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1주년을 맞은 아시아경제신문이 창간테마인 ‘백두대간의 혼을 깨워라’를 주제로 서울시 국악관현악단과 함께 다음달 2일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회를 개최한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인 이생강 대금명인이 ‘죽향’을 연주하고 가야금 명인 백인영 중앙대 교수가 아쟁협주곡 ‘선(The Line)2’를 선보인다.
또 ‘국악과 오페라의 만남’ 순서에서는 소프라노 송혜영 씨가 세빌리아 이발사 중 ‘방금 들린 그대 음성’ 등을 선보인다.(1544-1555)

‘무불통달’의 피리 가락 근심·걱정 풀러 오시라
대금산조 최고 명인 이생강 선생

대금산조의 최고 명인 죽향(竹鄕) 이생강(72·중요무형문화재45호) 선생의 연주를 듣노라면 적(敵)들이 살기(殺氣)를 버리고, 죽을병에 걸린 환자도 그 선율에서 삶의 의지를 되찾고, 하늘마저도 감탄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금뿐 아니라 단소, 소금, 퉁소, 태평소, 쌍피리, 서양피리까지 못 부는 피리가 없을 정도. 그의 호(號)는 죽향(竹鄕)이다. 대나무가 제대로 있다는 뜻, 원래 있을 곳인 향(鄕)에 제대로 서 있어 본연의 소리를 낸다는 의미를 가진다.

스승이자 대금명인 한주환 선생이 손수 지어주신 이름이다. 그가 대(竹)소리에 이렇게 심취한 까닭이 무엇일까. 이 명인은 자신이 일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적 소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고 말한다.

“내가 일본에서 태어났어. 아버지가 고향소리가 그립다며 나무를 끊어다가 직접 피리를 만드셨어. 그래서 어릴 때부터 피리를 불고 듣고 그랬지.”

해방이 되자 9세 소년이었던 이 명인은 가족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곧 6·25가 터졌고 전쟁 중에 오히려 그의 예술 세계의 기초가 다져진다.

전국 각지의 피리명인들이 부산으로 모여들자 이 명인은 스승들이 기거하고 있는 판자촌을 누비며 전국 팔도의 피리소리를 배울 수 있었다.

팔도의 소리를 오롯이 살려낸 이 명인은 우리 음악이야말로 세계적인 음악, ‘국악이 최고’라고 말한다. 실제로 이 명인은 세계 각지에서 연주를 펼치며 현지인들의 갈채를 받고, 민속악을 세계에 알렸다.

1960년 5월 프랑스 국제민속예술제에서 그가 선보인 대금 독주에 대해 현지 언론의 반응은 광(狂)적이었다.

“그때 나는 민속예술단원 33명 중 한 명으로 참가를 했지. 공연 도중에 갑자기 주인공 여배우 안나영 씨가 맹장수술을 하게 된 거야. 다른 대역을 찾기 위해 15분 정도 공백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나갔지.
임기응변으로 13분 동안 대금산조를 축약한 독주를 처음으로 국제 무대에 선을 보인 거였지. 끊어질 듯 이어지고 휘몰아치는 그런 소리를 처음 들어본 외국인들이 많이 놀랐나 봐.”

충격과 감탄을 금치 못했던 외국 언론들은 “신의 소리, 영혼의 소리”라는 극찬을 내놨다.

그는 꽉 막힌 전통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이 명인은 섞음에 유연하다. 가수 바비킴, 기타 연주자 김광석, 신중현, 클라리넷 연주자 길옥윤 등과의 작업을 통해 크로스오버를 꾀해 왔다.

세월을 타고 흐르는 그의 피리연주는 무불통달(無不通達)의 경지에 올라 동서양을 아우르며 거침이 없다.

민속악은 악보보다 ‘필’ 신나게 즐기다 가시라
가야금 즉흥연주 1인자 백인영 명인

한국 전통음악계에서 즉흥음악 연주의 1인자로 꼽히는 백인영(64) 명인. 그는 민속악은 ‘필(Feel)’이 중요하다며, 음과 음 사이를 자유자재로 노닌다.

그의 즉흥 연주는 주제만 던져주면 언제 어디서라도 가능하다.

지난 2004년 ‘전주세계소리축제’에서는 객석에서 던진 ‘낙엽’, ‘바다’ 등의 주제로 즉석에서 소리를 만들어 내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민속악은 악보를 보고 하는 게 아니야. ‘필’이 있어야지. 관현악은 악보를 보고 지휘자에 맞춰 하는 것이 맞지만 전통 민속악은 ‘시나위(신을 불러 위로하는 음악)’처럼 다 본인이 작곡자고 연주자야. 할 때마다 달라야 하는 음악이지.”

그의 이런 자유분방한 ‘끼’는 유복하고 예술적인 가정환경에서 비롯됐다. 전남 목포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백 명인은 어려서부터 음악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동네 사람들이 명절만 되면 우리 집으로 다 놀러 와서 춤추고 노래하고 노는 것을 보고 자랐지. 또 우리 어머니가 모르는 민요가 없었어. 동네 아버지 친구분들이 남자는 율(律)을 좀 알아야 한다고 해서 방학 때마다 가야금을 배웠고 본격적으로 배운 것은 중학교 졸업하고 재수할 때였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목포 KBS 방송국에서 반주를 하며 지역사회에서는 유명한 연주자가 됐다. 20세가 넘어서면서는 여성국극단에 들어가 전국을 순회했다.

그 후 장구, 피리, 대금, 아쟁, 거문고, 해금 등과 어우러져 선율 사이사이를 헤집고 기어다니는 그의 신들린 연주는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명실공히 우리 나라 최고의 가야금 연주자가 됐다. 한평생 음악을 즐기며 살아온 만큼 우리 음악에 대한 애정도 대단했다. 백 명인은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다른 길은 사양하고 자신의 멋과 끼가 담긴 국악의 길을 갈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그의 국악사랑에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우리 문화를 보고 듣고 배울 기회가 없어. 요즘에는 국악 공연도 예전보다 많이 줄었지.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있어서도 이놈들이 열심히 안 해. 하라고 해도 안 해. 잘하는 놈이 한 놈 있긴 해. 얼마 전에 결혼해서 애기 낳고 다시 한다고 하더라고….”

그는 또 전통은 전통대로 지키되, 시대의 흐름에 맞게 음악에도 변화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전히 끼와 젊음이 넘치는 음악인, 장소만 있으면 어디서든 즐겁게 연주할 수 있다는 백인영 선생. 제자를 가르치러 가신다기에 술 한잔 못 받고 헤어졌지만 그의 낭만과 풍류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공연이 기대된다.

아시아경제신문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