 그리워하고 생각만 한다고 해 상사화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아직 이른 시기라 개상사화 군락지에는 한 가닥 위태로운 꽃대에 봉우리만 맺혀 있지만 9월 중순경에 찾으면 절집을 노랗게 물들인 개상사화와 천년의 꽃살문이 뿜어내는 향기에 흠뻑 취해볼 수 있다.

정수사에서 산길 계곡을 따라 20여분 내려가면 함허동천이 나온다.
함허대사가 수도했다고 해서 그의 당호를 따 ‘함허동천’이라 불리는 곳이다.

계곡의 너럭바위에는 그가 썼다는 ‘함허동천’ 네 글자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뜻이란다.

함허동천으로 향하는 길, 청명한 숲 내음과 함께 온몸 구석구석에서 아름다운 천년의 꽃향기가 피어나는 듯하다.

◇여행메모

가는 길
서울에서 김포제방도로와 김포시내를 지나 강화대교를 건넌 뒤 곧바로 좌회전을 하거나, 강화대교를 가기 전 초지대교 방향으로 가도 된다. 대곶과 초지대교를 건너 해안도로를 타고 광성보와 초지진을 지나 함허동천 입구에서 2km 정도 더 가면 된다. 032-937-3611

볼거리
강화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갯벌인 동막해변을 빼놓을 수 없다. 갯벌체험과 해수욕으로 막바지 피서를 즐길만 하다.
조선 숙종 때 뱃길 보호를 위해 쌓은 강화 최남단 분오리 돈대의 일몰도 환상적이다. 또 아늑한 숲을 이룬 천년고찰 전등사,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마니산 참성단, 해수관음도량 보문사가 있는 석모도 등이 있다.


키워드

#여행 #정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