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ile / 최종학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미 일리노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경영대 학부와 석사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홍콩과학기술대에서 6년 연속 최고강의상을 수상한 후 2006년 서울대 경영대 교수로 부임했다. 최근 《숫자로 경영하라》를 발표했다.

미 에너지기업 엔론은 모래성 위에 구축한 ‘바벨탑’이었다. 분식회계로 천문학적인 부채를 감춘 이 회사 경영자들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며 직원들의 자사주 매입을 독려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주식을 내다팔았다.

직원들도 파생상품의 수익성을 부풀리며 수십억 원의 보너스를 챙겼다.
‘숫자경영의 전도사’로 널리 알려진 최종학 서울대 경영대 교수(41)는 단기성과를 중시하는 미 경영계의 풍토가 엔론 사태를 예비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단기 실적으로 경영자의 성과를 측정하는 풍토가 유지되는 한 임직원들의 도적적 해이 가능성은 상존한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를 지난 22일 서울대 교정에서 만났다.

Q. 로마가 멸망한 원인이 ‘숫자경영’에 어두웠기 때문이라고 하셨죠. 로마인들이 회계를 몰랐습니까.

지중해를 주름잡으며 세계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가 망한 이유를 아십니까. 바로 군대를 유지할 돈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입니다.

(훈족에 밀린) 게르만족들이 로마 국경을 넘어 왔지만, 로마인들은 용병들을 움직일 ‘인센티브’가 부족했습니다. 국방비가 턱없이 모자랐던 거죠.

Q. 신선놀음을 하다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격이었군요. 로마인들이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능력이 없었습니까.

흥청망청 돈을 쓰면서 정작 살림살이의 요모조모를 두루 감안해 자원을 배분하거나 위기에 대처할 ‘유연함’을 잃어버렸습니다.

로마인들은 살림살이를 꾸려갈 균형감각을 상실했고, 위기의 징후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Q. 카이사르는 35세에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넜습니다. 30대 후반에 ‘숫자경영’ 전도사로 서울대에 부임해 포부도 크셨겠어요.

홍콩과기대에서 6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다 2006년 서울대에 부임했어요. 그동안 고생이 심해서인지 흰머리가 머리 윗부분에 많이 늘었네요. (웃음)

Q. 하지만 한국에 오자마자 냉엄한 현실과 조우했다고 들었습니다. 카드사 직원들에 많이 놀라셨다지요.

카드를 만들어달라는 청탁 전화가 꼬리를 물었습니다. 카드사 직원들이 사무실로 직접 찾아오기도 하구요. 펀드 가입 권유도 적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단호하게 거절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러질 못했어요. 카드가 이미 많은 편이어서 더 만들기 어렵다고 정중히 거절해도 이분들은 막무가내였어요.

Q. 왜 놀라셨습니까.
일부는 ‘카드 발급 후 바로 버리라’는 권고도 서슴지 않았어요. 카드 한 장을 발급하려면 우선 신청자의 신용도를 심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카드를 발급해 보내줘야 합니다.

카드 신청자가 어디 저 하나뿐이겠습니까. 다 비용입니다. (제가) 카드를 꺾어버리면 카드사는 수수료는 물론 이자도 챙길 수 없을 테구요.

이노베이션, 고객 가치창조의 깃발을 내건 경영자와 (이 주문을 실행에 옮겨야 하는) 실무자는 눈높이가 다릅니다. 경영자는 회사의 전략목표가 실무 단위에서 어떤 식으로 수용 되고 있는지 항상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Q. 카드 발급 건수가 직원 평가 항목이다 보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은행이나 보험사 등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나요.

(은행은) 대출 잔액이 직원 평가 항목입니다. 직원들은 대출 잔액을 높이기 위해 공격적으로 영업을 해야겠죠.

신용위험이 있는 고객들이 이자와 원금을 갚아나가는 한 은행 수익성도 좋아질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대출금을 갚지 못하면 고스란히 은행 경영에 부담을 주게 됩니다.

Q. 경영진의 독려 속에 카드는 물론 금융상품 판촉을 늘려도 길게 보면 건전성만 악화시키는 악순환이 생기는 거군요. 마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최고경영자의 ‘전략목표’가 직원 성과지표(KPI)와 서로 ‘엇박자’를 낸 결과입니다.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회사 실적은 장기적으로 거꾸로 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는 겁니다.

Q. 무엇이 문제입니까.

서울대의 교훈은 ‘진리는 나의 빛’입니다. 하지만 교훈에 포함된 진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또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교훈에 부합하는지는 합의된 바 없습니다.

무엇보다, 최고경영자는 전략목표에 관심을 두고, 실무자는 미시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합니다. 바라보는 지점이 서로 다르죠.

Q. 경영자들은 멀리 내다보는 반면, 실무자들은 발밑을 살피다 보니 불거지는 문제라는 뜻인가요.

이노베이션, 고객 가치창조의 깃발을 내건 경영자와 (이 주문을 실행에 옮겨야 하는) 실무자는 눈높이가 다릅니다.

회사의 전략목표가 실무 단위에서 어떤 식으로 수용되고 있는지 경영자는 항상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직원들의 ‘성과지표(KPI)’를 회사의 이해와 일치시켜야 합니다.

Q. 카드사들은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성과지표를 어떤 식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카드 발급 숫자보다 카드 사용금액을 인사평가에 반영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겠죠. 직원들은 유명무실한 100명의 고객보다 수익성이 높은 단 한 명의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카드 발급 직후 특정기간 동안 사용한 카드만 평가점수에 반영해도 사정은 달라질 겁니다.

Q. 문제는 경영자들도 단기 실적으로 평가받는다는 점이 아니겠습니까. 당장 실적을 내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경영자들이 눈앞의 이익을 위해 1~2년 후 닥칠지 모를 부작용을 돌아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영자들도 자구를 꾀하기 마련입니다. 보유자산을 재평가하거나, 감가상각 방식을 달리해서 이익을 줄이거나 늘릴 수도 있겠죠. 회계처리 기준을 합법적인 테두리에서 바꾸는 겁니다.

Q. 착시 효과로 시장의 눈을 속인 에너지기업 ‘엔론’이 바로 이런 사례가 아니었습니까.

(케네스 레이를 비롯한) 엔론의 CEO들은 수많은 소규모 특별 자회사(‘SPE’)를 만들어 이 자회사들에 손실을 다 떠넘겼습니다.

또 이 자회사들과 거래에서 이익을 챙기는 등 법의 맹점을 교묘히 파고들며 시장을 호도했습니다. 직원들도 도덕적 해이를 저지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투자은행은 지난 2003년 이후 세계 주식시장이 상승하자 이 주식과 파생상품을 단기투자 목적으로 분류했어요. 그러다 주가가 하락한 이후에는 이 상품을 다시 장기투자 목적이 라고 주장했습니다. 흑자전환은 회계처리 방식 변경으로 생긴 겁니다.

Q. 엔론사 직원들이 도덕적 해이를 저질렀다는 것은 금시초문입니다. 분식회계의 피해자가 아닌가요.

엔론은 점차 파생상품 트레이딩 비중을 높여갑니다. 에너지 자원을 기초자산으로 한 복잡한 파생상품을 만들어 거래하며 수익원을 ‘트레이딩’ 쪽으로 확대합니다.

문제는 박사급 공학자나 통계학자들이 만든 이 파생상품이 너무 복잡해 그 수익성을 평가하기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Q. 트레이딩 부문 직원들이 ‘파생상품 수익률’을 과대평가해 회사에 손실을 끼쳤다는 겁니까.

이 회사 직원들은 분기별로 수십억에서 수백억원의 돈을 챙겨갔습니다. 수익률을 좌우할 변수들을 유리한 쪽으로 해석했고, 경영진도 수익이 나는 줄 알았죠.

하지만 이 파생상품 중에는 상당한 손실을 낸 사례가 적지 않았어요. 파생상품의 리스크를 평가할 수 있는 직원들은 1%가 채 안 됐어요. 직원들은 회사를 떠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겠죠.

Q. 단기 실적에 연연하는 경영 관행이 한국의 카드 사태는 물론 엔론 스캔들을 불러온 주범인데요. 무엇을 바꾸어야 할까요.

나폴레옹은 위대한 천재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모든 전투에서 이긴 것은 아닙니다. 말년에는 실수도 많이 했어요.

전선이 넓어지다 보니 작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정작 중요한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습니다. 인재들을 확보하고 그들을 길게 봐야 합니다.

Q. 인수합병 부작용으로 부심하는 기업들은 ‘숫자경영’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항상 ‘마진 오프 에러(실수의 여지, Margin of error)’를 염두에 둬야 합니다. 100억원을 투자해서 10억~20억원을 벌 수도 있지만, 50억원을 날릴 수도 있는 게 현실입니다.

모회사가 유동성 위기에 봉착할 정도로 기업인수에 ‘올인’하는 건 금기입니다. 회사를 인수한 뒤에도 주식으로 치자면 손절매 기준을 정해야 합니다.

Q. 글로벌 경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여전히 엇갈리고 있습니다. 숫자경영의 전도사가 바라보는 세계 경제의 온도는 어떻습니까.

올 들어 (위기의 시발점인) 일부 투자은행들이 흑자로 전환했다는 소식들이 전해지자 일각에서는 조기 회복론을 주장했습니다.

투자은행들이 위기의 시발점 역할을 했으니 실적 호전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투자은행들의 흑자전환은 회계처리 방식의 변경에 따른 것입니다.

Q. 착시 현상이라는 뜻인가요.

투자은행은 장기투자 목적으로 보유한 주식과 파생상품은 시가가 변해도 당기순익에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팔 의도가 없어 시가변동이 무의미하다는 논리였습니다.

지난 2003~2007년 세계 주식시장이 상승하자 이 주식과 파생상품을 단기투자 목적으로 분류했어요. 그러다 주가가 하락한 이후에는 이 상품을 다시 장기투자 목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흑자전환은 회계처리 방식 변경으로 생긴 겁니다.

Q. 로마사에도 조예가 깊으신 듯합니다. 국내 경영자들이 로마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개방성입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얻은 결론입니다. 시간이 나면 같은 저자의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도 읽고 싶습니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