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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어느 공연에서 2급 시각장애인인 김진섭씨가 지작시를 낭송하는 것을 봤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살아온 날들의 힘겨움을 전하면서도 앞날에의 희망을 함께 담은 작품이었습니다.'봄 내음, 여름 향기, 가을 햇살 그리고 겨울 바람 함께 어울려 느껴 보고 싶구나. 내 가슴에 시원한 외눈 하나 얻는 날 우리 함께 달려가고 싶구나.'2급 시각장애면 양 눈 중 좋은 쪽의 교정시력이 0. 04인 경우를 말합니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이렇게 심각한 시각 장애를 겪으면서도 김 씨처럼 주변사람들에게 오히려 희망을 전하며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그런 분들을 보면서도, 솔직히 고백하건대, 시력을 완전히 잃는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두렵습니다. 우리 시대의 석학인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 같은 분도 시각 장애에 대한 공포가 컸던 모양입니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에 귀의한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딸의 눈에 손상이 와서 곧 맹인이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때 패닉상태였어요. 그래서 딸과 교회에 갔을 때 기도를 했어요. 딸의 눈만 멀지 않게 해준다면 내가 교회는 열심히 다니지 못하겠지만 말하는 것, 글 쓰는 것으로 봉사하겠다. 그런데 진짜로 얘가 눈이 나았어요. 신과의 약속인데 안 지킬 수도 없고 그래서 세례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시각장애인을 '맹인'이라는 비칭으로 부른 것은 유감이지만 대석학도 딸이 시력을 완전히 잃는다는 것에 공포를 느꼈음을 진솔하게 밝힌 것은 인간적으로 느껴지더군요.우리 영화 ‘눈부신 날에’ (박광수 감독 2007년작)에서 주인공 우종대 (박신양 분)는 한 쪽 눈이 백내장 때문에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는 남을 속여서 돈을 뜯어내는 야바위 판의 바람잡이를 해서 연명하는 날건달입니다. 입에 걸레를 물듯이 내뱉는 말마다 더러운 쌍욕이 섞여 있습니다.

8그런 그에게 한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7세 여자 아이 준이 (서신애 분)입니다. 준이와 함께 찾아 온 보육원 교사 하 선생(예지원 분)은 종대에게 그가 준이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건달로 살면서 숱한 여자를 사귀어왔던 종대는 준이가 자신의 자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겉으로는 한사코 부인합니다.준이를 친자식처럼 아끼는 하 선생은 종대에게 돈을 주겠다고 제의하며 아이와 당분간만 함께 살아주기를 간청합니다. 죽기 전에 친아빠와 함께 살고 싶다는 준이의 소망을 들어주고 싶어서였지요. 준이는 신경교종 (神經膠腫)이라는 악성 종양을 앓고 있어서 생명이 얼마남지 않은상태입니다. 하선생은 종대가 그 사실을 알면 아이를 절대 받아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에게 아이가 아프다는 것을 숨깁니다.종대는 오로지 돈 때문에 아이와 함께 사는 것을 허락한 까닭에 준이에게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를 친아빠로 믿고 있는 준이가 워낙 살갑게 굴며 애정 공세를 펼치자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그러던 어느 날 종대는 소싸움을 조작해서 돈을 챙기려는 일당의 하수인 노릇을 하다가 실수로 패거리에게 큰 손해를 입힙니다. 평소 종대를 아니꼽게 보고 있던 패거리의 중간 보스(이경영 분)는 일당과 함께 그를 심하게 때려 만신창이로 만듭니다. 이로 인해 종대는 그나마 성했던 한 쪽 눈의 시력마저 잃게 될 위기에 처합니다. 그런 상황어 오자 종대는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절망에 빠집니다. 그는 술에 취해 허우적대느라 비 오는 날 준이가 옥상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방치합니다.종대는 자신의 실수로 밤새 옥상에서 비를 맞고 있던 준이가 병원에 입원해서야 아이가 악성종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책감에 휩싸인 그는 아이가 평소에 월드컵 축구경기를 보고 싶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준이를 데리고 야외 광장에서의 응원에 참여합니다.응원이 클라이맥스에 달할 즈음 준이는 쓰러지고 결국 세상을 떠납니다. 하 선생은 종대에게 준이의 마지막 소원을 전합니다. 자신의 각막을 눈이 멀어져가는 아삐에게 주고 싶다는.

이 영화는 박광수 감독이 7년만에 영화 연출 메가폰을 잡았다고 해서 화제가 됐습니다. 박 감독은 '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 사회성 짙은 수작들을 만들었지요.‘눈부신 날에’ 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다룬 박 감독의 전작들과는 달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정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물질에 얽매어 사는 삶 자체가 비루한 것이긴 하지만, 사랑이 있기 때문에 눈부신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주제가 뚜렷하게 부각됩니다. 전개 상황이 뻔히 보이는 이야기라는 약점이 있지만, 가슴이 따뜻하게 젖어드는 감동을 선사합니다.아마 진지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통해서 장기 기증의 귀중함을 깨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월드컵 축구대회에서의 승리로 많은 이들이 거리에 나와서 환호하는 바람에 종대와 하 선생이 아픈 아이를 실은 차를 이동시키지 못해 애쓰는 장면에서도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많은사람들이 절정의 기쁨을 누릴 때도 누군가는 슬픔과 아픔으로 쓰러져 울고 있다는 것을.눈이 밝은 관객은 영화의 끝 부분에 약간의 반전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챌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가족 관계는 혈연보다 애정에 바탕을 둔 것임을 성찰하도록 만듭니다.

본 기사는 건강보험 제 2009.6월호 기사입니다.