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ile / 1980년 플라자호텔 조리부 근무를 시작으로 현대건설 리비아 지사 근무, 롯데호텔 조리부를 거쳐 지난 1988년부터 인터컨티넨탈 호텔에 몸담았다. 1986년 아시안게임 시 급식요원, 1988년 서울 올림픽 때에는 이탈리아 선수단 급식을 관할했으며 2000년에는 ASEM 회의 26개국 정상 환영리셉션 및 국빈 만찬을 담당하기도 했다.

“딜리셔스(Delicious)! 복주머니 잡채!”
지난 6월25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의 밤’ 행사가 열린 프랑스 파리 그랑 인터컨티넨탈 호텔 오페라룸.

한국 정부의 OECD 각료이사회 의장직 수임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이날 행사에서 500여명의 OECD 국가 관계자들은 일제히 한국의 ‘복주머니 잡채’ 요리를 맛본 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 씨가 디자인한 코스 요리에서부터 ‘쇠갈비구이와 쇠갈비찜’, ‘실파 향의 흰살 생선구이와 고추장’,

‘비빔밥과 시금치 된장국’ 등 소개된 다양한 한국 요리에 찬사를 보낸 것이다. 행사에 참석한 한국인들조차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한식세계화팀 앞세워 한식 한류 ‘첨병’ 자처
하지만 훌륭한 성과 뒤에는 반드시 숨은 주역이 따로 있는 법. 이날 행사를 위해 수 개월에 걸쳐 한식 요리 개발에 땀흘려온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배한철 총주방장이다.

“당초에 200인분에 맞춰 음식을 준비했는데 한식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행사 당일 500여명이 줄을 서서 우리 전통음식을 찾았어요. 갈비찜, 비빔밥 등 여러 가지 요리가 있었지만 복주머니 잡채가 가장 맛있었나 봅니다.(웃음)”

창의적인 예술가의 손에 의해 훌륭한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듯 세계인이 반한 ‘복주머니 잡채’도 배 주방장만의 기발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에서 재탄생한 셈이다.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만 20년을 주방에서 살아온 그는 현재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과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 내에 있는 18개의 레스토랑과 그곳에서 일하는 340여명의 주방직원들을 관리하고 있다.

공식 직함으론 양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조리부 부장’. 하지만 그에겐 ‘한식 전도사’란 닉네임이 더 잘 어울린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 호텔에서는 보기 드물게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한식세계화팀’이 만들어졌는데 그 팀의 수장 노릇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식 알리기’를 주 업무로 여겨온 탓이다.

한식세계화팀은 3년 전 6~7명의 호텔 주방장들이 모여 한식의 세계화와 현대화를 위해 결성된 프로젝트팀. 이번 OECD 행사에서 소개된 한식 요리들 역시 한식세계화팀의 작품들이다.

“우리에게는 달리 새로울 것 없는 한식이지만 외국인들로서는 낯설고 이색적인 음식이 한식이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서양인들이 한식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춰 음식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배 주방장의 참신한 아이디어는 ‘서양화’된 한식 요리로 식탁 위에 올려진다. 특히 한식을 ‘뚝배기’가 아닌 ‘접시’에 담은 것은 세계인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물 요리를 가급적이면 없애고 서양인들에게 친숙한 ‘접시’에 담음으로써 그들이 쉽게 음식에 손이 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배 주방장은 동남아 시장에 드라마의 한류가 이는 것처럼 세계 시장에도 ‘한식(韓食) 한류(韓流)’를 일으켜보겠다는 게 목표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가 이끌고 있는 한식세계화팀 구성을 보면 한 가지 놀라운 점이 발견된다. 바로 한식세계화 드림팀에 외국인 주방장들도 일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다.

한식을 세계에 가장 효과적으로 알리는 방법은 바로 세계 각지에 있는 호텔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호텔 레스토랑의 주방장들을 상대로 한식 요리를 교육시키는 것이지요.

호텔이 앞장서야 한류 세계화 성과 높아
배 주방장은 이에 대해 “외국인들의 눈과 입으로 한식을 검증해야만 실제 세계 현지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인터컨티넨탈 호텔이 전 세계 65개국에 150여개의 체인이 있는 만큼, 순환근무하는 외국인 주방장들에 한식을 잘 알리면 자연스레 세계로 퍼질 것이라는 그만의 숨은 전략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몸(식재료)은 한국인이지만 세계로 나갈 때는 서양식 옷(접시)을 입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추구하는 한식 세계화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죠.”

배 주방장의 지휘로 인터컨티넨탈 호텔이 한식을 세계 시장에 앞장서게 된 것은 이미 OECD 행사장 이전에도 여럿 있었다.

지난 2006년 6월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기구 총회 당시 ‘한국음식축제’를 주관했고, 2007년 9월에는 한독수교 125돌 기념 한식 연회 행사에서 한식을 소개해 독일인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여기에 사찰 음식을 해외 유명 호텔에 ‘입점’시킨 것도 눈에 꼽히는 그동안의 성과다. 인터컨티넨탈 측은 직접 국내 유명 사찰의 스님들로부터 연수를 받은 호텔 주방장들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중국 상하이, 일본 요코하마 등의 인터컨티넨탈 호텔 그룹 내 현지 호텔에 파견해 사찰 음식을 전수해 주고 돌아왔다.

배 주방장은 이처럼 한식이 세계 시장에 우뚝 서기 위해서는 외국인이 거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며, 이를 위해 전략적인 한식 요리의 홍보와 유통이 필요하다며 ‘호텔 거점론’을 주장한다.

“한식을 세계에 가장 효과적으로 알리는 방법은 바로 세계 각지에 있는 호텔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호텔 레스토랑의 주방장들을 상대로 한식 요리를 교육시키는 것이지요.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한식을 공급해 세계인들에게 조금씩 알려져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퀄리티 높은 한식을 만들 수 있는 인프라가 마련되어야 함은 당연하고요.”

그가 말하는 ‘퀄리티 높은 한식’이란 철저히 원재료의 특성을 파괴하지 않고 건강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앞으로 세계에서 살아남을 음식은 그리스식과 한식뿐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올리브를 식자재에 활용하는 그리스인들처럼 한국인들 역시 자연주의적이고 건강을 챙기는 음식이 많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논리다.

원재료를 파괴하지 않는 것, 자연 그대로의 맛이 밴 음식을 만들겠다는 이 같은 요리철학이 그가 ‘한식 열사’로 평가받는 이유일 수도 있다.

올해로 55세인 배 주방장. 그는 “은퇴는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후배 주방장들에게 한식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도록 하는 일을 그만두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주방에 두 발로 설 수 있을 때까지는 요리를 멈추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실천을 지켜본다.

김진욱 기자 action@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