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이 돈 찍어내는 기계냐”
한은 총재 교체설에 전직 총재들 뿔났네

말통

사퇴론이 나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다. _ 이경식 전 총재

나도 임기 못 채웠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나. _ 조순 전 총재

총재 교체는 군사정권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_ 박승 전 총재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를 강만수 장관과 함께 사퇴시키는 것은 군사정권으로 회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최근 떠돌고 있는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의 사퇴설에 대해 거센 비판을 쏟아낸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의 말이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사퇴하면서 이성태 총재까지 사퇴시킬 것이라는 한 일간지의 보도에 강 장관은 둘째치더라도 임기도 다 채우지 않은 이성태 총재를 어떻게 사퇴시킬 수 있냐는 주장이다.
최근 내년 초 개각에서 강만수 장관이 사퇴할 것이라는 주장이 가시화되면서 이 총재의 사퇴까지 같이 거론되고 있다. 청와대는 연초 개각설을 일절 부인하고 나섰지만, 여권 내부에서는 강 장관의 사퇴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이다. 이 총재의 사퇴설에는 어느 정도 논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대통령 권한으로 경질할 경우에는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전 총재들도 이 총재의 경질은 말도 안 된다며 정부가 중앙은행을 통제하는 경우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덧붙여 “미국은 중앙은행의 감독 기능을 강화하고 있는 마당에 한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고 박 전 총재는 지적했다.

대통령도 임명권만 갖고 있어
한국은행의 독립성은 총재 임명에서부터 논란을 불러왔다. 한국은행 총재는 현재 대통령이 임명하는 시스템으로 돼 있다. 임기직이기 때문에 임기 기간 동안 누구도 사퇴하라고 말을 할 수도 없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국은행법에 보면 총재의 임기는 4년으로 명시돼 있으며, 한은법 제33조에서는 필요에 따라 1년에 한해 연임도 가능하다. 현행 한은법에는 총재를 해임할 수 있다는 조항은 없으며, 대통령도 한은 총재 임명권만 갖고 있다.
불가피하게 사퇴할 수밖에 없는 경우는 중대한 실책으로 인해 한국은행 총재 스스로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냈을 때이다. 이경식 전 한국은행 총재는 “한국은행 총재는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떠나서 임기가 끝나야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며 “일반론적으로 따지자면 한국은행 총재는 임기직이기 때문에 누가 사임하라고 해서 사퇴하는 자리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한은 총재를 포함한 금융통화위원들을 규정하는 한은법 제17조, 제18조를 보면 제18조에 직무상 의무를 위반해 위원으로서 직무수행을 할 수 없는 경우에 금융통화위원을 해임할 수 있다. 제40조 2항에는 “금융통화위원회는 총재, 부총재 및 직원의 업무수행에 대해 필요한 경우 총재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거나 징계를 요구할 수 있다”고 명기돼 있어 경질시킬 수 있는 조항으로 사용될 수 있다. 금통위원 2명 이상이 의견을 제안, 과반수 이상이 동의했을 때 총재를 포함한 집행임원 등을 징계조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조항은 위원과 직원들이 한은 총재에게 징계를 요구하는 형식이다. 총재 스스로 징계해 달라는 말이 없는 이상 사실 효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전 총재는 “중대한 실책이라고 나오지도 않았는데 사퇴설이 왜 나오는 것인가”라며 “본인이 그만두려는 의사가 없는 이상 한국은행 총재는 사퇴시킬 수 없는 자리”라고 말했다.

“중대한 실책도 없었는데 왜 사퇴하나?”
이성태 총재의 사퇴설이 불거지면서 한은 전 총재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박승 전 총재(2002~2006)는 “군사정권으로 회귀하는 것이냐”며 “지금도 독립성이 약하다고 IMF 보고서에도 나왔는데 관치금융을 재현하자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한은은 원래 돈을 찍기 싫어하는 기관”이라며 “시장 안정화를 위해서는 유동성을 일정하게 조절해야 하는 만큼 돈을 지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 이후 한국은행이 공급한 자금은 20조원에 이른다. 지난해 10월부터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2.25%포인트를 떨어뜨렸지만, 여전히 유동성은 금융권에만 머물러 있다. 적극적으로 대출에 나서 기업들의 ‘돈맥경화’를 풀어줘야 할 은행들이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끌어올리느라 대출을 쉽게 늘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박 전 총재는 “한국은행이 풀어준 20조원으로 현재 시중은행들은 돈이 많다”며 “돈을 이미 풀 만큼 풀었는데 얼마만큼 더 풀란 말인가”라고 언급했다.
그는 또 “이전에 한은이 시중은행의 안정화를 알아보기 위해 조사를 하려고 했다”며 “하지만 이는 금융감독원의 일이라고 정부가 못을 박아버려 시중은행이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덧붙여 “정부는 지금까지 푼 20조원 말고도 또 다른 20조원을 더 풀라고 요구하고 있다”며 “은행들 상황도 모르는데 어떻게 돈을 함부로 풀 수 있단 말인가”라고 지적했다.
당장 불을 끄는 데에만 급급한 정부에 일침을 가한 박 전 총재는 “시중유동성이 과다하게 풀어질 경우에 금융위기 상황에서 슈퍼거품을 양성할 수 있다”며 “그때는 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냐”고 언급했다.
1995년부터 98년까지 재임했던 이경식 전 총재는 “현 한은 총재가 사퇴할 것이냐는 논란 자체가 우습다”며 “임기직이고 아직 1년 2개월이나 남은 상황에서 사퇴설이 가당키나 한가”라고 언급했다. 덧붙여 이성태 총재와 함께 교체설 도마에 오른 강만수 장관에 대해서는 “바꿀 만하면 바꿔야 하지 않겠나”라고 즉답을 피했다.
그는 또 “한국은행 독립성을 논하는데 왜 한은 총재의 사퇴가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며 “이러한 논란 자체를 하고 있다는 게 한심하다”고 말했다.
1992년에서 93년까지 재임한 조순 전 총재는 한국은행 독립성과 이성태 총재의 사퇴설에 대해 “할 말이 없다”고 매듭지었다. 그는 “나도 임기를 채우지 못했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한편 현재 민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은법 개정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다. 이들 주장의 골자는 중앙은행에 금융회사 조사권과 외환시장 안정에 대한 협의기능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또 한은 총재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총재 임명 시에 국회 인사청문회와 국회 본회의 표결에 의한 임명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토록 하는 절차로 만들자는 것이다.

국회동의 얻는것에 대해선 의견 분분
이에 대한 한은 전 총재들은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박승 전 총재는 “지금처럼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기보다 국회 동의를 얻어야 독립성을 강화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이경식 전 총재는 “정치적 의견이 들어갈 수 있어 객관성이 결여될 우려가 있다”는 입장이다.
한은 총재의 임명에 있어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칠 경우에는 총재 후보자의 자질을 검토해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정치권의 의견이 들어간다는 단점도 있다. 이 전 총재는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것과 인사청문회를 통과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다를 게 무엇이 있겠냐”며 “한은 독립성과 현재 한은법 개정은 관계성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전 총재는 “대통령이 한은 총재를 직접 임명할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소지가 많다”며 “분명한 것은 한은법 개정을 통해 독립성을 강화하고 금융회사의 검사권을 부여받아 금융시장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한은법 개정은 금융시장에 대한 조사권과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협의 기능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이성태 총재도 2009년 신년사를 통해 “위기대응 과정에서 필요성이 제기된 금융규제 및 감시기능 강화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최종대부자로서 중앙은행의 금융안정 역할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폭넓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개별 의원입법 형태로 몇 건이 올라가 있는 한은법 개정안은 향후 개정 작업이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한은 총재의 임명 절차를 개정할 수 있을지는 논란이 가중될 듯하다. 국회동의를 거치도록 하겠다는 임명 절차에 대해 여야권이 격하게 대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승원 한국은행 노조위원장은 “국회 동의가 정답이 될 수는 없다”며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중립성과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희 기자 (wooang13@ermedia.net)

박스

말 많고 탈 많은 총재 자리

평균 임기는 2.5년…22명중 6명만 임기 채워

한국은행 총재의 임기를 1대 구용서 총재부터 22대 박승 총재까지 따져본 결과 평균 2.5년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에는 몇 개월밖에 임기를 채우지 못한 사람도 있었으며, 반대로 8년이라는 임기를 채운 이도 있었다. 대부분 1~2년의 임기를 끝으로 한은 총재직을 사퇴했고, 4년의 임기를 다 채운 한은 총재들은 22명 중 6명에 불과했다.
한은 총재들 중 4대 배의환 총재(1960년 6~9월)의 경우는 1960년 4·19 의거 등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임기를 3개월밖에 채우지 못했고, 박통 체제하에서 5대 전예용 총재(1960년 9월~1961년 5월)는 8개월, 8대 이정환 총재(1963년 6~12월)는 6개월밖에 임기를 채우지 못하기도 했다. 반대로 2대 김유택 총재는 5년을, 11대 김성환 총재는 8년이라는 임기를 채웠다.
이러한 한은 총재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명암이 교차한다. 대부분 정치적 이유로 단명했으며, 한은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1987년 항쟁이 있고나서부터였다. 이 당시 한은 총재였던 김건 17대 총재는 직원들과 ‘중앙은행 독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등 한은 독립운동을 벌이면서 4년의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이후 조순 총재와 김명호 총재는 정치적 외풍과 금융사고로 인해 임기를 다 마치지 못했다. 조 총재는 1992년 대선 당시 정주영 국민당 후보가 ‘한은이 3000억원의 돈을 찍어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지원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바로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고소했다. 선거 후 현대 측은 조 총재에게 사과를 했고 조 총재는 고소를 취하했다. 하지만 그 당시 당선자인 YS 측과 사전 협의 없이 고소를 취하했다는 이유로 새 정부 출범 이후 전격 경질됐다. 당시 청와대 측은 “조 총재가 사의를 표시해 수리했을 뿐”이라고 밝혔지만, ‘괘씸죄’라는 것이 정설이다. 조 총재는 재임 기간 동안 한은 총재로서 처음으로 지불준비금이 부족한 시중은행에 대해 과태료를 부과하는 등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펼쳤다.
18대 김명호 총재의 경우에는 부산지점 지폐유출 사고로 인해 사퇴했다. 김 총재는 전통 한국은행 출신으로 한은 이사, 부원장보, 부총재, 은행감독원장 등 한은의 임원직을 모두 역임한 후 총재로 부임한 케이스이다. 하지만 발권 당국의 보안체계에 구멍이 뚫린 사고로 인해 아쉽게도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20대 이경식 총재는 1997년 IMF 외환위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당시 재경부 차관이었던 강만수 장관이 한은 총재의 지휘를 받던 은행감독원을 금감원으로 떼어내는 한은법 개정 작업 때문에 이 총재는 노조에게 역대 총재 게시판에 한동안 사진조차 걸리지 못하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그 당시 강 장관은 은행감독원과 함께 재경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은 금융통화위원회 아래 한은을 집행기구로 두려는 법 개정 작업을 했다. 당시 한은 기획부장이었던 이성태 총재는 국회 등 대외업무를 총괄하며 최전선에서 이와 같은 한은법 개정을 저지했다. 은행감독원은 금감원으로 넘어갔으나, 당시 재경부 장관이 맡았던 금통위 의장 자리는 한은 총재에게 넘어갔다.
그 이후 21대 총재로 취임한 전철환 총재는 ‘독립 총재 1호’가 됐다. ‘가장 복받은 총재’로도 불리는 전 총재는 우리나라가 IMF에서 빌린 돈을 모두 갚던 역사적 순간에 상환서명을 하는 영광도 누렸다. 4년 임기를 다 채운 전 총재는 아름다운 퇴장으로도 유명하다. 한은 직원들이 전 총재의 퇴임을 아쉬워했으며, 전 총재도 이임식 전날 “한은 총재가 된 것만 해도 영광인데 임기를 다 채우고, 경기가 안정된 상황에서 떠나게 돼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겸손하게 답했다.
현 총재인 23대 이성태 총재는 19대 김명호 총재 이후 13년 만에 처음으로 내부 승진으로 임명된 케이스이다. 김 총재는 부총재와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은행감독원장을 거쳐 총재로 임명된 케이스인데, 당시에는 은행감독원이 한은과 분리되지 않아 한은의 실질적인 2인자는 부총재가 아닌 은행감독원장이었다. 이성태 총재처럼 부총재에서 총재로 승진한 케이스는 2대 총재인 김유택 총재가 유일하다.

김현희 기자 wooang13@ermedi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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