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몰랐다
자신이 나무일 줄을
더욱 자기가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그러나 늦은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으로 남은 어느 날
그는 보았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떨고 있는 사람 하나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
울고 있는 자신을.
- 이성선 <나무〉

과거 ‘생각’이라는 단어는 좋은 의미가 아니었던 듯하다. 생각을 뜻하는 대표적인 단어, 사(思)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밭 전’과 ‘마음 심’의 합자로 돼 있다. 생각이니 마음(心)과 관련 있음은 알겠는데 왜 ‘밭 전’을 머리에 이고 있을까.

이것이 과거에는 ‘생각’이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사유의 개념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단초다.

과거 먹고살기 힘든 시절, 사(思)는 ‘어떻게 해야 밭을 잘 갈아 가족을 먹여 살릴까’ 하는 고민의 상징이자 걱정 등 마음의 혼란을 나타내는 단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思)에 대한 이 같은 해석은 한의학에서도 보인다. 한의학에서는 사람에게 병이 생기는 이유 중의 하나를 ‘생각’으로 본다.

생각이 많으면 위장과 비장이 나빠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마 선생도 《동의수세보원》에서 “몸을 일그러뜨리는 원인이 마음에 있음”을 지적하고, “참된 의원은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공감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질 때에만 치료할 자격이 있다”고 갈파했던 것이다.

반면 같은 뜻을 가진 상(想)은 조금 다르다. 나무를 바라보는 모습을 마음이 떠받치고 있다. 자연을 바라보며 마음을 닦는 모습인 것이다.

하나는 고민과 걱정을 대변하는 글자이고, 하나는 수양을 닦는 모양새다. 똑같은 뜻을 지닌 글자가 왜 이렇게 다른 의미를 담게 됐을까.

필자의 추론은 이렇다. 굶어죽을 시기에 끼니 걱정하며 고민하던 모습의 사(思)에서, 밭 전(田)을 빼고 대신 자연을 바라보고 마음을 닦는 모양의 서로 상(相)을 넣으니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밥에 대한 고민과 걱정 등 혼란스러움을 마음에서 빼버리자 생각에 깊이가 생기고, 창조적 상상으로 발전하면서 상(相)이 자연스럽게 밭 전(田) 자리에 안착한다.

이때 뺀다는 의미는 ‘제거한다’는 의미와 ‘넘어선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의미 빼기가 창조적 상상의 세계를 펼치는 한 방법’이라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이성선 시인의 <나무>도 의미빼기형의 한 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람이란 것을 안다.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교육에 의해서다. 하지만 교육을 받지 않는 나무는 자신이 나무라는 사실을 알까.

시인은 나무도 자신이 나무라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어떻게 아는가 하면 ‘늦은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으로 남아’ 있을 때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고’ 알게 된다.

시인은 그러면서 나무가 스스로 나무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물론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진술한다.

나무가 스스로의 존재를, 그리고 ‘아름다운 악기’라는 가치를 알게 된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잎이 다 떨어지고서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수많은 잎(사람으로 말하자면 고민과 걱정과 혼란의 심리)을 빼내고(제거하고) 스스로를 몸을 가볍게 했을 때, 아니 마음을 가볍게 했을 때 이성선 시인의 시 <나무>처럼 창조성이 열어지는 것이다.

지금 당신의 자리에서 의미를 빼보라. 무엇이 남는가. 그것이 바로 당신의 위치다. CEO가 스스로 자신이 직원들 중에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빼보라.

의미빼기형 시가 우리에게 주는 생각의 덕목이다.

황인원 시인·문학경영연구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