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감성·상상력을 파는 사회
CEO NO, CDO Yes!
(Chief Dream Officer ; 꿈 경영자)

2004년 미국 메이저리그 명문구단 보스턴 레드삭스는 86년 만에 저주에서 풀려났다. 1918년 이후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 보스턴의 마무리 투수 키스 폴크가 상대편 마지막 선수를 아웃시킨 순간 보스턴의 선수들과 팬들은 벅찬 환호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TV 광고. 한 꼬마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보스턴의 홈구장인 펜웨이파크에 들어선다. 화면 아래 자막에는 1919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카메라는 펜웨이파크 관중석에 고정돼 있고 아이는 점점 자라나 성인이 되고, 다시 또 노인이 된다. 아래 숫자도 함께 불어난다.
끝없이 불어날 것만 같던 숫자가 2004에서 멈춘다. 백발의 노인과 어느새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자식과 손자들은 고향팀의 우승에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잠깐 암전 후 이어지는 문구. ‘Just Do It. Nike’
세계적인 스포츠브랜드 나이키의 광고였던 것이다. 야구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미국인들, 특히 보스턴 팬들에게 이 광고는 꿈에 그리던 보스턴의 월드시리즈 우승과 한 묶음으로 기억에 남게 됐다. 86년간의 기다림 속에 함축된 숱한 이야기들이 팬들을 감동시킨 것이다. TV 광고에 자사의 제품이 전혀 노출되지 않았지만 나이키는 엄청난 광고 효과를 본 셈이다.
꿈과 감성, 상상력을 파는 사회가 점점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제 기능을 보고 제품을 선택하는 일은 몇몇 영역을 제외하곤 촌스러운 일이 돼버렸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업이 살아남아
세계적인 미래학자 롤프 옌센은 자신의 저서 《드림 소사이어티》에서 나이키를 “언어와 문화국경을 뛰어넘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범세계적인 기업”으로 소개하고 있다. 꿈과 감성을 파는 사회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업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저자의 예측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일본의 휴대전화 제조업체 윌콤은 올해 열린 ‘굿디자인 엑스포’에서 곰인형 전화기 ‘쿠마폰’을 선보였다. 쿠마폰은 휴대전화에 곰인형 모양이 장식된 수준이 아니라 곰인형 안에 전화기가 탑재된 신선한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테디베어를 닮은 쿠마폰은 전화를 하지 않고 바닥에 내려놓은 동안에는 영락없는 곰인형이다. 그런데 바닥에 내려진 곰인형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하다. 마케팅 컨설팅그룹 씨에모의 김부종 대표는 “쿠마폰의 외로운 표정은 소비자들에게 한 번이라도 더 전화를 걸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상품 자체가 아니라 감성을 파는 새로운 사례”라고 말한다.
전자 제품의 이러한 추세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아이리버 미키 MP3플레이어나 모토로라의 조약돌 모양 휴대전화 페블폰 등이 상품에 이야기를 담은 또 다른 예들이다. 이들 제품들은 디자인을 단순화해 어떤 기능이 내재돼 있는지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디자인을 보자마자 떠오르는 감성적인 이야기의 세계로 소비자를 이끌 뿐이다.
또 다른 예로 세계적인 시계 브랜드 롤렉스를 들 수 있다. 시계라는 상품은 이제 더 이상 정확성만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할 수 없다. 롤렉스보다 훨씬 싼 시계들도 정확성에서 롤렉스에게 뒤처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롤렉스는 이야기를 선택했다. 롤렉스의 기업정신을 가장 잘 드러낼 만한 인물을 선정해 시상하는 롤렉스 어워드를 진행하고 있는 것. 올해에는 수세미식물과 재생플라스틱을 이용해 저렴한 주택 건립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파라과이의 엘사 살디바흐, 삼륜 오토바이로부터 배출되는 오염물질 줄이기에 도전한 미국의 팀 바우어 등이 수상했다.
감성과 이야기를 강조하는 상품이 전자제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해외에서는 우유 먹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우유 이름에 로봇을 붙여 이야기를 만들어낸 로봇밀크가 시판되기도 했으며, 국내에서는 지방자치단체들이 지방 고유의 전설을 다양한 방법으로 사업화하기 시작했다.

지방 고유의 전설을 다양한 방법으로 사업화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은 음악과 미술,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학자들을 모아 공동작업을 후원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영역 사이의 구분이 허물어지며 창조역량이 확대됐다. 이처럼 서로 다른 영역의 융합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을 ‘메디치 효과’라 부른다.
LG생활건강이 4년 전 코카콜라 음료를 인수할 때만 해도 주위의 반응은 냉담했다. 주로 생활용품과 화장품을 판매하던 회사가 음료회사를 인수한 것이 뜬금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LG생활건강은 인수 당시부터 뚜렷한 ‘메디치 전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이 없었다.
LG생활건강은 우선 인트라넷상에서 사업부별 정보 데이터를 개방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서로의 강점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모든 정보를 공유하기로 한 것이다.
코카콜라의 경우에 LG생활건강이 기존에 갖고 있던 광범위한 소매 유통망을 활용해 4년 만에 흑자를 낼 수 있었다. LG생활건강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음료사업과 뷰티 사업의 접목을 꾀하고 있다. 화장품 판매채널을 활용한 음료 판매 등 다양한 메디치 전략들을 구상 중이다. 직원들의 상상력이 제품에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융합 시도가 늘고 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영역 간의 융합을 위해서는 경영인들이 직원들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해당 직원의 강점이 무엇인지 모르면 융합의 과정에서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이 힘들기 때문이다.
《포춘》지가 매년 선정하는 ‘일하고 싶은 기업’ 순위에서 11년 동안 15위 이내에 든 고어사의 정식 명칭은 ‘W. L. Gore & Associa-tes’, 즉 고어와 동료들이다. 고어사는 등산복 등에 쓰이는 특수 원단인 고어텍스를 만드는 회사로 유명하다. 고어와 동료들이라는 회사 명칭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이 회사의 직원들은 직위도 서열도 없고 누구나 동료다. CEO도 직원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되며, CEO는 외부적인 직함일 뿐 사내에서는 그도 한 명의 동료에 불과하다.
고어사는 프로젝트 중심으로 일이 진행된다.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면 이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 협조해 팀을 꾸려 진행하는 형식이다. 일하는 동안 상사도 부하직원도 없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고어사의 연봉정책 또한 독특한데 관리자나 경영인이 연봉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동료들의 평가에 의해 연봉이 결정된다. CEO의 연봉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고 고어사의 연봉이 매우 높은 것은 아니다. 직원들은 업계 평균 수준의 연봉을 받고 있지만 그들이 회사에 대해 갖고 신뢰도는 따라올 자가 없다.
경영자가 눈높이를 직원에게 맞추고 정말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넥스트 컴퍼니》의 저자이자 상상력 컨설턴트인 허병민 씨는 이러한 경영자야말로 진정한 CDO(꿈 경영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꿈 경영자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만이 꿈과 감성이 담긴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CDO와 함께 일하는 직원만이 꿈·감성 담긴 제품 생산
극심한 경기한파로 비용절감, 감원폭풍이 휘몰아치는 이때 이러한 고민은 배부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직원에 대한 투자보다는 구조조정을 통해서라도 비용을 절감하는 게 급선무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내 10대 기업을 중심으로 “불황일수록 직원에게 투자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구본무 LG그룹의 회장은 공식석상에서 “어렵다고 사람 내보내면 안 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CNN의 보도에 따르면 사우스웨스트항공사와 페덱스, 도요타 아메리카 등은 감원하지 않기로 유명한 회사들이다. 이들 회사의 직원들은 실직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들 회사들은 인력을 감원하지 않는 대신에 운영비용을 감축하는 것을 택했다. 직원들이 회사에 대해 갖고 있는 신뢰가 당연히 두터울 수밖에 없다.
경제위기 발원지인 미국의 한인 업체들도 직원 투자에 동참하고 있다. 전자 제품 회사 제이윈은 “위기일수록 직원에게 투자한다”는 저스틴 김 사장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단 한 명의 직원도 해고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회사가 어려울 때 직원들마저 동요하게 되면 오히려 생산성이 더 떨어지게 된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 허병민 씨도 “이런 시기에 비용절감을 이유로 직원을 퇴출시키는 것은 매우 근시안적인 방법이다. 강제적인 구조조정은 남은 직원들에게도 감정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며 회사에 대한 만족감은 매우 낮아진다. 이러한 만족감 하락이 장기적으로 회사의 손실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직원에 대한 투자를 강조했다.
현 시점에서 직원에 대한 투자라는 말은 단순히 직원들의 고용을 연장해 준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큰 것을 뜻한다. 경영자들이 직원들의 꿈을 경영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그들과의 신뢰가 가장 우선시되는 덕목이다.
허병민 씨는 자신의 저서 《넥스트 컴퍼니》에서 ‘수면실을 보장하라, 아침밥을 제공하라, 충분한 휴가를 보장하라’ 등 매우 이상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들이 이상적으로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직원들이 회사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예로 든 셋은 보물섬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당장 비용을 들인다고 이익이 창출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무궁무진한 보물을 제공할 것이 분명한 사항들이라는 것이다. 꿈과 감성을 파는 사회가 될수록, 직원들의 상상력이 중요해지는 사회가 될수록 이처럼 엄청난 시세차익이 기대되는 보물섬에 투자하는 게 당연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재훈 기자 (huny@ermedia.net)

박스기사

인터뷰 | <넥스트 컴퍼니> 저자 허병민

“CEO는 365일 이동휴게소”

문학평론과 문화평론, 가수 겸 작사가 활동 등 회사원 이외에 다양한 이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이력들이 저술활동에 도움이 됐나. 물론이다. 내가 정말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해본 것 같다. 이러한 경험들이 쌓이고 나니까 또다시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생겨났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의 저술활동이다. 문화 다방면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상상력 컨설턴트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넥스트 컴퍼니, 즉 앞으로의 기업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광고 문구를 빌려 어젠다를 설정했다. 그것은 바로 Talk, Play, Love다. 토크는 크게 직원들 내부의 소통과 직원과 소비자 간의 소통을 아우른다. 특히 전자가 중요한데 직원들끼리 끝없이 수다를 떠는 과정에서 신선한 아이디어가 나오고 그것들이 공유되면서 결과적으로 창의적인 제품이 만들어진다. 국내기업들은 대부분 창의적인 사고를 중시하면서도 이러한 자유로운 소통을 열어주지 않고 있다.
다른 주제들인 플레이와 러브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플레이는 말 그대로 직원들을 놀게 하라는 것이다. 물론 일 미뤄두고 무조건 놀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직원들이 일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러브는 CEO의 역량에 관한 것인데, 토크와 플레이가 실현될 수 있도록 직원들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앞으로 CEO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업무는 애정을 갖고 직원들을 보살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한 주제들을 현실에서 가장 잘 실현하고 있는 기업들의 예가 있나. 구글이야 워낙 유명하고, 일본의 미라이공업도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고어사도 주목할 만한 사례다. 고어사에서는 직급이나 부서에 상관없이 프로젝트를 만든 사람이 리더가 되어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을 모집해 팀을 꾸릴 수 있다. 이러한 기업의 점조직화는 국내에서도 더욱 확산될 것이다.
책을 보니 점조직, 상호파견 등의 용어들이 나온다. 어떻게 보면 일맥상통하는 용어들인 것도 같은데. 큰 뜻은 비슷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다르다. 상호파견의 대표적인 예는 구글과 P&G 사이에 있었다. 전혀 업무 분야가 다른 두 업체에서 직원들을 교환해 창의력을 높이려 시도했던 것이다. 점조직화는 앞에서 말했던 고어사가 대표적인데 국내에서도 확산될 거라 생각한다.
사무실의 디자인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 그런가. 생활을 디자인해 주는 라이프 디자이너가 있듯이 업무환경을 디자인해 주는 워크 디자이너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자신의 업무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창의성은 계속 변화하는 환경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휘될 수 있다. 경영자가 “사무실 꾸며봤자 생산량이 느는 것도 아닌데”라고 생각한다면 그 회사는 앞으로의 기업환경에 적응하기 힘들 것이다. 직원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생산성도 높아질 것이다.
놀이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데, 현재의 CEO 또는 임원급의 직책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즐겁게 일한다’는 개념이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보이기 위한 감성경영, 펀경영이 아니라 직원들의 감정을 헤아리는 감정경영으로 가야 한다. 일회성 이벤트로 직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CEO는 365일 이동휴게소가 돼야 한다. 직원들의 감정을 헤아려 그들이 가장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사진설명
보스턴 레드삭스가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직후 방영된 나이키의 TV광고. 미래학자 롤프 옌센은 나이키를 꿈과 감성을 파는 대표 기업으로 소개했다.

권점주 신한은행 부행장이 영업장을 직접 방문해 감사인사를 전하고 있다. 어려울수록 직원에게 투자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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