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제주의 원도시는 다양성을 많이 잃어버렸다. 그러나 아직 많은 곳에서 원형 그대로의 스토리들이 남아있다. 지금이라도 스토리를 개발해 알린다면 더 많은 제주의 정신을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은 곧 인상이라고 한다. 그럼 제주도가 남길 수 있는 인상은 뭘까? 제주도 사람도 아닌 내가 요즘 찾고 있는 화두다.

지난 5일 문화기획 PAN이 주최했던 행사 ‘제주시 원도심 옛길탐험: 기억의 현장에서 도시의 미래를 보다’의 행사 현장에서 나와 같은 화두를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 낮에 진행된 건축가 김석윤 선생이 답사안내를 맡은 제주시 원도심 옛길 탐험과 밤에 진행된 ‘제주씨네클럽’의 파리의 옛 거리들을 소재로 한 영화 ‘사랑해 파리’를 통해 제주 인상의 원형을 만날 수 있었다.

사는 곳은 달라도 사람이 만들고 살아가고 있는 오래된 두 도시, 제주와 파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엿보게 되었다. 언젠가 제주를 배경으로 하고 제주를 소재로 한 이야기를 영화로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건축가 김석윤 선생과 영화제 프로그래머 사뮈엘 로르카, 이날 행사의 주연들인 문화기획 PAN의 고영림 대표, 대동호텔 비아아트 박은희 디렉터와 살펴보았다.

건축가 김석윤, 스토리 공간으로 만나는 건축학적 원도심

어쩌면 그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과거에 대한 단순한 고증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개발의 논리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무엇으로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를 고민해보면서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의 보존과 개보수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자는 의미였다. 나아가 역사와 문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것들의 전승과 발전의 의미를 현장에서 재해석해보면서 도시의 미래를 함께 그려보자고 권유한 것이다.

그는 건축가다. 건축가에게 도시라는 소재는 아주 밀접하다. 도시는 유물을 소유하고 있고 그 유물의 배경에는 스토리가 존재한다. 결국 건축이 스토리의 결정체다. 이곳 제주는 그 기반이 취약하다.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제주를 스토리로 추적하고 변환된 조형물로 대체되는 것, 이것이 그가 추구하는 제주의 건축물이 아닌가 생각했다. ‘오래된 도시에 대한 기억들을 엮어내는 작업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반드시 섬세하고 느낌이 와 닿는 메커니즘이 수반되는 창작물이어야 한다’라는 그의 생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제주 오현단의 경우 실사구시를 바탕으로 하는 탄생적 배경이 ‘제주도의 정신’이라고 단언하는 그다. 비록 숨겨져 있지만 오현단 스토리의 서술적 구조는 탄탄하다. 숨겨진 정신적 가치나 수준이 어마어마한 곳은 오현단 이외에도 제주에 많다는 그의 지적은 반가웠다. 도심의 원형들을 예술적 표현으로, 탄탄한 스토리의 채색으로 추억거리를 덧 씌워 가는 작업, 그것이 곧 복원이고 많은 시간이 흘러 제주 문화의 원형으로 기록될 것이다.

문화기획 PAN 고영림 대표, 깔깔대고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만난 원도심

‘우리 한 번 떠들어 보자’ 이 행사를 처음 기획한 그녀의 일성이다.

그녀는 씨네토크를 통하여 아직까지 제대로 소통해 보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는 제주 지역 사람들을 안아주고 싶어 했다.

그녀에게 원도심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원도심은 추억의 장소로 머무는 곳이 아니라 제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해주는 깊고 풍부한 텍스트임을 확인하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원도심의 골목들은 어쩌면 장난감이고 노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제주의 원도심은 다양성이 없다. 때문에 그녀는 조금 화가 난듯해 보이기도 했다.

이번 행사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동원될 것이다. 20여년 떠나 있으면서 늘 가졌던 고향 제주에 대한 향수와 프랑스에서 선험적으로 학습했던 문화적 다양성과 소통이 문화기획 PAN의 손에 의해 이곳 제주에서 완성될 것이라는 확신을 느낄 수 있는 행복한 자리였다.

원도심과 시청을 문화적 벨트로 묶어 주고 나아가 4.3공원과 가까이에 있는 4.3현장을 원도심 순레길을 통해 만나게 해 주는 작업. 사람들은 그녀를 통해 제주가 서울 삼청동의 한 구석처럼 아름답고 정겹다는 추억을 선물 받을 것이다. ‘스토리가 살아 있는 복원’,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다. 3월말 두 번째 원도심 탐방이 계속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은희 비아아트 갤러리 디렉터, ‘아트’와 소통의 공간에서 만난 원도심

이번 행사를 통해 제주에서 나고 자란 중년이상의 세대들에게는 기억의 보물섬이나 다름없는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마치 지워지지 않는 벽화의 조각들을 맞추어보듯 추억의 구슬을 꿰어보는 시간처럼. 나아가 이곳에 대한 추억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생활의 발견을 만나는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근무하고 있는 대동호텔 비아아트 갤러리라는 공간은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는 공간의 특수성 때문에 원도심 르네상스의 전진기지로서 손색이 없었다. 시간을 거슬러 그곳은 70년대 초 문화 1번지로 기억했던 청탑다방이 있었고, 이후 43년을 다듬어 온 대동호텔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따듯했다.

앞으로도 예술가들이 마음껏 쓸 수 있는 공간, 시민들이 예술 영화도 보고 뜨겁게 토론도 함께할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을 꿈꾸는 그녀는 분명 미래 제주 문화의 아이콘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 배경에는 미국 유학시절 강렬하게 느꼈던 ‘인종과 문화적 마이너리티’에 대한 애정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관람할 수 있는 전시장 하나 변변히 없었던 그녀의 어린 시절, 부친에게서 영향 받았던 그림과 사진에 대한 추억과 기억이 오늘의 예술적 DNA를 제공했고 부모님이 생활하시는 제주의 일상과 원도심에 대한 고민들이 융화되면서 ‘비아아트라는 비쥬얼’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요즈음 전국적으로 원도심 복원 운동이 대세다.

제주에서 원도심은 남문로, 중앙로, 칠성로를 말한다. 이 트라이앵글을 공간의 날줄, 씨줄로 엮어 칠성통에서 산지천까지 11곳의 제주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원도심 복원 작업의 근간이다. 복원이란 과거의 기록을 오늘이란 시간을 밟고 건너 내일로 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도심 골목의 낡은 벽들을 새로 칠하는 것이 아닌 나무처럼 푸릇푸릇한 정신을 심자는 운동이다. 마침내 이곳 제주에서도 시작되었고 그 문화적 레지스탕스 활동이 얼마가지 않아서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활약할 뜨거운 그들이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