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허기졌다. 새벽 두 시가 넘어갈 무렵, 곯은 배를 안고 걸신들린 듯 밖으로 나갔다. 몇 백 미터 걸어가니, 유레카…! 편의점이었다. 배를 채우고야 비로소 숙면을 취했다. 아마 그날 부터였을 거다. 새벽녘 배고픈 날이 잦아든 것은. 가까운 편의점을 몰랐을 땐 덜컥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그래봤자 그 시간에 먹을 걸 구할 수 없다며, 알게 모르게 마음의 면역을 쌓았기 때문일 터다. 언제든 뭔가 사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내 몸은 ‘허기’에 대한 방어를 허물었다. 그 후로는 툭하면 배가 고파왔다. 그 때는 물을 씹어 먹는다거나, 3단 콤보 양치질을 한다 해도 소용없다. 일단 뭔가를 먹어야 한다. 이미 ‘자생’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요 며칠 전통시장 몇 군데를 둘러봤다. 시장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전통시장 육성’이라는 명목의 국가사업이 도화선이 됐고 상인들의 참여가 불씨가 됐다. 물론 아직까지 살만하다하기엔 이르다. “지난 2년 간 20억을 지원해 줬으니 ‘가시적인 성과’를 내 놓으라”는 한 정부기관을 대상으로 보여주기식 행사를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상인들도 있었고, ‘이번엔 좀 나아지겠지’라며 점포 재계약을 하고 또 다시 울며겨자먹기식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있었다.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어쨌거나 푸념 속에서도 상인들이 하나같이 강조한 건 ‘자생의 힘’이었다. 국가 차원의 사업이 모두 끝난 후에도 당시 진행했던 프로그램을 상인회에서 이어받아 지속시키는 데는 그런 힘이 깔려 있다.

지난 3월 8일, 서울시가 대형마트·SSM 판매조정가능품목을 51개 선정했다. 선정된 담배, 소주, 두부, 양파, 콩나물 등의 품목은 새로 출점하는 대형마트나 SSM에서 판매가 제한될 수도 있다. 결국 마트에서는 공산품만 판매하라는 소리다. 시는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에 반사이익을 줄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글쎄다. 중랑구 전통시장의 한 상인은 이에 “‘황송’한 일이긴 한데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다”고 했다. 유통업계 구조 상 제로섬은 불가피하지만 ‘상생’을 말하면서 한 쪽의 규제로써 얻는 ‘반사이익’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충남의 한 전통시장 상인 또한 “이렇게 해서 전통시장을 사람들이 찾는다고 치자. 그럼 주차문제는 어떡할 거냐. 접근성부터 확보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소비자 편익을 고려하지 않은 방책은 제자리걸음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상생’을 운운하기 전에 ‘자생’이 가능해야 된다는 얘기다.

판매조정품목 소식을 접했을 때, ‘자생의 힘’을 강조하던 상인들의 얼굴이 유독 스쳐갔던 이유다. 그들의 표정은 무색했다. 스스로 살아나야 한다고 막 면역을 쌓기 시작한 전통시장이 툭하면 배고프게 될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